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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많은 사람을 보지 못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반응이었기에. 그는 눈앞에 있는 소녀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저기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않았다. 헬리오스의 말에 의하면 귀족은 대부분 귀찮은 존재라고 하니 괜히 엮여서 좋을 것 없었다.
“이왕 살려줄 거면 끝까지 살려주세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우뚝 섰다. 그는 덜덜 떨고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자신이 누군가를 구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구해줬다고?’
왜 그녀를 구했을까. 알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이 그녀를 어떤 눈으로 쳐다보는지조차 모르는 시리우스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모르면 물어보기로.
“내가…… 왜 널 구했지?”
“그걸 저에게 물으셔도.”
소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는 헬리오스와는 다른 반응. 시리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걸린 저주 때문에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을.
‘그런데 왜 구했을까.’
시리우스는 인정해야 했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겠으나 그녀를 보고 무언가 느꼈음을. 마치 황궁 불빛이 신경 쓰여서 이곳까지 걸어온 것처럼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상념을 깨는 목소리. 아직 연못에서 못 나오고 있는 소녀는 자신의 바짓단을 붙잡으며 애달픈 눈빛을 보냈다. 또 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인식도 하기 전에 연못에 있는 소녀들 들어 올렸다. 너무 가벼워서 놀랐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왜 소녀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감사합니다.”
“…….”
그녀의 어떤 점에 끌리는 걸까.
시리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눈빛을 무시하고 드레스를 짜고 있는 소녀에게 온 신경이 쏠렸다.
“에취!”
물에 나왔음에도 추위에 떨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겉옷을 벗어 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드레스를 보던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에게 향했다.
시리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달빛을 받아 고요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에 끌렸다. 그리고 저 눈빛이 자신에게 향하길 바랐다. 이유는 몰랐다. 아니 그에겐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
2. 플래그는 돌발적으로
황태자의 탄신연회가 무사히 지나가고 우리는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작은 해프닝이 있었지만.
황태자 생일 연회 때 나를 민 범인은 뻔하게도 카나린이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 쉽게 유추할 수 있었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의외였던 건 그녀가 직접 공작가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죄송해요. 세르니아 영애가 부러워서 그랬어요.”
“제가 부러웠다고요?”
어떠한 의도가 담기지 않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나는 아르덴타인 공작가의 사촌일 뿐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부러워할 수도 있으나 가문을 이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직계도 아니었기에 가문끼리 화합을 바라는 다른 가문과 결혼하기도 애매했다.
‘보통은 직계와 결혼하니까.’
그렇다고 공작에게 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르덴타인과 결합은 바라는 가문들은 대부분 아리엘을 원한다. 대체 내게 부러워할 만한 점이 뭐가 있을까.
“당신은 제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조금 골려주려고 했었어요. 세르니아 영애가 수영을 못할 거라고는, 사실 수영할 정도로 깊은 곳도 아니라 금방 일어설 거라 생각했었는데…….”
얘도 뼈 때리네. 새롭게 추가된 내 흑역사, ‘허리밖에 안 오는 얕은 연못에 빠져서 못 일어섬.’을 굳이 언급하다니.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물에 약해서요.”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그땐 어떻게 됐나 봐요. 저는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세르니아 영애가 너무 부러웠어요. 그날도 아버님께 혼난 뒤라…… 무섭다는 공작님의 발을 밟고도 웃을 수 있는 세르니아 영애를 보고 있으니…….”
그, 그거 봤니? 아무도 모르길 바랐으나 이 정도면 내 춤 실력이 사교계에 소문났으리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공작의 발을 밟고도 무사한 내가 부럽다니.
“저는 도구에요. 가문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줄 도구.”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수첩에 카나린 영애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녀는 무려 아리엘의 오른팔이었다!
‘예전에는 기억력 엄청 좋았나 보네. 악역 조연의 이름까지 적어 놨다니.’
수첩에는 ‘카나린: 질투심이 많고, 출세욕이 많다. 아리엘에게 아부를 떨며 바람잡이 역할을 잘함.’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버님은 저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에게 들어가는 돈을 아까워하고, 낭비라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실수를 해도 웃을 수 있는 세르니아 영애가 부러웠어요. 그들이 진심으로 영애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보였어요. 나는, 나는 친딸인데도…….”
카나린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꼭 안아줬다.
어쩌면 소설에 등장했던 카나린은 그런 가족의 욕구를 그대로 받고 자란 인물이 아니었을까. 스스로의 가치를 가족에게서 찾는 아이.
처음에는 아무리 질투심이라지만 연못에 민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만약 수심이 깊었으면 정말 죽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더 심한 짓 하는 애들도 많았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교폭력은 어디에나 있었다. 선생님들 몰래, 때로는 선생님의 외면 속에서. 직접적인 무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피해자에겐 잔인하고도 참혹했다. ‘재미’로 그런 일을 하는 아이들보단 훨씬 나았다.
‘카나린이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고, 공작가에 직접 사과하러 온 용기를 높게 쳐서 용서할 거지만.’
고작 15살이었다. 충분히 실수할 수 있는 나이고 부모님에게 사랑을 갈구할 나이였다. 카나린에게서 쌍둥이의 모습이 보였기에 마음이 더 약해졌다.
‘휴, 그래. 스스로 반성하고 있으니 괜찮겠지.’
나는 카나린이 진정 될 때까지 등을 토닥여줬다. 그녀가 느꼈을 상처가 전해졌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
“언니 저는 아직 안 풀렸어요.”
“나는 괜찮은데. 사과도 받았고.”
“사과한다고 다 용서되는 게 아니잖아요!”
‘다행이야. 아리엘이 일치기 전에 카나린 영애가 자수하러 와서.’
그날 아리엘은 범인을 눈치채고 혼자서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 아마 나를 위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평화롭게 일이 정리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도 편지 왔는걸.”
“답장하지 마요.”
하하. 나는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카나린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부쩍 친해진 상황이었다. 아리엘도 카나린이랑 친해졌으면 하는데. 그건 과한 참견일까.
“언니 또 웃어넘기려 하지 마요.”
“안 통하네.”
이미 답장 보냈는데. 나는 주제 돌리기 스킬을 사용했다. 오늘 카나린의 편지와 같이 도착한 아카데미 입학서로.
“아카데미 입학서가 왔다며. 벌써 내년이구나.”
평민이나 입학서를 받지 못한 귀족들은 입학시험을 치기도 하지만 고위 귀족들은 특별한 시험 없이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서는 입학식 날짜와 준비물 등을 알려주는 안내 책자 같은 역할을 했다.
“시간이 너무 빨라요. 언니도 같이 입학하면 좋을 텐데.”
아리엘의 표정이 단번에 시무룩해졌다. 이미 카나린에 관한 것은 잊었는지 아카데미에 가기 싫다며 중얼거렸다. 아카데미라.
‘음, 데이지를 실제로 보고 싶지만 불가능하겠지.’
다시 말하지만 ‘신유신’의 최애는 데이지였다. 차애가 그렌드윈이었고. 현재는 아리엘과 에리얼이 제일 소중했으나 그것과 별개로 데이지에 대한 애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팬심이랄까.
아카데미는 다양한 학문을 쌓기 위해 입학하는 곳이지만 필수는 아니었다. 당연히 공작도 내게 물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냐고.
‘대답은 NO.’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한창 원작 흐름에 집착하고 있을 때라 끼어들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다.
‘그리고 쌍둥이랑 같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고 싶어.’
아카데미는 2년제였다. 교육기관치고는 짧은 편이었다. 다만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2년 동안 쌍둥이를 자주 못 보고, 쌍둥이는 내가 졸업하면 입학했기에 거의 4년 동안 못 봤을 것이다.
‘내가 아카데미를 포기하면 2년만 참으면 되니까.’
절대 학교 가기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아리엘이나 에리얼이 결혼하면 더 보기 힘들어지니 볼 수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괜찮아. 방학 때 만날 수 있잖아.”
“그렇지만, 역시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아리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리광쟁이지만 아리엘도 느끼겠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조만간 황궁에 방문할 것 같다던데 언니도 따라가실 건가요?”
이번엔 아리엘이 주제를 돌렸다. 그녀도 성인식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아, 맞아. 잊고 있었네.”
나는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깜빡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고.
‘정식 인사는 뭐가 다른가? 주스라도 사 들고 가서 그날 감사했습니다.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모르겠으나 도움받은 사람이 나니까, 나는 필수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저도 따라가도 돼요?”
“글쎄. 공작님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일개 사촌인걸. 아무 권력도 힘도 없는 더부살이 가족이었다. 공작가 권력의 정점은 공작님! 내가 따라오라 해도 공작님이 기각하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음, 언니가 말해주시면 안 돼요? 아버지는 언니에게 약하잖아요.”
“공작님이 나한테 약하다고? 전혀 아닌 거 같은데.”
문득 황급히 뛰어오던 공작의 표정을 떠올렸으나 너무나도 순식간에 사라져서 헛것이었나 의심이 들 정도다.
“에이. 언니가 하는 부탁은 다 들어주시잖아요. 에스코트도 해주셨고,”
“아리엘…….”
“아니에요. 언니가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아리엘은 양손으로 엑스를 그리며 격하게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내가 한층 더 아련한 눈빛으로 보자 그녀는 ‘정말로 언니가 부럽다거나, 나도 아버지의 에스코트가 받고 싶었다거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라고 외치더니 방에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