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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과 흑안을 본 황제는 그를 꺼림칙하게 여겨 가까이 가지 않았다.
“내가…… 왜 널 구했지?”
“그걸 저에게 물으셔도.”
나야 모르지. 내가 물어야 하는 상황 아닌가. 내 대답에 시리우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근데 진짜 왜 날 구했지? 시리우스의 성격이라면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도 신경 안 쓸 텐데’
그러나 나는 시리우스에 대한 고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에, 에취!”
진짜 장난 아니게 추웠다. 봄이라지만 태양이 사라진 밤이라 기온이 뚝 떨어졌었다. 물에 쫄딱 젖은 와중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살짝만 스쳐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정도!
시리우스는 연못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도와주는 건가 싶어서 손을 뻗었는데 그는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전히 건조한 눈빛.
“내가 왜 널 도왔을까.”
이젠 의문형도 아니었다. 진짜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만 아니었다면 ‘어쩌라고!’라고 벌써 백번은 외쳤을 것이다. 참자. 내가 을이니까 참아야 해.
시리우스는 헬리오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짐승처럼 자랐다.
황후가 시리우스를 싫어했기에 황궁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가둬놓고 사육하듯이 키웠다. 그러다 시리우스의 존재를 알게 된 헬리오스가 그를 구해서 언어와 예절을 가르쳤다.
‘이 녀석 아직 예절은 덜 배운 거 같은데.’
헬리오스는 자신에게 동생이 있는 것도 몰랐었다. 10살쯤 호기심 왕성하던 그는 황궁을 탐색하다가 시리우스의 궁까지 가게 됐고, 짐승처럼 방치된 시리우스를 보고 충격받는다.
사랑하는 어머니 때문에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동생에게 동정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낀 헬리오스는 황후를 설득한다. 물론 황후에게 동정심을 어필한 것은 아니고, 황후가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쓰니 그 부분을 자극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 아카데미 입학하기 전에 기본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황후는 원래 헬리오스가 알기 전에 시리우스를 죽일 생각이었으나 생각을 바꿨다. 헬리오스가 시리우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을 알아차리고 약점으로 잡은 것이다.
‘모자끼리 속고 속이는 막장이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시리우스의 성장 과정이 아니었다. 추워죽겠다고! 나는 덜덜 떠는 손으로 가까이 다가온 시리우스의 바짓단을 꽉 잡았다.
“도와주세요.”
그냥 좀 끌어당겨 주지. 뭐 그리 힘들다고 답답하게!
내 속마음을 읽은 건지 시리우스는 푹 젖은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너무 쉽게 들어 올려서 여태까지 허우적거린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야. 올라왔으면 됐지.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
시리우스는 내 감사 인사에도 대답이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은 나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왠지 계속 보고 있으면 블랙홀에 빠진 별처럼 흔적도 없이 삼켜질 것 같았기에.
‘정말 물에 젖은 드레스는 최악이야.’
민물 비린내 나는 거 같은데. 나는 한숨을 쉬며 무거운 드레스를 쥐어짰다.
이 꼴로 파티장으로 돌아가는 것은 포기했으나 적어도 마차를 타려면 최대한 물기를 짜야 했다.
“에취!”
감기 걸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코를 훌쩍이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고요한 후원에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잠깐. 왜 이렇게 조용하지?’
시리우스가 돌아갔다면 발소리라도 들렸을 텐데. 나는 드레스를 짜던 손을 멈추고 살짝 뒤로 돌았다. 고개를 돌리자 시리우스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 있었다.
‘소, 소름.’
아까는 도와달라는 소리에도 매정하게 돌아가더니 이제 와서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너를 구했으니.”
가만히 서있던 시리우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뭔데. 나는 시리우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내가 알던, 아니 소설에 나왔던 ‘서브 남주인공 시리우스’와는 너무나 달라서.
“내게 빚졌군.”
“네? 빚이요?”
“그래. 설마 입 싹 닦을 생각이었나?”
굳이 빚이라고 표현해야 해? 은혜를 입었다는 말도 있고, 다른 표현도 많은데 하필 빚이라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제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보답은 드리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걸로.”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아니, 것보다 이 녀석이 정말 시리우스라고? 외형은 아무리 봐도 시리우스가 맞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소설 속에 등장한 시리우스는 저주를 받아서 감정을 못 느낄 뿐 정상인처럼은 보였다.
‘심지어 소설에서 유일한 존댓말 남이었다고!’
좋음과 싫음도 구분 못 하고 데이지에게 끌리면서도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순수함과 모성애를 자극하던 서브 남주.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시리우스는 사채업자처럼 순식간에 빚을 만들며 반말이나 툭툭 던지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에요?”
나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를 못 느꼈기에.
그때였다. 시리우스는 갑자기 황궁을 바라봤고,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입니다!”
어두운 후원에 먼저 등장한 사람은 황궁 기사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다른 사람을 불렀다. 기사의 목소리에 황급히 달려온 사람은 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세르니아!”
“언니!”
“누님!”
언제나 냉철한 공작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일그러진 것은 처음이었다.
“삼촌! 얘들아!”
“연못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건가?”
“네. 시, 이분이 구해주셨어요.”
생각해보니 아직 시리우스와 통성명도 안 했었다. 순간 그의 이름을 말하려던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꿨다. 다행히 다들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어쨌든 시리우스가 구해준 건 맞으니까.’
나는 시리우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소란스러워졌음에도 시선은 오직 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시리우스 황자님을 뵙습니다. 세르니아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황궁으로 정식 인사를 드리러 오겠습니다.”
“…….”
공작은 그가 2황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겠지만 검은색이라는 특징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시리우스뿐이었으니 당연했다. 시리우스는 공작의 인사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공작의 압도적인 분위기에도 물러서는 기색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역시 저 녀석 예절 덜 배웠네. 마음속으로 시리우스의 태도에 태클을 걸고 있는 사이 공작이 나를 불렀다.
“세르니아.”
그리고 그대로 나를 안아 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몸이 공작의 품에 안겼다. 공주님 안기랑은 좀 다른……. 그래 예전에 친구가 키우던 강아지를 안을 때의 포즈였다.
“공, 아니 삼촌. 저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
“됐다.”
“아니. 드레스가 젖어서 삼촌 옷도…….”
“상관없다.”
공작은 내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르덴타인이 아니라 단호박 가문으로 고쳐도 되겠는데. 나는 공작의 고집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얌전히 포기했다.
공작이 안고 가자 양쪽에 착 달라붙은 쌍둥이가 10초에 3번씩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왔다.
“정말 괜찮다니까. 황실 기사단까지 올 정도의 일은 아니었는데.”
“그건 카나린 영애가.”
“맞아. 하얗게 질려서 기사단을 붙잡고 횡설수설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카나린 영애?”
오. 촉이 오는데. 걘가? 노란 드레스 입고 아리엘이 후원에 있다고 했던 소녀.
“네. 제가 파티장에서 언니를 찾고 있었는데 카나린 영애가 기사 한 명을 붙잡고 누가 연못에 빠졌는데 수영을 못하는 거 같다고 빨리 와달라는 걸 들었어요.”
“그 소란에 나랑 아리엘이 설마 싶어서 인상착의를 물었더니 당황하면서.”
“엄청 당황하던데…….”
아리엘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음, 왠지 아리엘도 내가 추측하는 사람을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범인이 누구인지 보다 내 걱정하며 파티장을 열심히 뒤졌을 쌍둥이가 더 중요했기에 그들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랬구나. 고마워. 나 찾는다고 고생 많이 했지?”
“그래.”
쌍둥이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올려다본 공작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아까 본 것이 환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소와 같았다.
“왜 그러지.”
“아니요. 죄송합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공작이 내려다보며 물었으나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삼켰다.
‘내가 다쳤을까 봐 걱정했어요? 하고 절대 물어볼 수 없지.’
***
그 날은 특이한 날이었다.
외부에 어떤 일이 있어도 무심하던 시리우스는 그날따라 유독 환하게 빛나는 황궁이 신경 쓰였다. 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이한 느낌에 끌려 황궁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고 싶진 않았다. 최근에 형이라며 나타난 헬리오스도 자신을 혐오하는 황후도 그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주.’
그놈의 저주. 시리우스는 보통 사람과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그러나 단 한 번도 저주를 원망한 적 없었다. 아니 원망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에겐 세상이 공허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듯 지켜주는 마력조차도.
“아리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여태껏 그가 들은 여자 목소리는 경멸을 담은 시녀들과 황후뿐이었다. 그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어딘가 부드럽고 달콤한 느낌이 드는 미성이었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시리우스는 나무 뒤에 서 있었다. 말이 서 있는 거지 마음먹고 그림자에 숨으면 헬리오스조차 자신을 찾지 못한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소녀가 단번에 자신을 찾았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 같지만.
그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가올지 말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런 소녀의 뒤로 다가오는 또 다른 소녀가 있었다.
시리우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말려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생각과 다르게 몸은 어느새 연못에 들어가고 있었다.
‘연못은 얕을 텐데.’
사실 그냥 돌아가려고 했던 것도 연못이 얕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계속 허우적거리며 일어서지 못하는 소녀를 보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푸하!”
소녀의 팔을 잡고 끌어 올리자 진보라색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소녀가 떠올랐다.
“고맙습…… 니다?”
“…….”
시리우스는 소녀가 자신의 외형에 겁먹고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