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1화 (11/123)

-11-

하지만 나는 주인공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기에 잘 알았다.

‘좀 귀여운 편이지만 황태자가 반할 정도는 아닌데.’

전생보단 훨씬 예뻤다! 나도 아르덴타인의 피를 이어서인지 그들의 화려한 색은 물려받지 못했으나 이목구비는 또렷했다. 그래도 아리엘과 에리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이쪽이 쌍둥이 동생 아리엘 영애고?”

“네.”

어쩜 쌍둥이끼리 단호한 것도 똑같은지.

평소의 순박한 모습은 사라지고 공작과 꼭 닮은 차가운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들의 단답에도 황태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대가 세르니아 영애지?”

“네. 반갑습니다.”

별로 반갑진 않았으나 단호박 쌍둥이에 이어 나까지 단답을 할 순 없었기에 예의상 뒷말을 붙였다. 그는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세르니아 영애 나와 한 곡 추겠나?”

“네? 저랑요?”

춤을 신청하는 황태자의 눈은 나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내 뒤에서 날카롭게 반응하는 쌍둥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따분한 황궁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는 헬리오스는 흥미로운 일이나 재밌어 보이는 사건을 좋아했었던 것 같은…….’

여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아카데미 첫째 날 일어난 사건과 정령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였던 거 같다. 아무리 원작 내용을 수첩에 적어 놓고, 살아가면서 틈틈이 내용을 떠올리긴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세세한 부분은 흐릿해졌다. 더군다나 소설의 첫 부분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누님은 이번에 저와 추기로 했습니다.”

“음, 나는 너에게 물은 것이 아닌데.”

오. 황태자 포스 장난 아닌데. 웃으면서 말했으나 눈빛으로 에리얼을 눌렀다. 에리얼이 발끈하려고 해서 내가 막아섰다. 여기선 어떻게 반응하든 흥미로운 얼굴을 한 황태자에게 관찰당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에리얼의 말대로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한 약속이라 하늘 같은 황태자님의 권유에도 무를 수 없네요. 마음이 바다만큼 넓으신 황태자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권력으로 찍어 누르지 마라.’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며 양해를 구했다. 번지르르하게 포장을 했지만 이것도 이해 안 해주면 좀생이라는 뜻. 나는 악의 없는 미소를 띠고 에리얼의 손을 잡았다. 괜히 엮이면 이쪽이 손해!

“누님 괜찮으십니까?”

“응. 나는 괜찮지. 남은 아리엘이 걱정인데.”

“아리엘이라면 걱정 마세요. 알아서 잘하겠죠.”

너희 너무 현실 친남매 관계 아니야? 뭐 친남매 맞으니까 태클은 아니지만.

황태자를 피해서 춤추러 나왔는데 잊고 있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서브남주 그렌드윈! 그의 상대는 황태자와 첫 춤을 춘 소녀였다.

‘아! 이제야 생각났다. 그렌드윈의 여동생이며 나중에 데이지의 절친이 되는 포지션!’

화사한 금발에 청초한 스카이 블루 눈동자를 가진 벨라 카일렌. 그녀도 헬리오스를 짝사랑했으나 데이지를 위해 그를 포기하고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남매끼리 짝사랑하고 차이는 것도 똑같냐며 독자들이 동정하면서도 데이지의 위기에 자주 등장해서 데이지를 도와주어서 인기가 많았었다.

“누님?”

“아, 미안. 예쁜 사람이 있어서 넋 놓고 보고 있었네.”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 라는 눈으로 보는 에리얼을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왜 황태자님을 경계하는 거야? 오늘 처음 봤지?”

주제를 돌리기 위해 황태자 얘기를 꺼냈다. 궁금하기도 했고. 나야 황태자와 엮여서 좋을 게 하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경계하는 거지만 아리엘과 에리얼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해 가지 않았다.

“그야 누님이 예전부터 황태자님이 싫다고 하셨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 좀 이상하지 않을까? 하고 둘러 말했었는데.

“황궁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라서 오만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배려 없고 가면을 뒤집어써서 속내를 내비치지 않을 음흉한 사람일 거라고…….”

꾹.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에리얼의 발을 밟았다.

“아, 미안. 실수.”

하하. 그만 말하라는 내 눈빛을 읽었는지 에리얼은 입을 다물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소리에 가려졌기를 바라며 주위를 훑어봤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멀리서 황태자가 이쪽을 보면서 웃는 건 기분 탓이겠지?

‘거리도 멀고, 음악 소리에 못 들었을 거야.’

그래. 사실 딱 저렇게 말했었다. 아리엘이 혹시라도 황태자에게 반할까 봐 황태자에 관한 주제가 나오면 세뇌하듯이. 이거 전부 나 때문이었네.

“에리얼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막 하면 안 된다. 알았지?”

“알겠습니다.”

커다랗게 턴 한 뒤 에리얼에게 바짝 붙어서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에리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어디서 말할 일도 없겠지. 저거 소문나면 공작가는 황태자한테 찍힐 거야.

음악이 끝났다. 짧은 시간 동안 내 체력이 쓰레기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겨우 세 곡 췄다고 에리얼의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다리가 후들거리다니! 휴,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벽에 기댔다.

‘쉬고 싶다.’

보통 테라스로 가서 쉬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오늘은 테라스가 핫했다. 모두 커튼으로 가려진 걸 보니 사람 있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도 파티는 처음이고, 사교계는 글로 배웠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공작은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바빠 보였고, 나와 춤을 춘 에리얼은 황태자의 주위를 돌리기 위해 그와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아리엘을 찾기 위해 넓은 파티장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아리엘 영애를 찾는 건가요?”

“네. 보셨나요?”

“아까 후원으로 나가는 것 같았어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병아리 같은 소녀였다.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후원으로 나섰다. 나온 김에 아리엘이랑 쉬다 가면 되겠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처음 보는 인상착의였는데, 소설엔 안 나왔던 사람인가.’

새삼 내가 환생한 곳이 소설로만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란 걸 느꼈다.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엄연히 이름이 있었고 그들의 삶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지 않았던 나라도 존재하고 수많은 학문과 전설이 있었다.

‘지구랑 똑같네.’

똑같았다. 왠지 소설이 어쩌고 하면서 끌려다닌 내가 바보 같았다. 내가 너무 원작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부스럭.

아리엘인가? 상념에 젖어 있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났다. 휘영청 한 달을 품고 있는 연못 옆에 있는 나무 뒤쪽이었다. 달빛은 밝았으나 나무 뒤쪽은 그림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

이름을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아리엘이 아닌가? 나는 다가갈지 말지 망설였다. 제자리에서. 그때 작은 구두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인기척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누군가 있는 힘껏 날 밀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던 나는 강한 힘에 그대로 균형을 잃었다. 넘어지면서도 필사적으로 몸을 틀려고 했다. 누가 날 밀었지?

‘아. 망했다.’

생각은 짧았다. 날 민 사람은 도망가고 있었다. 흐릿한 인영은 사라지고 내 시야는 푸름에 잠겼다. 환한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연못의 물은 차가웠다.

‘이번 생도 물에 빠져 죽는 건가.’

일렁이는 물속에서 저항 한번 하지 않고 가라앉았다. 물에 젖은 드레스가 너무 무거워서 수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기에. 그런데 내 팔을 잡는 강한 손길이 느껴졌다. 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나를 끌어당기는 힘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푸하!”

우악스럽게 날 잡아당기는 손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숨이 쉬어지고 발이 바닥에 닿았다! 똑바로 일어서니 연못의 물은 겨우 내 허리까지 왔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목욕탕보다 얕네.

“고맙습…… 니다?”

“…….”

나를 일으켜준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의외의 남자가 있었다. 달빛조차 삼켜버린 새카만 흑발에 블랙홀 같은 검은 눈동자.

‘시리우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지막 서브 남주.

만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라 놀라서 말끝을 약간 흐렸다가 끝까지 내뱉었다.

그는 붙잡고 있던 내 팔을 놓으며 연못 위로 올라갔다. 나는 물에 젖어 시야를 가리고 있던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시리우스를 따라 연못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어라?’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올라가려 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물먹은 드레스의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원작의 인물과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시리우스를 불러 세우려고 했다.

“저기요!”

다만 시리우스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점점 멀어져 가는 시리우스의 등을 보자 다급하게 불렀다.

“이왕 살려줄 거면 끝까지 살려주세요!”

그제야 걸음을 멈춘 시리우스는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봤다.

“내가 너를 살렸다고?”

“네. 그쪽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물에 빠져 죽었겠죠.”

“빠져 죽을 깊이가 아닐 텐데.”

휴, 순간 뼈 부러지는 줄.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변명했다.

“드레스가 무거워서 균형을 잃었거든요. 잡아주시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거예요.”

아무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얼굴. 그러고 보니 시리우스가 왜 날 도왔지? 세상이 멸망해도 관심 없을 성격인데.

시리우스는 비운의 황자였다. 황후와 황비는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다. 황후는 그 사실이 못내 불안했다. 자신의 아들이 첫째가 아닐까 봐. 사람을 시켜 황비에게 저주를 걸었다. 그로 인해 황비는 출산일보다 2주 정도 늦게 출산하게 됐고, 몸에 무리가 가서 시리우스를 낳고 죽었다.

‘시리우스가 받은 저주도 원래는 황비가 받은 저주였지.’

황후는 브릴리언 왕국의 공주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사랑은 없었다. 권력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기에. 그녀의 목표는 오직 황태자를 낳는 것뿐이었다. 황비는 빼어난 외모로 황제의 사랑을 받았으나 힘없는 사랑은 독이었다.

‘황후의 권력욕은 너무 심했어.’

황후가 황비에게 건 저주는 탯줄로 연결된 시리우스에게 이어졌다. 저주를 받아 태어난 그는 어떠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기쁨, 슬픔, 증오나 원망조차도. 또한 대륙에서 인간에겐 절대 나올 수 없는 검은 색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색이지만 이 세계에선 불길함에 상징이며 저주의 표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