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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는 아버지랑 추면 되잖아.”
“내가 언니랑 출 거야!”
“뭐? 여자끼리 추겠다고?”
“그래. 불만 있어? 있어도 안 들을 거지만.”
아리엘이 내 오른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나 에리얼도 질 생각이 없는지 왼쪽 손목을 붙잡으며 으르렁거렸다.
“누가 여자끼리 춤추냐.”
“나. 내가!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거든. 그러니까 신경 끄고 그 손 놓지?”
“싫어! 네가 누님이랑 추는 건 뭐라 안 하겠는데 내가 먼저 신청했거든. 너야말로 그 손 놓지?”
전기가 파직하고 튄 건 기분 탓일까.
쌍둥이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파티장이 술렁였다.
그 중심에는 황태자가 있었다.
‘황태자가 파트너를 정했군.’
누굴까.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외전에서도 파티장은 한 페이지조차 안 되는 분량이었으니.
‘황태자 미모는 한 페이지 넘고, 우리 리엘이가 황태자에게 반하는 장면은 한 페이지도 안 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작가님의 편애에 기분이 나빠져 홀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는 황태자를 째려봤다.
“황태자님과 춤을 추고 싶은 건가?”
아직 싸우고 있는 쌍둥이에게는 눈길도 안 주던 공작이 나에게 중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분노를 담아 째려본 눈빛을 동경의 눈빛으로 착각한 건가.
나는 절대 황태자와 엮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니요.”
“그럼 누구와 추고 싶지?”
그의 물음에 쌍둥이도 싸움을 멈춘 채 나를 바라봤다.
파티장 입장 할 때 보다 이 세 명에게 받는 눈길이 더 따가운 이유는 뭐지.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여기선 무난하게.’
“공작님이요!”
방긋.
17년간 갈고 닦은 무해해 보이는 미소!
적의를 담지 않고 최대한 만만해 보이는 얼굴이 되도록 거울 보고 열심히 노력했었지.
내 대답에 쌍둥이는 불만이었으나 반박은 하지 못했고, 올려다본 공작도 무표정이었으나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역시. 선택해야 할 때는 최고 권력자를 선택해야지.’
타이밍 좋게 황태자의 첫 춤이 끝나고 홀 중앙으로 여러 귀족들이 손잡고 나왔다.
나도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중앙에 섰다. 드디어 공작가에서 갈고닦은 피나는 노력을 보여줄 때군!
아리엘이랑 같이 수업받으면서 선생님께 얼마나 구박받았는가.
‘아리엘과 에리얼이 뛰어나게 잘하는 거지 나는 보통이라고.’
나는 보통! 뭘 해도 중중!
인생은 평균만 해도 됐다. 하지만 역시 첫 춤이고, 상대가 상대인지라 조금 떨리긴 했다.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다. 나만 보면 돼.”
‘그게 더 떨리는데요!’
솔직히 소설 남주인공이고, 작가 원픽인 황태자 잘생기긴 했으나 내 취향이냐고 물으면 아니었다. 내 취향은 퇴폐미. 나른 퇴폐 미남 최고!
그러니 내 취향 저격인 공작의 얼굴을 계속 보는 건 심장에 더 부담을 주는 일이다.
곡이 시작됐다. 무난한 왈츠 곡. 나는 속으로 박자를 세며 공작의 발을 밟지 않도록 노력했다.
“세르니아.”
“네?”
왜 그렇게 나른하게 불러요. 사람 설레게.
발만 보다가 공작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싱그럽게 빛나는 에메랄드 눈동자와 마주쳤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공작님이라 부를 거지?”
“네?”
뜬금없는 대화 주제에 내가 앞부분을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모르겠는데? 공작님을 공작님이라 부르지 아니면 뭐라고 불러.
“나는…….”
“…….”
처음이었다. 공작이 이렇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낸 것은.
마주 본 초록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을 한참이나 달싹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삼촌이다.”
???
머릿속에 블루 스크린이 뜨고 시스템다운 된 느낌이었다.
꾹.
머리가 정지했더니 몸도 같이 정지해서 발을 헛디뎠다.
그리고 밟아버렸다. 최종 보스의 발을.
“아……. 죄,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래서 대답은?”
잘못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공작은 한 번 더 대답을 강요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꾹.
당황해서 스텝이 꼬이더니 또 공작의 발을 밟았다! 하얗게 질려서 공작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일단 주위를 돌리자!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삼촌! 제가 춤이 서툴러서……. 절대 고의로 밟은 게 아니에요. 삼촌.”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삼촌 소리가 듣고 싶었다는 거겠지.
시작과 끝을 삼촌으로 포장했다.
“음…….”
발이 많이 아팠던 걸까.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공작이 대답이 없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눈치를 봤다. 그냥 에리얼이랑 출 걸 그랬나. 5분 전의 나를 원망했으나 이미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었다.
“그래. 삼촌이다.”
“네? 아, 네.”
뭐야. 삼촌이란 단어를 음미하고 있었던 건가? 늘 공작의 눈치를 보던 내가 봤을 때 그다지 싫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 좋아 보였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장난꾸러기 웃음과 달랐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황제 폐하 입장 전에 하려던 소리가 이거였나?’
왈츠가 끝났다. 공작의 발을 두 번이나 밟았지만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무사히 넘어가서 다행이다. 나는 공작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쌍둥이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시선을 돌렸지만 허공에서 부딪힌 느낌은 확실했다.
‘뭐지? 공작님이랑 춤추는 상대가 아리엘이 아니라서 본 건가?’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고, 공작부인도 없는데 딸도 아닌 사람과 등장했으니 사교계의 화제가 될 만했다.
“언니! 다음은 저예요! 제가 가위바위보 이겼어요!”
“누님. 이번엔 졌지만 다음엔 이길 거예요. 대신 아리엘 다음은 저와 춤춰주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추는 건 양보 못 해요!”
황태자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내가 중앙에서 나오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쌍둥이가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가렸구나.
“알겠어. 가자.”
“네.”
아리엘과 에리얼에 비해 못 춘다고 생각했는데 공작과 추고 왔더니 그냥 내가 못 추는 거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나를 배려해 춤을 잘 추는 아리엘이 남자 파트를 췄다.
‘역시 미래의 사교계 꽃!’
그녀가 홀 중앙에 나서자 시선이 모였다. 공작과 출 때도 이랬을까? 첫 춤은 내가 긴장한 것도 있지만 공작의 얼굴 때문에 주위를 볼 여유가 없었다.
아리엘의 표정은 내내 밝았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리드에 나도 덩달아 흥이 났다.
“언니 이제 긴장 풀리셨죠?”
“아까 공작님 발 밟는 거 봤구나.”
“언니는 긴장하면 발 밟잖아요. 사실 밟을 거라 예상했었어요.”
“뭐? 그럼 말려주지.”
“흥. 저는 분명 말렸어요. 제가 첫 춤을 추자고 했는데 언니가 선택한 거예요.”
아리엘이 볼을 부풀리며 토라진 척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녀도 내 웃음을 보더니 볼에 넣은 바람을 빼고 같이 푸스스 웃어버렸다.
“다행이에요.”
“뭐가?”
“언니랑 같이 와서요. 아니었으면 심심해 죽었을 거예요.”
아리엘과 에리얼에겐 소꿉친구가 없다.
가문끼리 이어오던 교류도 현 공작으로 바뀌면서 끊겼고, 공작부인이 공작가에 없어서 사교모임에도 따로 나가지 않았기에.
내가 원작 스토리를 걱정해서 자발적으로 틀어박혔다면 쌍둥이는 피동적으로 갇혀 살았다.
“이참에 친구 많이 사귀자.”
“저는 언니만 있으면 돼요.”
“안 돼. 나는 너희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봤으면 좋겠어.”
언제나 쌍둥이의 의견을 존중해주던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아리엘은 놀라는 얼굴이었다.
내 태도에 우물쭈물하던 아리엘이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직은 언니랑 있고 싶어요.”
한층 작아진 목소리였다. 이 어리광쟁이를 어떻게 해야 하려나.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앙다문 입술이 까칠해 보이는 소녀는 너무 여렸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허리를 힘을 주어 잡았다.
“응. 나는 네가 돌아올 곳인걸.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니까.”
“네. 약속이에요.”
스스로 쌍둥이의 보모를 자처했으니 당연히 할 일이었다.
모험을 떠난 그들이 돌아올 곳.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로 약속했다.
두 번째 곡이 끝났다. 나는 바로 끌고 나가려는 에리얼의 소매를 붙잡으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세곡 연달아는 무리야.”
“알겠어요. 좀 쉬고 계세요. 마실 거 가져올게요.”
에리얼은 마실 것을 가지러 갔고 아리엘은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다.
“그대가 공작가의 숨겨놓은 보물이군.”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다가온 사람은 황태자였다. 그의 등장에 아리엘은 얼굴을 굳혔고, 나는 예의상 인사를 했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괜찮아.”
헬리오스 아슬란데.
‘신유신’의 남주인공이며 아슬란데 제국의 황태자. 그는 태양 같은 남자였다. 이성적이고 완벽하며 존재 자체만으로도 빛을 내는 황제의 표본이었다. 물론 완벽하기만 하면 재미없지.
여주인공에게 반한 헬리오스는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고 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면서 매력을 뽐냈다.
‘나는 그렌드윈파였지만.’
로맨스 소설 읽을 때도 서브남주를 좋아하던 나는 장르가 바뀌어도 취향은 한결같았다. 이상하게 옆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아련하게 여주인공에게 고백하고 차이는 애들이 좋았다.
‘에리얼은 완벽한 악역이라 처음부터 안 좋아했고.’
당연히 소설 이야기다! 멀리서 음료를 들고 헐레벌떡 뛰어오는 내 동생 리얼이 말고.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태자님을 뵙습니다.”
“네가 아르덴타인의 차기 가주 에리얼인가? 만나서 반갑군.”
“네.”
에리얼은 황태자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 나와 황태자 사이를 막아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리엘도 손을 꼭 잡으면서 나를 뒤로 숨기려고 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했으나 곧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도 황태자가 나한테 반할지도 모른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나 보네. 전혀 그럴 일 없는데.’
나를 과보호하는 쌍둥이를 보고 있으니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웃음이 났다.
여주인공은 대체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소설은 언제나 주인공 시점이기 때문에 자신의 외모 표현을 잘 안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