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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붉게 물들었던 침구가 교체되고, 옷장에 있는 옷들도 버려졌다.
나름 애착을 가졌던 옷들이라 마음이 아팠는데 옆에 있던 공작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방을 바꾸지. 굳이 이 방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
“아뇨. 이유는 없지만, 너무 뜬금없어서요.”
“어차피 조만간 방을 옮기라고 하려고 했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나는 의문이 서린 얼굴로 데인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 있는 방은 너무 멀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내 방은 4층 제일 안쪽에 있었다. 처음 공작가에 왔을 때 공작부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공작부인의 방과 제일 먼 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쭈욱 나는 이 방에서 지냈었다.
‘크게 불편하진 않은데.’
내 생각과 다르게 공작은 꽤 신경 쓰고 있었는지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번복은 없다고 못 박았다.
“어디로 옮길까요?”
“어디가 좋지?”
데인이 공작에게 물었고, 공작이 다시 내게 물었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쌍둥이 옆방이요!”
“알겠다. 필요한 가구는 데인에게 부탁해라.”
“아니에요. 지금 있는 걸로 충분한걸요.”
공작은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 사이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나는 굳이 가구를 바꾸고 싶지 않아서 공작의 주의를 돌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삼촌, 아까 베른 부인이 끝까지 발뺌했다면 어떻게 했을 거였어요? 다른 증거가 있었나요?”
불만을 품었던 공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래. 하르겐과 레이프루프 섞으면 마력이 증가되는 약이 된다고 했지. 그건 먹지 않고 바르기만 해도 되는 약이다. 마력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내 눈엔 보였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주위에 증가된 마력을.”
아하, 그래서 공작은 처음부터 범인이 베른일 줄 알았다는 듯이 말한 거군.
나는 새삼 그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와! 삼촌 진짜 대단해요.”
“별거 아니다.”
내가 박수를 치며 치켜세우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서렸다. 그리고 가구 이야기는 잊었는지 공작은 티타임을 마저 하겠다며 말했고 나는 그와 함께 쌍둥이가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사건을 뒤늦게 들은 쌍둥이는 온종일 내 걱정을 했다. 물론 그들에겐 조금 순화해서 설명했었다.
그리고 마음 한편엔 혹여 쌍둥이가 원작처럼 나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들이 진심으로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기에.
“오늘은 셋이 같이 잘까?”
10살 이후에는 쌍둥이가 같이 자자고 해도 내가 거부했었다.
내게 의존하는 성향이 너무 큰 것 같아서. 한동안 어리광을 부렸으나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어리광은 줄어갔다.
섭섭하긴 했지만 내가 언제까지 품고 있을 순 없으니까.
“좋아요!!”
“좋아요!!”
내가 오랜만에 같이 자자고 해서인지, 낮에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쌍둥이들은 같이 잔다는 말에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방을 옮기고 첫날. 벽지도, 가구배치도 다른 낯선 방이었으나 쌍둥이와 함께하는 밤은 어느 순간보다 편안했다.
***
겨울이 지나가고 새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빠르게 지나간 계절의 흔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다가올 빅 이벤트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가씨 오늘은 날이 찬데 숄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응. 고마워. 좀 있다가 에리얼, 아리엘 수업 끝날 때쯤 맞춰서 온실에 티타임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 하자 지나가던 시녀 한 명이 다가와 숄을 건넸다.
이렇게 착한 사람들밖에 없는데 말이지.
하늘은 내 눈동자 색만큼이나 흐렸다.
회색 구름이 잔뜩 껴서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지만 습한 공기 사이에 섞인 장미 향기는 한층 더 진하게 풍겨왔다.
‘황태자의 탄신연회만 무사히 지나가면 아리엘의 악녀 루트는 완전히 피할 수 있을 거야.’
소설의 주요 배경은 아카데미! 1년 후에 입학할 아카데미에서 마법과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는 여주인공이 입학하면서 시작된다.
외전에서 15살 때 황태자 탄신연회에 참석한 아리엘은 황태자 헬리오스를 보고 반하는데!
‘내가 황태자 욕 좀 많이 했으니까 괜찮겠지.’
황후가 되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며 단점도 구구절절 설명했었다.
정작 아리엘은 ‘언니가 싫어하면 저도 싫어요!’하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만약’이 있지 않은가. 첫눈에 반할 때는 순간적인 느낌에 매료되어 순식간에 사랑에 빠져버리니.
‘휴, 리엘아 언니가 믿는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온실에 도착했다.
다음 주에 있을 황태자의 탄신연회를 고민하며.
“누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어?”
“바보야! 언니가 늦은 데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언니에게 뭐라고 하지 마.”
“둘 다 빨리 왔구나.”
“언니랑 빨리 놀고 싶어서 수업 열심히 들었어요!”
“칭찬해 주세요!”
15살 먹고 아직 나한테 칭찬받고 싶을까?
슬슬 사춘기 올 때인데 사랑으로 자란 쌍둥이들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나를 봤다.
얼른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며.
“응. 대단하다! 역시 내 동생들이야.”
“당연하죠.”
“이 정도쯤이야!”
오른손으로 아리엘의 머리를, 왼손으로 에리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쌍둥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더니 내게 쏙 안겼다.
“언니 결혼하지 말고 저랑 평생 살아요.”
“아니야! 누님은 나랑 살 거야. 넌 저리 가.”
“셋이 살면 되지. 지금처럼.”
“으음, 에리얼이랑 평생 사는 건 싫지만 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제가 참을게요.”
“흥. 나도 너 싫거든! 누님이 없었으면 너 같은 거랑 잠깐도 같이 있기 싫어.”
왜 이렇게 맹목적으로 따르게 됐을까. 동물이 처음 보는 걸 부모라고 각인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나는 귀여운 쌍둥이를 흐뭇하게 보며 말했다.
“피를 나눈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데. 너희들은 특히 쌍둥이잖아.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하렴.”
“언니도 제 가족인걸요. 언니가 제일 소중해요.”
“맞아. 누님이랑 저희도 피를 나눈 가족이잖아요!”
아차.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도 없이 혼자인 나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알지. 나도 너희가 제일 소중하단다.”
꼬리가 있다면 격하게 흔들고 있을 쌍둥이는 내 말에 기분 좋아 보였다.
우리는 느긋한 티타임을 보냈다.
달콤한 케이크와 쌉싸름한 홍차와 함께 웃음꽃을 피우는데 주제가 튀더니 황태자의 탄신연회로 넘어갔다.
“언니는 왜 같이 안 가요?”
시작은 평범했다. 아리엘이 무슨 드레스를 입고 갈 거냐고 물었다. 나와 커플 드레스를 입고 싶다고.
나를 오징어로 만들고 싶은 걸까. 15살이 된 아리엘은 인어공주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역시 소설 공인 제국 최고 미녀!
어쨌든 나는 별생각 없이 파티에 안 가니까 드레스를 안 입는다고 대답했는데 그게 충격이었는지 아리엘은 왜 안가냐고 내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쌍둥이는 내가 당연히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 나는 거기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라고 변명할 순 없고……. 뭐라고 하지?’
“어, 어제부터 감기 기운이 돌아서. 나는 집에서 쉬고 있을 테니 둘이 재밌게 놀다 와.”
“누님이 아픈데 어떻게 재밌게 놀다 옵니까? 누님이 안 가시면 저도 안 가겠습니다.”
“저도요!”
음? 다 같이 안 가는 것도 좋은데.
어쨌든 아리엘이 황태자에게 반하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것도 나름 괜찮은데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안 된다.”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뜬금없이 온실에 나타난 사람은 공작이었다.
‘이야. 공작님은 나이를 먹어도 미모가 시들지 않는구나.’
나는 한 달 만에 보는 공작님의 눈부신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직 황태자를 못 봤지만 내 기준으로 탑 미모!
두 명의 아이가 있는 아빠라곤 생각도 못 할 얼굴이었다.
‘주름 하나 없는 게 말이 돼? 마력이 많을수록 천천히 늙는다던데 나도 마력이나 쌓아볼까.’
실없는 소리였다. 마력을 느낄 수 있었으면 벌써 마탑에 들어갔겠지.
하지만 마흔이 다 돼가는데 주름 하나 없는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쌍둥이보다 채도 낮은 어두운 적발. 에메랄드보다 빛나는 녹안을 보고 있으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2차원 캐릭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탄신연회는 무조건 참석해라.”
“아픈데 무리하는 건 안 됩니다!”
아리엘이 발끈하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공작은 꿈쩍도 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고 생각했는데 왜 날 보는 걸까?
“아픈가?”
“네? 아,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거 같아서요.”
“사제를 부르지.”
“네?”
사제요? 갑자기요?
의원도 아니고 사제란다. 의원은 한국에서 흔히들 말하는 의사라면 사제는 신성력으로 병을 치료해준다. 의원과 사제의 진료비용은 차원이 다르다.
감기 걸린 것도 아니고 고작 감기 기운이 살짝 돈다고 부르다니!?
“아니요. 사제님을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푹 쉬면 금방 나을 거예요.”
공작가의 재력을 얕본 내 잘못도 있지만 무턱대고 사제부터 찾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쉬면 괜찮을 거라고 하면서 제발 넘어가길 기도했다.
“그럼 푹 쉬고 가면 되겠군.”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공작은 여전히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압력을 받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넙죽 무릎 꿇으며 ‘분부 받들겠습니다!’ 하고 외쳐야 할 것만 같았다.
‘아니야. 물러서지 말자. 내가 이 이야기는 안 꺼내려고 했는데, 공작님이 이렇게 밀어붙인다면 나도 히든카드를 꺼내지!’
“사실……. 저는 황궁에서 초대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보통 크게 열리는 파티는 입장 명단이 있다.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도 모두가 초대받는 건 아니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사자가 못 갈 경우 대신 갈 수도 있지만.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야 이 분위기. 내 예상 이상으로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공작가의 직계도 아니고 같이 갈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어라? 혹시 분위기 파악 못 한 건 나야?
내 의도는 단순하게 초대장을 못 받아서 못 간다는 거였는데 이들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나 보다.
“언니 그런 파티는 갈 필요도 없어요.”
황태자님의 탄신연회가 한순간에 갈 필요가 없는 파티로 변했다.
아리엘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누님 신경 쓰지 마세요. 누님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일 뿐입니다.”
가끔 아리엘에게 틱틱거리긴 했어도 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에리얼이 싸늘하게 말했다.
얘, 얘들아 나는 전혀 상처 안 받았고 신경도 안 쓰는데.
이상한 분위기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공작을 바라봤다.
그래도 어른이니까 이 상황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서.
“상관없다. 잊지 말거라. 너는 아르덴타인이다. 아르덴타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
쌍둥이는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반했는지 존경스럽게 바라봤으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이보세요, 아저씨. 공작 위에 황제 있다고요.
이러니까 소설 속에서 쌍둥이가 반란을 쉽게 생각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