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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이라 주인공의 사랑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시련을 극복해나가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제국의 내란으로 하나뿐인 공작가와 황제파의 중심이었던 카일렌 가문이 같이 사라져서 제국이 약해지니 브릴리언 왕국이 간섭하기 쉬워진다.
‘마지막 편에선 황후 이야기는 쏙 빼놓고, 반란을 진압한 헬리오스와 데이지가 슬픔을 딛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났지만.’
완결 이후의 세상은 아무도 모른다. 과연 그들은 끝까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일단 최대한 황후를 피하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했다.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을 위해 인간관계는 최소로, 쌍둥이를 제외한 원작 등장인물은 무조건 피하기로!
하지만 슬프게도 그 다짐은 금방 깨지게 된다.
***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성큼 다가온 여름의 향기가 감돌았다. 우리는 아침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서 마차에 올랐다.
나는 연보라색 엠파이어 드레스에 세트로 맞춘 리본으로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다. 더워서 높게 묶어 목이 시원해서 좋았다.
아리엘은 나랑 같은 드레스를 입을 거라며 연보라색 엠파이어 드레스를 골랐는데, 내가 이왕이면 같은 색보다는 같은 디자인을 다른 색으로 맞추는 것이 더 예쁠 거 같다며 열심히 설득했었다.
‘대세는 시밀러룩이지.’
버건디색 엠파이어 드레스에 양 갈래 머리를 한 아리엘은 평소보다 열 배나 귀여워서 내가 진심을 담아 칭찬하자 그녀도 기분 좋은지 볼을 살짝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벌써 더워졌네요.”
아리엘은 부채를 팔랑이며 마차 창문을 열었다.
“재킷 벗고 싶다.”
에리얼은 답답하게 잠근 단추를 풀며 셔츠를 펄럭거렸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성인이 아니라 약식으로 입었잖아.”
황제를 만나려면 복장도 중요하기 때문에 격식을 갖춰 입어야 했다. 그나마 성인이 아니라서 무거운 페티코트와 코르셋은 빼고 가볍게 입고 왔다. 여름만 되면 유독 면티에 반바지가 그리워졌다.
‘냉방기구 있는 게 어디야.’
다행히도 에어컨은 존재했다! 다만 비싸기 때문에 돈이 많은 가문이 아니면 없는 귀족들도 있다고 한다. 이곳의 에어컨은 마력석으로 가동되는 온도 조절 장치인데 여름에는 에어컨의 역할을, 겨울에는 히터의 역할을 하는 아티팩트였다. 아직 날씨가 크게 덥지 않아 마차에 장착하지 않았으나 더 온도가 올라가면 마차에도 아티팩트를 단다고 한다.
‘마차에도 비싼 아티팩트를 달 재력이라니. 최고다.’
공작은 성인이라서 제복을 입고 망토까지 걸치고 왔다. 그런데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왠지 공작님은 인간이 아니라 해도 믿을 거 같아.’
아리엘과 에리얼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대단하다는 얼굴이었다.
“도착했군.”
공작이 먼저 내려서 손을 뻗자 나는 아리엘을 살짝 밀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파악하더니 얕은 한숨을 쉬며 공작의 손을 잡았다. 나는 뒤이어 에리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황궁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왔다. 며칠 전에 봤던 황궁이었으나 밤과 낮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새하얀 성은 낮에 봤을 때 더 아름다웠다.
길게 펼쳐진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옆으로 바짝 다가온 아리엘이 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작게 속삭였다.
“언니 다시 말하지만 그거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아버지를 부러워했는걸요. 남자라서 언니를 에스코트할 수 있었으니까요. 성별이 뭐라고. 나도 잘할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한 아리엘의 어깨가 침울해 보였다. 나를 부러워했든 공작을 부러워했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외로움을 느낀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말갛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오늘 에스코트는 아리엘에게 맡길게.”
“정말요?”
공작과 시종의 뒤에서 우리끼리 속닥거리면서 걸었다. 서로의 손을 꼬옥 잡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벌써 황제가 있는 집무실에 도착했다. 길 안내를 마친 시종은 노크를 하며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렸고, 이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쌍둥이는 공작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는 푸근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라고 명령했다.
“공작의 자식들이 모두 영특해 보이는군. 제국의 미래가 밝아.”
“감사합니다.”
공작은 황제의 칭찬에도 감흥 없이 대답했다. 공작은 편지에도 미사여구 전부 제외하고 필요한 용건 한 줄만 보내는 스타일이라 예의상 오고 가는 칭찬도 없이 대뜸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오오. 이건 트리스카의 눈물 아닌가! 불의 정령왕 기운이 서려 있다고 전해지는 보물이 공작가에 잠들어 있었군. 그런데 이 귀한 것을 나에게 줘도 괜찮은 건가?”
“네. 제 조카의 생명을 구했으니 그에 맞는 물건을 바쳐야죠.”
공작이 조금 건방져 보이는 것은 기분 탓?
아니 그보다 불의 정령왕 기운이 담겨 있으면 엄청 진귀한 거 아냐? 고작 연못에서 구해준 걸로, 게다가 황제가 구한 것도 아니고 시리우스가 구했는데 저걸 황제 준다고?
나는 배가 아팠으나 내색할 순 없었다.
‘내가 준비한 정령석이랑 너무 비교되는데. 시리우스 선물도 그냥 공작님에게 부탁할 걸 그랬나.’
황제가 감탄하며 상자에서 꺼낸 ‘트리스카의 눈물’은 장인의 손길을 거쳤는지 물방울 모양으로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였다. 당장이라도 불길을 일으킬 것처럼 이글거리는 목걸이는 아리엘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고 배야. 저거 황제 주긴 너무 아까운데.’
한순간에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목걸이. 황제랑은 안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아무리 봐도 교장 선생님상인데. 인자하고 포용력은 있어 보였으나 미남은 아니었다.
‘외가 쪽 피가 강해서 다행이네. 헬리오스도 시리우스도 황제를 안 닮았어.’
헬리오스의 외모는 입 아프게 설명했으니 생략하고, 시리우스도 굉장한 미남이었다. 황제가 황비의 얼굴에 빠졌다고 했던 만큼 그의 외모는 아름다웠다. 헬리오스보단 선이 가늘고 눈이 살짝 처져서 어딘가 아련하고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었다.
‘소설에도 흑발에 흑안을 가진 병약 미소년이라고 말했었지.’
나는 황태자 탄신연회 때 만났던 시리우스를 떠올렸다. 병약이란 단어와 1억 광년이나 거리가 있었는데. 아직도 연못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건조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아니지, 세상에 관심 없는 시리우스가 날 구해준 것만 해도 어디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매정해서 한기마저 돌던 시리우스를 머리에서 지워냈다. 잡생각을 끝내고 황제의 말에 집중하려 했는데 대화는 어느새 막바지였다.
“잠깐 시간 괜찮나? 둘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말입니까? 저희는 시리우스 황자님에게도 인사를 하러 가야 합니다.”
역시나 공작님!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와 상관없이 단호한 마이웨이를 잘 보여주셨다. 그의 거절에도 황제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시리우스라면 아이들끼리 보내면 되지 않은가. 안 그래도 자네를 부르려고 했는데 온 김에 끝내고 가는 것이 공작도 편하지 않나?”
“…….”
오늘 거절하면 또 와야 한다는 말에 공작은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공작님도 집돌이 기질이 있어서 한 번 외출하면 다 해치우고 오는 성격인가 봐.’
또 오기는 많이 귀찮았는지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으나 공작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 상태를 봐서 현재 매우 짜증 났다는 것을!
‘건드리지 말자.’
끄덕. 끄덕.
내 눈빛을 읽은 쌍둥이도 슬며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히 건드리면 불똥 튄다.
“그럼. 저희는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공작을 제외하고 나이가 제일 많은 내가 대표로 말했다. 황제는 산타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삼촌, 많이 짜증 난 거 같던데. 마차 탈 때쯤엔 풀렸으면 좋겠다.”
“그러게요. 아버지 화나 있으면 온도조절기 필요 없이 서늘하잖아요.”
“괜찮아. 아버지가 짜증 나도 나랑 언니에겐 별말 안 하시니까. 너는 연무장 끌려갈지도.”
에리얼의 표정이 굳었다. 종종 교육을 빙자한 대련을 하는데 말이 대련이지 에리얼이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러나 나는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아니야. 리엘아 네가 몰라서 그렇지 공작님 짜증 나시면 가끔 나도 괴롭히신다.’
아이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할 끔찍한 시간! 기분 안 좋은 공작은 가끔 내 방에서 와서 차 한잔하자고 한다. 처음엔 열심히 눈치 보며 기분 풀어 주려고 이것저것 했는데 공작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무서운 침묵의 시간.’
공작은 내 방에서 말없이 차만 홀짝이곤 나갔다. 대체 무슨 의도로 차를 마시러 온 건지 아직도 의문이었다. 말없이 차 마시는 게 뭐가 힘드냐고 생각하겠지만, 기분 안 좋아 보이는 상사가 말 한마디 안 하고 앞에 앉아 있는데 누가 편하겠냐고요!
오직 차 마시는 소리와 찻잔을 놓는 소리만 들린다. 덕분에 찻잔 소리 안 내고 내려놓는 것은 특기가 될 정도.
‘이젠 공작님이 찾아와도 같이 멍때릴 정도로 적응했지.’
포기에 가까운 적응이었다. 휴, 그건 그렇고 황궁 너무 넓은데. 우리는 황궁의 시녀에게 시리우스 궁까지 안내를 받고 있었는데 한참을 걸어도 그의 궁은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지금 오신 만큼 더 걸어가면 됩니다.”
내 쓰레기 같은 체력, 힘줘! 아직 반이나 더 가야 한다고! 나는 겉으론 웃고 있었으나 속으론 울고 있었다. 평소에 산책도 많이 하는데 왜 체력이 안 늘까. 진지하게 에리얼 따라 검술 수련이라도 받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수풀 사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구냐!”
제일 먼저 인기척을 느낀 에리얼이 우리의 앞에 서서 수풀 쪽을 경계하며 외쳤다. 길 안내를 하던 시녀도 깜짝 놀랐는지 나와 아리엘을 꼭 안으며 보호했다.
“도와주세요.”
경계한 것이 무색할 만큼 가녀린 목소리였다. 그에 우리는 긴장을 풀고 수풀 쪽으로 다가갔다.
***
벨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에서 들뜬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오늘 아르덴타인이 온다고 하더군.”
헬리오스가 호기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