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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9화 (9/123)

-9-

정말 한숨이 끊이질 않는다니까.

공작은 할 말을 끝냈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온실에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쌍둥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쨌든 강제 참가하라는 거잖아.

***

아침부터 공작가는 부산스러웠다.

눈뜨자마자 꽃을 띄운 목욕에 전신 팩에 마사지에……. 수많은 손길이 나를 거쳐 갔다.

이런 호사를 노려본 건 단연코 처음이었다.

처음엔 기분 좋았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관리에 지칠 때쯤 드레스가 도착했다.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줬다. 허리가 작을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사이즈는 딱 맞았다.

“와! 예쁘다.”

“잘 어울립니다.”

허리에 달린 커다란 리본이 포인트인 아이보리색 크리놀린 드레스였다.

실크로 만들었는지 은은한 광택이 돌았고, 치마 쪽엔 반투명한 레이스가 감싸서 귀여움을 자아냈다.

특히 따뜻한 아이보리색이 진보라색인 내 머리카락 색과도 잘 어울렸다.

‘미용실에서 이런 색 했으면 최소 탈색 3번에 일주일 만에 물 다 빠졌다고 한탄할 색.’

쌍둥이만큼 강렬한 색은 아니지만 전생에 절대 시도도 해볼 수 없던 색이라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약간 웨딩드레스 같네.’

티파티에 입는 가벼운 드레스는 있었지만 정식 파티드레스는 처음이었다.

아이보리색에 레이스까지 있으니 정말 웨딩드레스 같았다. 목까지 올라와서 노출도는 0에 수렴하지만.

내가 기분 좋게 드레스를 감상하고 있자 옆에 있던 시녀 첼시가 폭탄 발언을 했다.

“공작님께서 준비하신 드레스입니다.”

“이 드레스를? 공작님이?”

나는 물음표를 머리 위에 띄우며 물었다.

물론 나에게 황궁 파티에 입고 갈만한 드레스가 없긴 했으나 아리엘의 드레스를 적당히 빌려 입을 생각이었었다.

“네. 아리엘 님이 공작님께 세르니아 님의 드레스가 필요하다고 전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아리엘에게 감사를 해야겠네.”

첼시는 내가 어느 부분을 궁금해했는지 정확히 캐치하곤 원하는 답을 알려줬다.

그럼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엘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나가려는데 첼시의 뒷말이 들려왔다.

“다만 드레스는 공작님이 직접 고르셨다고 하니 공작님께도 인사를 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공작님이 직접?”

올해 들은 개그 중에 제일 웃겼다. 하하…… 정말인가?

내 귀를 의심하며 첼시를 쳐다보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유능한 첼시의 말인데 거짓말일 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공작님이 직접 살롱에 가서 드레스를 골라왔다니. 상상만 해도 웃기잖아!

똑똑똑.

대체 공작님에게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이 너무 뻔해서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언니! 준비 끝났어요?”

“누님 식사는 하셨나요?”

역시 쌍둥이였다.

그들이 들어오기 무섭게 잔잔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와! 언니 진짜 너무 예뻐요!”

“누님은 늘 아름다웠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이렇게 꾸민 언니를 보는 건 처음이니까!”

“확실히 평소의 누님도 예쁘지만 오늘은 정말 최곱니다.”

“맞아! 오늘 파티장에서 제일 예쁜 사람은 분명 언니예요!”

이 녀석들……. 내가 참 잘 키웠다.

당연히 파티장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일단 소설 속에서 정해놓은 제국의 꽃은 다름이 아닌 아리엘인걸!

화려한 외모와 사람을 홀리는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다른 나라까지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미인이 된다.

하지만 쌍둥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 것도 알고 있다.

왜 있지 않은가.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보다 내 친구가 더 예뻐 보이고 잘생겨 보이는 것.

쌍둥이 눈엔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기에 날 보고 이렇게 칭찬하는 거겠지.

“고마워. 오늘 아리엘과 에리얼도 엄청 눈부신데!”

“정말요? 다행이다. 언니가 예뻐해 줄지 고민했거든요.”

“아리엘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1순위인걸.”

“누님 저는요?”

“당연히 공동 1위지.”

근데 정말 장난 아니고 둘 다 굉장했다.

아리엘은 진녹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 같아 보였고, 에리얼은 깔끔한 검은색 연미복이지만 붉은색 커프스링크로 포인트를 줘서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차 준비가 끝났습니다.”

서로 자기가 1위라며 아웅다웅하는 사이 집사가 마차를 대기시키고 우리를 부르러 왔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유능해. 지시하지 않아도 먼저 준비해놓는 센스!

나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조금 설렌다. 황궁에 가는 거 처음이야.”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망 플래그를 피하기 위해 늘 전전긍긍하며 지냈었다.

쌍둥이와 함께한 시간은 즐거웠다.

그들이 안타까웠고, 소설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서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보듬어줬다.

내가 사랑해주는 만큼 쌍둥이도 나를 사랑해주었기에.

다만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감이 있었다.

내가 읽었던 소설이 이들의 운명이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꿀 수 없다면?

‘나’라는 이물질로 인해 이들의 미래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태껏 공작가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티파티라고 해봤자 공작가 안에서 하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소소한 파티였고, 사교계나 공식장소에는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오늘이 내겐 처음으로 세상에 나가는 날이었다.

‘언젠가 원작이 시작되는 시점이 와도 나는 밖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원작 시작도 전에 남주인공 얼굴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환생한 지 벌써 17년. 솔직히 17년 동안 오락거리도 없는 세상에서 공작가 안에만 있었으면 오래 버틴 거지. 황태자 탄신연회도 참석하는 마당에 이제 참지 않고 여기저기 놀러 다녀야겠다.

양쪽에서 조잘거리는 쌍둥이의 수다를 BGM 삼아 멍하게 있었는데 마차는 어느새 황궁에 도착했다. 시종이 마차 문을 열어줬고, 내 에스코트는 공작이 했다.

‘공작님에게 에스코트 받는 날이 올 거라 상상도 못 했었는데.’

내가 파티에 가는 게 확정되자 쌍둥이는 누가 나를 에스코트할 것인가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역대급으로 치열하게 싸워서 공작가가 한바탕 뒤집어졌고, 소란을 전해 들은 공작이 깔끔하게 정리했다.

‘내가 하지.’

공작의 선언에 얼빠진 쌍둥이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밤, 공작에게 에스코트를 뺏긴 게 분했는지 쌍둥이는 몰래 작전을 짜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다음부턴 공작님에 뺏길 바에 둘이서 번갈아 가면서 하자고.

“아르덴타인 공작님과 세르니아 영애 입장하십니다!”

뒤이어 쌍둥이의 이름도 불렸고, 우리는 파티장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입장했다.

‘시선이 따가워.’

수많은 시선을 받는 것은 처음이라 부담스러웠다.

레드카펫 포토라인에 선 연예인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그들보단 낫겠지. 적어도 플래시는 없으니. 나는 너무 긴장해서 드레스 자락을 밟을까 봐 조심하며 걸었다.

“허리를 펴라. 여기서 네가 두려워할 존재는 없다.”

내 떨림이 잡고 있던 손을 통해 전해졌을까.

공작은 평소와 같이 무심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를 듣자 마법처럼 긴장이 풀렸다.

나를 잡아준 손은 단단해서 의지가 됐다.

“네. 공작님과 함께 있으니까 든든하네요.”

솔직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황제 폐하와 황태자님 입장하십니다.”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웅장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시종의 말이 끝나자 홀에 모인 귀족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공식행사는 처음이었지만 행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교육은 받았었다. 마치 학교 조례 같은 순서였다. 이어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있겠습니다.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 준 그대들에게 감사를 먼저 전하지.”

과연 황제는 ‘마지막으로’를 몇 번 언급할 것인가!

나는 볼록 튀어나온 배마저 교장 선생님을 닮은 황제를 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안 돼. 세르니아. 여기서 웃으면 사형이다. 참자.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교장 선생님 같은 친근한 황제를 계속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왜 저 얼굴을 못 봤지?

무시하고 싶어도 도저히 무시 못 할 얼굴인데!

나는 황제의 옆에 덤덤히 서 있는 황태자의 얼굴을 이제야 확인했다.

‘진짜 정석 미남. 후광이 장난 아니다.’

작가가 한 페이지 넘게 황태자 외모를 줄줄 묘사한 부분이 있었다.

솔직히 개성 있는 얼굴을 표현할 때는 각각 다르지만 정석 미남의 묘사든 어디든 똑같았다.

오뚝한 콧날이 어쩌고 날카로운 턱선이 어쩌고.

나는 여기서도 남주 미모 찬양은 똑같네 하면서 코웃음 치고 넘겼는데.

‘작가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정성 들여서 표현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세계의 구현도가 매우 뛰어났는지 정말 책과 똑같은 묘사를 가진 남주인공이었다.

다이아몬드보다 눈부신 실버 블론드. 별보다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는 이질적이면서 찰떡이었다.

‘피부 하얀 것 좀 봐. 나였음 벌써 얼굴만 동동 떴다.’

솔직히 에리얼과 비교했을 때 황태자가 조금 더 잘생겼다.

“마지막으로 모두 파티를 즐기시게나.”

허허허! 하는 호탕한 황제의 웃음소리가 끝나자 황제는 자리에 앉았고, 황태자만 서 있었다.

뻘쭘하게 혼자 서서 뭐 하는 거지?

“언니, 아버지 뒤로 숨으세요.”

“어? 왜?”

뒤에 있던 아리엘이 내 팔을 살짝 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황태자님이 아직 약혼녀가 없어서 춤 상대를 찾고 있단 말이에요. 언니를 보면 분명 춤 신청할 거니까 얼른 아버지 뒤에 숨어요.”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을……. 아니다. 너도 일로와.”

이 파티장에 미인이 얼마나 많은데 황태자가 미쳤다고 나에게 춤 신청을 하겠는가! 하지만 아리엘은 달랐다. 파티장에 나타난 순간부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녀라면 황태자가 춤 신청할지도 몰랐다.

‘원작에 어땠는지 안 나왔지만 혹시라도 춤췄다가 반하면 안 되니까.’

공작의 뒤에 숨어서 속닥거리고 있었더니 에리얼이 다가왔다.

“누님, 저랑 한 곡 추시겠어요?”

“안 돼!”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리엘이 잽싸게 막아섰다.

에리얼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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