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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6화 (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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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오랜 시간을 같이 자란 벨라는 단번에 눈치챘다. 헬리오스가 아르덴타인에게 관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잖아. 나는 그저 친한 동생인걸.’

벨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낯선 황궁이 익숙하지 않아 빠짝 긴장한 채 오빠를 찾아 헤매던 후원에서 그를 만난 그 순간부터. 잊을 수 없었다.

불편한 구두를 신고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었다. 무릎이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고 버려질까 봐 너무 무서웠었다. 지금에야 황궁 지리를 다 알고 있어서 길 잃을 일은 없지만 그땐 너무 어렸었다.

추억에 잠겨 있는 벨라가 표정을 굳히고 아무 대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헬리오스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괜찮아?”

그래. 그때도 이렇게 물었었다. 눈부신 태양 빛을 흠뻑 받으며 나타난 헬리오스는 넘어진 벨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었다. 괜찮냐고.

“네. 괜찮아요.”

어릴 적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줬다는 것에 안심되어 펑펑 울었었지.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자체였다.

“그래? 그럼 아르덴타인 구경 갈까?”

“저번부터 아르덴타인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뭐, 정치적으로 봤을 때 아르덴타인과 친목을 다지면 좋잖아.”

둔한 그렌드윈마저 느낄 정도였다. 헬리오스는 그의 지적에 머쓱한지 어쭙잖은 핑계를 댔다. 그렌드윈은 그의 변명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고집이 센 헬리오스는 마음대로 할 게 뻔했기에 말릴 생각도 없었다.

“그 애들도 다 오겠지?”

“아리엘 영애요?”

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가 나갔다.

아리엘 아르덴타인. 그녀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녀는 벨라조차 입 벌리고 감탄할 정도였다. 헬리오스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이해가 됐다. 황태자의 탄신연회 때 춤을 추던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렸다.

“아니. 그냥 전부.”

헬리오스는 시선을 돌리며 어물쩍 대답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을 숨기려고 저러는 걸까. 그가 아르덴타인 가문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벨라의 기분은 점점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태자님, 지금 아르덴타인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헬리오스의 유모가 시녀에게 전달받은 소식을 알렸다. 헬리오스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집무실로 먼저 가겠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자!”

“우연을 가장하시게요?”

“응. 그게 제일 무난하잖아.”

장난기 넘치는 웃음. 벨라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인데도 자신에게 향하지 않는 웃음을 보고 있으니 속이 안 좋아졌다.

“벨?”

“벨라 안 가?”

헬리오스와 그렌드윈은 여전히 앉아 있는 벨라를 향해 물었다. 그들은 벌써 나갈 준비를 마쳤는지 문 앞에 서 있었다.

“저는…… 속이 좋지 않아서요. 여기 있을게요. 두 분은 갔다 오세요.”

‘가지 마. 나를 혼자 두지 마.’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며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벨라의 속마음을 모르는 두 남자는 금방 갔다 올 테니 쉬고 있으라 말하며 방을 나갔다.

억지로 올라간 입꼬리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벨라의 기분처럼.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바람이라도 쐬자.’

벨라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산책을 나왔다. 하늘은 벨라의 마음과 다르게 너무 맑았다. 푸른 하늘을 보고 있으니 자신의 감정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욕심내지 않기로 했잖아. 헬리오스 님 옆에 있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자.’

언제나 다짐하던 말이었다. 자신의 짝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혼자 삼켜야 하는 감정은 너무 아팠다. 벨라는 후원 깊숙이 들어갔다. 가볍게 시작한 산책이었으나 지금은 울고 싶었다. 혼자 삼켜야 하는 감정을 토해내고 싶었다.

“꺄악!”

오늘따라 높은 굽을 신고 왔기 때문일까, 산책로에서 벗어나 길이 험해졌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르게 걷던 벨라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수풀에 걸려 넘어졌다. 크게 넘어져서 신고 있던 굽은 부러지고, 걸린 수풀에 스타킹이 찢어졌다.

‘내가 질투해서 받은 벌일까?’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긁힌 다리가 아팠고, 혼자 감당해야 할 감정 때문에 가슴이 너무 아팠다. 사실 벨라는 굽 높은 구두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높은 구두를 신고 온 것은 자신보다 키가 큰 아리엘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헬리오스의 관심을 받고 싶었기에.

‘바보 같아.’

정말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았다. 한참 울다가 지친 벨라는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쌓아뒀던 감정을 뱉어냈더니 다시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시리우스 궁과 가까웠다. 어쩐지 관리가 안 돼 있더라니.

그의 궁 근처라는 것을 인지한 벨라는 곤혹스러웠다. 황궁 사람들은 모두 시리우스를 피하기 때문에 그의 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중앙 궁과도 거리가 있어서 혼자 돌아갈 수도 없고. 미간을 찌푸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희미한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 이곳까지 오는 사람이 있었던가?’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는 벨라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기사나 시종이면 좋겠지만 하녀라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상황을 그렌드윈에게 전달해주기만 하면 됐으니.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도와주세요!”

벨라는 열심히 외쳤다. 그러나 아직 거리가 좀 멀었는지 벨라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한 번 더 외치자 수풀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도와주세요.”

자신을 발견했다는 안도감 덕분에 벨라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온 사람들은 의외의 사람들이었다.

‘어째서 이분들이 여기에? 황제 폐하를 만나러 갔을 텐데?’

에리얼과 아리엘, 그리고 세르니아를 찬찬히 보던 벨라는 혹시 헬리오스나 그렌드윈도 같이 있는지 잠시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이 있지 않았다. 아마 길이 엇갈렸으리라.

“괜찮으세요?”

그녀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세르니아였다.

“네. 괜찮습니다.”

“아, 피가…….”

세르니아는 찢어진 스타킹 사이로 쓸린 다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벨라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여서 부끄럽다고 생각했다. 고상한 영애들 사이에서 피는 익숙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드레스로 가리려고 했는데 세르니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피는 별로 안 났지만 2차 감염될 수도 있으니까요.”

2차 감염? 벨라는 세르니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세르니아는 자신의 상처처럼 아파하는 얼굴이었다. 왜지? 벨라는 세르니아의 친절이 이해 가지 않았다.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었고, 오늘 처음 대화하는 상대였기에.

세르니아는 손수건을 꺼내 상처가 난 곳에 묶었다. 하얀 손수건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음, 구두도 부러졌네요. 어쩌지.”

세르니아는 쉬지 않고 벨라의 상태를 살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리해주고, 드레스에 붙은 나뭇잎을 떼 주었다. 그러곤 부러진 구두를 보며 곤란해했다.

“언니. 시녀를 시켜서 벨라 영애가 다친 걸 알리라고 했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기사나 의원이 올 거예요.”

“그래? 다행이네.”

아리엘이 세르니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세르니아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벨라 옆에 성큼 다가와서 앉았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많이 놀랐죠? 아 그러고 보니 소개도 안 했네요. 저는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벨라 카일렌이라고 합니다.”

벨라는 세르니아의 행동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의 인사에 대답했다.

“언니! 적어도 손수건이라도 깔고 앉아요.”

“하지만 나는 손수건 없는걸.”

그녀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반응한 것은 쌍둥이였다. 에리얼과 아리엘이 동시에 손수건을 꺼내더니 세르니아에게 건네려 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힌 쌍둥이는 서로 자신의 손수건을 주겠다고 다투기 시작했다.

“네 건 필요 없으니까 넣어.”

“내가 먼저 꺼냈거든.”

둘의 신경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세르니아는 은회색의 눈동자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벨라는 세르니아의 미소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속마음을 읽히는 기분이었다.

“좋아. 둘 다 쓸게. 벨라 영애가.”

“네? 제가요?”

세르니아는 두 개의 손수건을 냉큼 가로채더니 하나는 반대쪽 다리에 감았고, 하나는 품에서 푸른 돌을 꺼내더니 손수건 위에 놔뒀다. 세르니아는 벨라의 귀에 대고 눈가가 빨갛다며 작게 속삭였다.

“언니 그건 정령석…….”

“응. 조금만 쓰려고.”

푸른 돌에 은은한 빛이 잠깐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손수건으로 벨라의 눈 주위를 닦았다.

‘시원해.’

물기를 머금은 손수건은 벨라의 눈물 자국을 지웠다. 조심스럽지만 꼼꼼한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신기했다. 스스로 낯가리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세르니아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부드럽게 감싸주는 빛 같았다.

‘헬리오스 님과 닮았지만, 다른…….’

벨라는 옆에 앉아 있는 세르니아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한편으론 자신의 오빠와 닮았다.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느낌. 세르니아는 그런 벨라를 거부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편안하다.’

담아 왔던 어두운 감정을 눈물로 토해내서일까 아니면 세르니아가 너무 편안해서일까. 하루 종일 나쁘던 기분이 나아졌다. 보기 싫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도 더 이상 밉지 않았다.

***

나는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벨라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황궁이 안전하다지만 어린아이 혼자 움직이지도 못한 채 얼마나 무서웠을까. 벨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이젠 괜찮아졌는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근데 아리엘이랑 에리얼은 소개 안 해?”

분위기가 진정되는 것을 느낀 나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질문을 했다.

“저희는 황태자님 탄신연회 때 소개했었어요.”

“누님은 그때 없으셨죠.”

그때 나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겠지. 하하.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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