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4화 (1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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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제 아리엘도 사춘기가 올 나이니까 민감한 부분은 내가 먼저 조심해야지.’

내 전공은 유아교육이지만 필수로 들은 교직 수업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재밌게 읽은 로맨스 소설 내용도 가물가물한데, 벼락치기 한 교육학개론이 생각날 리가 없지.’

사춘기의 청소년은 예민한 법!

자아가 형성하는 시기에는 자기에게 집중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해주자.

‘그래도 한편으론 뿌듯하네.’

마냥 어리기만 했던 쌍둥이는 서서히 나는 법을 터득해서 곧 둥지를 떠날 것이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눈부시게 성장하겠지. 그게 아쉬웠다. 끝까지 지켜볼 수 없는 것이.

나는 아리엘의 빈자리를 보며 식어버린 블랙티를 홀짝였다.

“아가씨, 공작님이 찾으십니다.”

“나를?”

혼자서 궁상떨고 있는데 데인이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공작의 호출에 나는 오랜만에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1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풍경이었다. 책상에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는 공작까지도.

“점심 식사는 하셨어요?”

“간단하게 먹었다. 앉아라.”

“네.”

예전에는 앉으라는 말도 없었는데. 많이 변했구나. 세월의 흐름을 겉모습이 아닌 태도에서 느끼는 게 좀 웃기지만.

“내일 황궁에 간다.”

주어도 목적어도 잘라먹은 문장이었다. 의문형도 명령도 아닌 통보. 대충 ‘나는 내일 황궁에 갈 건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나는 익숙해진 공작의 화법에 능숙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도 되나요?”

“마음대로.”

허락이 떨어졌다. 음, 아리엘도 같이 가고 싶다고 했는데 물어볼까? 나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타이밍을 쟀다.

“더 할 말이라도 있나?”

공작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때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는데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런데 정식으로 하는 감사 인사는 뭐가 다른가요?”

아차. 이게 아닌데. 궁금하긴 했으나 나중에 데인에게 살짝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왜 그런 경우 있지 않은가. A를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 상대방과 대화의 흐름에 따라 ‘B를 물어야지.’라고 머리로는 인지했으면서 입 밖으론 A를 내뱉는 순간이!

“감사하다는 마음을 담아 물질적으로 보상하지.”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물질적이요? 뭔가 물질이 섞이면 순순한 감사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공작은 뒤이어 말했다.

“더군다나 너는 목숨을 구해줬다고 했으니 너의 목숨값에 달하는 것을 지불해야겠지.”

목숨값이요? 갑자기 스케일이 커졌는데요.

나는 대체 내 목숨값을 어떻게 매겨야 할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공작을 바라봤다.

“입 닫아라. 먼지 들어간다.”

“아, 네.”

입도 열고 있었나 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휩싸였다.

‘왠지 1억 2천 전부 현금으로 지불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안 돼. 추억의 만화를 떠올려버렸다! 나는 그 대사를 애써 지워버렸다.

“걱정 마라. 알아서 준비할 테니.”

“혹시 시리우스 황자님에게 드리는 거면 제가 직접 준비해도 되나요?”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가 뭐 실수했나? 미묘한 반응이었다. 눈썹은 탐탁지 않아 보였으나 씰룩이는 입꼬리는 호기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음, 그래. 폐하에게 바칠 것은 내가 준비할 테니 황자님에게 드릴 것은 네가 준비하거라.”

황제한테도 줘야 해? 걔가 뭐 했다고. 마음에 안 들었으나 내가 의견을 낼 입장이 아니라 그냥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리엘도 같이 가도 될까요?”

“그럼 에리얼도 따라가겠군. 안 된다고 해도 말 들을 녀석들도 아니고.”

아니요. 잘 들을걸요. 나는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아리엘이 가면 에리얼도 따라갈 거라 예상했기에.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공작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문을 닫고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엘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임무 완수였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이동했다. 시리우스에게 줄 선물을 이미 정했으나 어디에 놔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찾아야 했다.

“안 버리길 잘했네.”

맥시멀리스트로서 잡동사니 하나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습관이 여기서 빛을 발하는구나! 내방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서랍부터 뒤졌다. 분명 어디 구석에 박아 뒀는데. 어디에 있지?

한참을 뒤적여도 나오지 않아서 결국 방 청소 담당 하녀에게 물어봤다.

“아, 그거라면 제가 여기에 넣어뒀어요!”

하녀는 화장대 위에 있는 작은 보석함을 뒤지더니 내가 찾던 물건을 꺼내서 나에게 건넸다. 신기한데. 나도 아까 거기 뒤졌었는데. 왜 못 봤지.

마치 내 방에 있는 물건 없어졌다고 엄마에게 신경질 냈는데 엄마가 단번에 찾으면서 ‘여기 있네!’ 하고 등짝 스매싱 날렸을 상황이었다.

“고마워!”

내가 몰래 먹으려고 아껴 뒀던 초콜릿을 쥐여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초콜릿을 받은 하녀는 별일 아니니 필요하면 또 부르라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갔다.

‘시리우스의 저주에 이게 도움 될 거야.’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맨 것은 바로 정령석이었다. 오백원짜리 동전 크기쯤 되는 정령석에는 푸른 바다를 담은 것처럼 일렁거렸다.

‘물의 정령력.’

정령력이란 말 그대로 정령의 힘이었다. 마력과 차이를 설명하자면, 마력은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로서 인간의 몸에 쌓을 수 있고 마력 친화력이 높을수록 육체에 쌓을 수 있는 마력이 많아진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마력 친화력이 높은 사람이다.

그에 비해 정령사는 자연 친화력이 높아야 한다. 자연 친화력이 높을수록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이 강한데, 정령사는 어디까지나 계약에 의해 정령의 힘을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정령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정령석 안에 있는 정령력은 정령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그 수가 매우 적어서 마력석 보다 희귀하다.

이 희귀한 정령석은 공작의 생일선물로 받은 거였는데 내가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자 갖고 싶으면 가지라면서 줬었다.

‘진짜 바다가 담긴 것처럼 물결이 보이길래 신기해서 쳐다본 거였는데.’

데이지의 눈동자도 바다를 닮은 푸른색이라고 서술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 가끔 그녀를 얼굴을 상상하며 꺼내보곤 했었다. 정령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데이지는 정령에게 사랑받았고 그녀의 주위에는 늘 정령으로 넘쳤었다.

‘시리우스의 저주도 데이지의 정령 친구인 엘리사가 알려줬었지.’

시리우스의 저주는 독특하게도 마법으로 인한 계약이 아니라 정령으로 인해 계약됐다. 어떤 저주인지 해주 방법은 뭔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고, 엘리사가 수박 겉핥듯이 언급하고 지나갔었다.

일반적으로 저주 대상이 죽으면 계약이 무효로 돌아가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은 부작용으로 주술자의 대가까지 떠맡은 것 같다고.

감정이 없고, 세상만사에 무관심한 시리우스가 데이지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령으로 인한 저주였기에 순수한 정령이 많이 모인 곳에선 저주가 약해졌다.

시리우스의 저주의 증표는 검은색. 나야 한국에서 지겹게 본 색이었기에 거부감이 없었으나 이 세계 사람들은 유독 검은색을 싫어했다. 평범한 인간에겐 나올 수 없는 색이니 꺼림칙해 하는 것도 이해한다.

어쨌든 시리우스는 데이지에게 끌리며 자신의 감정을 점점 배워간다. 데이지와 친해진 시리우스가 사랑이 뭔지 모르겠으나 키스를 하면 알 수 있을 거 같다며 막무가내로 데이지에게 키스하는 장면도 나온다.

‘서브남주와 키스라서 댓글창이 폭발했었지. 나도 강제로 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그렌드윈도 손만 잡았는데!!! 하고 댓글 달았는데.’

느낌표에 분노를 담았었다. 차라리 그렌드윈이었으면 참았을 텐데. 나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생각해보면 작가님이 헬리오스의 감정을 깨닫는 기폭제 역할을 위해 강수를 두신 거겠지. 헬리오스 질투 유발제!

‘결국 그 키스 이후에 시리우스의 저주는 반 정도 풀린다.’

검은색이던 눈동자가 분홍색으로 변한다고. 아마 감정을 깨달으면 저주가 풀리고 원래 색이 나타나는 원리가 아닐까.

사실 나도 유모 사건 이후로 저주에 대해 조사했었다. 만약에라도 아리엘이 저주를 걸거나 걸렸을 때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

‘저주 관련 에피소드는 아리엘이랑 시리우스밖에 없었으니까.’

저주란 공작의 설명대로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마법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 존재했다.

‘대가만 지불한다면 마력이 없는 사람도 쉽게 저주를 할 수 있어.’

저주의 대가는 공평했다. 목소리를 잃게 만들려면 주술자의 목소리를 지불해야 했고, 시력을 잃게 만들려면 주술자의 시력을 지불하면 됐다. 그랬기에 아리엘은 데이지의 영혼을 앗는 저주를 걸었다. 자신의 영혼을 지불해서.

따라서 마력이 없는 일반인도 대가를 지불하면 저주라는 마법이 성립되는 것이다. 시리우스의 경우 대가를 정령을 통해 지불했고, 그로 인해 저주가 정령력 이루어져서 보통 저주보다 해주가 어렵다고 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해주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고, 나는 원작까지 읽고 왔기에 시리우스가 감정을 느끼면 해주가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뭐 알고 있다고 해도, 내가 풀어줄 순 없지만.’

해주는 데이지의 몫이었다. 정령과 1도 연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임시방편으로 정령석을 선물하는 것뿐이었다.

‘거기다 저주를 건 정령은 타락했거나 소멸했을 거라고 했지. 어휴, 황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령을 이용해서 저주 걸 발상을 한 거야?’

생각해보면 황후가 제일 나빴다. 아리엘과 에리얼이 주인공들을 막아서고 시련을 주는 메인 악역이라면 황후는 뒤에서 조종하는 흑막 느낌!

아리엘에게 저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도 황후였다. 신분 낮은 데이지가 황태자의 곁에 있는 것이 거슬렸는지 질투에 눈이 먼 아리엘을 꾀어서 저주를 걸도록 유도한다.

‘황비에게도 비슷한 방법으로 저주를 걸었겠지.’

결론적으로 아리엘과 눈엣가시로 여기던 시리우스가 죽고, 에리얼이 반란을 일으켜 아르덴타인마저 멸문하면서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황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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