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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장르 소설은 주로 내 방에서 몰래 읽었고, 나머지 책은 서재에서 읽었었다.
데인에게 들었다니까 일반적인 책들만 언급됐으리라.
다행이다.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딱딱한 이론서는 좋아하지 않는다.
공작가의 서재에는 경제학, 행정학, 군사학 등 수많은 이론서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살짝만 훑어봐도 ‘아, 이 책을 읽는 순간 5초 안에 잠들 수 있겠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과 관련된 이론서는 조금 달랐다.
마력이 어쩌고 드래곤 저쩌고 엘프가 이러쿵 마법사가 저러쿵 하는데, 판타지 소설 같았다.
당연히 ‘마법의 원리’ 이런 책 말고, ‘마법의 역사’ 이런 책 위주로 봤다.
“그럼 한 가지 질문을 하지. 마력은 보이진 않으나 어디에든 존재하지. 그러나 균등하게 분포돼 있진 않아. 왜 그렇지?”
“음, 그건 마력 친화력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마법과 정령술의 상관관계’라는 책에서 읽은 적 있었다.
딱딱한 제목과 다르게 내용은 한 마법사의 전기였다.
제목만 보고 침대 한편에 놔뒀었다.
너무 잠이 안 오는 날 자장가 대신 읽으려는 용도였다. 그래서 어느 잠이 안 오는 날 펼쳐서 읽었는데 예상과 달리 너무 재밌어서 밤을 꼴딱 새워버렸다!
정령술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연 친화력. 그렇다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인간과 아닌 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3서클 마법사 이레글러 씨가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였다!
‘잔잔하지만 자신의 뚜렷한 철학과 감동이 담긴 이야기였지.’
재능의 한계에 부딪힌 이레글러 씨는 절망에 빠지게 되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 세상과 마주하려는 여행을 떠나는데! 모험담 사이사이에 자신의 깨달음과 마법에 대한 내용을 쉽게 풀어썼기에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개발서를 읽는 느낌이랄까.
“그래. 마력 친화력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마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알 수 없지만 이 붉은 액체 주위에는 고농도의 마력이 뭉쳐있지. 그게 너의 실수다. 베른.”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애초에 마력도 보지 못하는걸요!”
“알고 있다. 그렇기에 네가 레이프루프와 함께 하르겐 열매를 넣는 실수를 했지.”
“아니 하르겐을 넣었단 말입니까!”
경악이 섞인 분노가 데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하르겐의 열매가 뭐지? 레이프루프와 달리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하르겐 열매는 단독으로 사용하면 두통과 발열을 일으키는 독이지. 너는 피 냄새를 재현하기 위해 넣으면서도 한편으론 세르니아가 하르겐 독에 중독되길 바란 거겠지.”
“아, 아닙니다. 하르겐이라니.”
독 열매였구나.
내가 본 식물은 온실과 정원에 심어져 있는 식물이 전부였으니 모를 만했다.
공작의 지적에 유모는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그러나 하르겐을 레이프루프와 섞으면 달라진다. 독이 아니라 약으로.”
“약이요?”
“마력을 증가시키는 약. 하지만 워낙 미세하게 증가해서 마법사들은 잘 사용하지 않고, 가끔 평민들이 기운을 북돋는 약으로 쓰지.”
‘와. 공작님 상식이 풍부하구나.’
마법, 저주에 이어 이번엔 독초와 약초까지 꿰뚫고 있는 당신! 이 정도면 공작이 아니라 마법사라 해도 믿을 정도다.
공작의 새로운 모습에 입 벌리고 감탄하고 있었다.
“입 닫아라. 먼지 들어간다.”
“넵!”
공작은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공작님, 억측이십니다. 공작님이 말씀하신 게 전부 진실이라고 해도 제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왜 사람들을 모두 모았을 거라 생각하나. 범인은 이곳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
‘설마 공작님도 알고 있었던 걸까. 범인은 반드시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클리셰를!’
유모는 뭐라고 변명하려 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무심한 발걸음으로 유모의 곁을 지나쳤다. 공작이 향한 곳은 옷장.
드레스 룸 말고, 내가 즐겨 입는 옷이나 잠옷이 정리되어 있는 옷장을 벌컥 열었다.
덜컥.
옷장 안에는 붉은 장갑과 앞치마가 나왔다.
앞치마에 적혀 있는 이니셜은 그 앞치마가 유모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방을 청소하는 하녀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지.”
“모함입니다! 앞치마는 며칠 전 도둑맞은 상태라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누군가 저를 모함하기 위한 것입니다.”
유모의 연기는 대단했다.
완전 연기 대상감인데! 이젠 눈물까지 글썽이며 모함이라고 외치는 데 마음이 흔들리는지 데인은 베른을 안쓰러운 눈길로 봤다.
“모함이라. 베른. 자수할 시간은 곧 끝나간다.”
“…….”
공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너무 단호해서 무서울 정도.
‘확실히 앞치마는 유모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소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자수를 권하는 공작님을 보니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아직 남아 있는 건가?’
유모의 가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공작의 단호함에 자신이 깨닫지 못한 실수가 있었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뻔뻔하게 억울한 표정을 짓던 얼굴이 흔들렸다.
결국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물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째서.”
“뭐라고?”
데인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며 소리쳤다.
“맞아요! 제가 했어요. 세르니아 님을 저주하려고 했는데! 어째서 저주가 안 걸린 거죠? 분명, 분명 마법사가 알려준 방법으로 했는데 어째서!”
유모는 저주가 걸리지 않은 게 억울한지 히스테리를 부렸다.
격양된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자 공작이 짧게 혀를 찼다.
“저주란 대가가 필요하다. 네가 아무 대가도 걸지 않았기에 저주가 걸리지 않은 것이다.”
“대가라면 저 액체와 인형이 대신 된다고 엉터리 마법사가!”
“너는 엉터리로 가르쳐준 마법사에게 감사해야겠지. 만약 네가 저주의 대가를 지불했다면 너도 저 인형과 똑같은 상태가 됐을 것이다.”
“그, 그런…….”
유모는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공작은 그저 건조하게 검을 뽑았다.
스릉 하고 뽑힌 검은 단단한 쇠마저 두부처럼 베어버릴 듯 날카로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거지? 목 댕강 그거지?
나는 다급하게 공작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공작님.”
“뭐지?”
은빛으로 빛나는 검만큼이나 날카로운 초록색 눈동자가 나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조금 주춤했으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유모의 처벌은 제가 하게 해주세요.”
“귀족 저주는 죄가 무겁다.”
공작은 당장이라도 목을 벨 것처럼 말했다.
그의 위압감에 유모는 어깨를 흠칫 떨며 움츠러들었다.
“미수였는걸요. 그리고 처벌을 하기 전에 이유부터 들어보고 싶어요.”
“말해라.”
이유를 듣고 싶다는 부탁은 순순히 들어줬다.
유모는 격양됐던 감정을 진정시키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르니아 님만 없었으면 그 자리는 내 아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아니 원래 그 아이의 자리였어요! 그걸 세르니아 님이 뺐었습니다!”
“유모의 자식?”
“베른 부인.”
유모가 어느 자작가의 부인인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식이 있었구나. 그렇지만 유모는 쌍둥이가 태어나고 나서 한 번도 가문으로 돌아간 적 없었다. 자식이 있었다면 휴가를 받아서 보러 갔을 텐데.
데인은 뭔가 알고 있는지 그녀를 안쓰러워했다.
“가난한 가문에서 비싼 약값을 지불하려면 제가 쉴 수 없었습니다. 제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아팠기에 저도 일을 해야 했어요. 제 사정을 알고 있는 공작부인께서는 아이를 데려와서 함께 키워도 된다고 했으나 공작님이 혼자서 아이 4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불허하셨습니다.”
“베른 부인, 그건 세르니아 님 탓이 아닙니다.”
“세르니아 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제 아이는 공작가에서, 제 품에서 자랄 수 있었는데! 그 아이는…… 흡…… 흑, 저의 얼굴도 모르겠죠.”
유모가 흐느끼며 울자 데인은 침착하게 그녀를 말렸다.
그렇게 된 거였군.
진실은 허무한 법. 그리 거창하지 않은 이유였으나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았다.
‘조금 씁쓸하네.’
유모는 내가 부모님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자작가에서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외롭게 지내는 것을 전부 내 탓으로 돌렸다. 인간은 늘 자기 좋은 쪽으로 합리화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잘못된 일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기에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겠지.’
나는 저주 사건이 4년이나 늦게 일어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4년이란 공백은 유모가 마땅한 저주 방법을 찾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4년 전부터 나를 저주하려고 머리카락과 귀걸이를 챙겼으나 저주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저주 방법은 마법사가 아닌 이상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세르니아가 저주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눈치챈 것은 아닐까. 유모의 태도가 쌍둥이를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 다르다는 것을.
‘나는 전혀 못 느꼈지만.’
어쩌면 원작의 세르니아는 공작가에 얹혀살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눈치를 보고 살았기에 예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유모가 자신에게 보내는 미묘한 감정을. 그래서 그녀는 유모가 저주의 방법을 찾기도 전에 먼저 의심을 해서 유모의 방을 뒤진 게 아닐까.
나는 이젠 알 수 없는 소설 속의 내용을 정리하며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베른 부인, 일어나세요.”
나는 처음으로 유모를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흠칫 떨더니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공작님 제게 베른 부인의 처벌권을 주세요.”
“……알겠다.”
공작의 얼굴이 어딘가 못마땅해 보였으나 쉽게 수락해줬다.
나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싱긋 웃어주고 베른 부인을 향해 걸어갔다.
“베른 부인, 당신을 해고하겠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함구하겠지만 이제 귀족가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겠습니다. 자작가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사교계에도 나오지 마시고 거기서 살아요. 평생. 사랑하는 아이와 함께해주세요.”
담담한 내 목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다들 내가 이런 처벌을 할 거라 예상 못 했는지 시선이 내게 쏠렸다.
데인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고, 공작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베른 부인은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흘렸다.
“흡, 흑…….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나는 베른을 위로하지도 내치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사실 화나진 않았다. 나를 저주하려고 했으나 직접적으로 피해 본 것은 없었다. 거기다 자기 아이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려고 한 짓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일을 저질렀을지 어렴풋이 이해가 갔기에.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으니.’
서술 트릭. 소설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의 시점으로 서술했는지에 따라 사건은 180도로 변한다.
‘히든 스토리 찾는 느낌인데.’
사건은 빠르게 정리됐다.
유모, 베론 부인은 바로 짐 싸서 공작가를 나갔고 일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내 방을 정리했다.
“이 방은 폐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