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어쩐지 세 명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더라. 벨라가 아리엘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아리엘 님의 춤 실력에 감탄했답니다. 헬리오스 님과 정말 잘 어울렸어요.”
벨라는 여전히 내 어깨에 기댄 채 웅얼거렸다. 목소리가 유독 슬퍼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나는 아련한 표정을 짓는 벨라를 바라보다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잠깐! 헬리오스랑 아리엘이 춤을 췄다고?’
너무 놀라서 몸을 들썩였다. 기대고 있던 벨라도 옆에 있던 아리엘과 에리얼도 내 몸짓에 놀랐는지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그것보다 아리엘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아리엘 황태자님이랑 춤췄어?”
“네. 별로 안 추고 싶었는데 황제 폐하가 시키신 일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아. 다행이다. 나는 한껏 구겨진 아리엘의 표정을 보고 안심했다.
원작처럼 헬리오스에게 반하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불안했다. 저주 사건도 그렇고 황태자 탄신연회도 그렇고, 원작과 비슷한 사건은 반드시 발생했다.
‘뭔가 있는 건가? 운명이라던가.’
원작에 적힌 내용은 반드시 일어나는 걸까?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사건이 부족했다. 겨우 두 가지 사건. 그것도 외전에 짧게 설명됐던 부분이 전부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거기다 외전에서 춤을 췄다는 내용은 없었다.
“벨!”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원작과 운명의 관계를 짜 맞추고 있었는데 멀리서 벨라의 애칭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발을 흩날리며 뛰어온 그렌드윈이었다.
“오라버니.”
“많이 다쳤나?”
그렌드윈은 자신의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벨라의 상태부터 살폈다. 내가 흙이나 나뭇잎은 떼고 간단한 응급처치를 했으나 빨갛게 긁힌 손바닥이나 손수건으로 가리지 못한 상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업혀.”
오. 박력 넘치는데. 원래 벨라를 아끼는 그렌드윈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나는 벨라를 부축해서 그렌드윈의 등으로 옮겼다. 그렌드윈은 무거워하는 기색 없이 번쩍 들고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벨라를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나도 감사를 전하지. 벨라는 친동생 같은 아이거든.”
그리고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들유들한 목소리.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헬리오스도 함께 왔다는 것을.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헬리오스 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세르니아 영애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고.”
쌍둥이와 헬리오스에게 인사했더니 그는 나를 딱 지목하며 안부를 물었다. 이 녀석도 내 흑역사를 놀리고 싶어 하는 건가. 나는 능숙하게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네. 시리우스 님 덕분에 별일 없었으니까요.”
“그런가.”
헬리오스의 금안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뭔가 할 말 있어 보이는 표정인데. 나도 이참에 아리엘에게 찝쩍거리지 못하도록 한마디 할까. 하지만 아리엘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저희 언니 얼굴 닳아요.”
아리엘이 내 앞에 서며 말했다. 아, 아니 그렇게 말하지 마!
물론 나도 아리엘에게 접근하지 말아 달라고 말할 참이었으나 대사가 이상했다. 나는 닳을 정도의 얼굴이 아니야! 철판보다 두껍다고!
그러나 내 소리 없는 아우성이 닿지 않았는지 아리엘은 여전히 헬리오스와 눈싸움을 하며 나를 숨겼다. 부끄러움은 전부 나의 몫이잖아. 아리엘의 콩깍지가 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드러낼 줄은 몰랐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에리얼을 바라봤다. 어떻게 좀 해봐! 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에리얼도 내 눈빛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누님이 헬리오스 님 얼굴 보기 싫다고 합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내 눈빛은 하나도 전달이 안 됐다. 이 분위기 어쩔 거야. 헬리오스의 표정이 구겨졌다. 화났나?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분위기를 풀기 위해 웃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벨라 영애가 다쳤으니 빨리 돌아가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혹여 흉이라도 질까 걱정됩니다. 이 아이들은 원래 저를 너무 따라서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황태자님의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실.”
제발요! 그냥 넘어가 주세요. 나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풉.”
싸늘한 분위기 속에 청량한 웃음을 터트린 사람은 벨라였다. 그녀는 그렌드윈의 등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너는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어서 부럽구나. 나는 웃을 수도 찡그릴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세르니아 님이 너무 귀여우셔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어요.”
잠깐. 믿고 있던 너마저 나에게 부끄러움을 주려는 거야? 나는 결국 울상이 됐다. 총체적 난국 아니냐고.
“흠, 흠, 그래. 세르니아 영애는 귀엽군.”
헬리오스가 짓궂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와. 저거 100% 놀리는 말이다. 상황수습을 포기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놀리면 재밌지? 내 반응이 재밌어서 그러는 거겠지. 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이렇게 저를 칭찬해주시니 몸들 바를 모르겠네요. 어쨌든 저희는 시리우스 님을 뵈러 가야 해서 이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나는 도망치듯이 인사를 했다.
‘이 조합은 좋지 않아.’
극성처럼 나를 감싸는 쌍둥이와 나를 놀리려는 헬리오스의 조합은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벨라나 그렌드윈이 어느 한쪽을 말려주는 것도 아니었고. 이럴 땐 후퇴가 상책!
“아쉽군. 다음에 또 만나길 기대하지.”
‘싫은데요.’
헬리오스의 인사에 다들 고개만 숙일 뿐 대답하진 않았다. 헬리오스는 우리의 무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능글맞게 웃으며 떠나갔다. 진짜 안 만났으면. 우리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렌드윈과 헬리오스를 부르러 갔던 시녀도 어느새 돌아와서 자연스럽게 안내를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멀고 먼 여정이었다. 중앙 궁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족히 1시간은 걸린 것처럼 느껴졌다. 중간에 벨라를 만난 것도 있지만, 황궁의 넓이를 뼈저리게 체감한 귀중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안 와.’
나는 숨을 고르며 시리우스의 궁을 훑어봤다. 궁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관리가 안 되어있었다. 급하게 정리한 티가 역력한 정원은 막 심은 식물들이 뿌리도 못 내린 것처럼 보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심지 않아 드문드문 흙이 보였다. 궁은 건드릴 수조차 없었는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을씨년스러웠다. 궁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
“들어가시지요.”
아리엘과 에리얼도 궁의 외관에 충격이었는지 시녀의 재촉에 겨우 발걸음을 뗐다. 황후가 싫어해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더 심각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장처럼 보이는 여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안은 그나마 청소를 했는지 외관보단 괜찮았다.
‘밖은 포기하고 안쪽만 꾸몄나 보네.’
시리우스를 만나러 오기 전 수첩을 꼼꼼히 정독하고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에 등장한 시리우스와 너무 달랐기 때문도 있었고, 그와 관련된 사건이나 인간관계가 적혀 있나 싶어서 찾아봤었다.
‘시리우스 궁에는 원래 헬리오스가 보낸 관리인과 둘이 살았다고 적혀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방문 때문에 임시로 파견 나온 자들이겠지. 어쩌면 황후의 사람들일지 몰랐다. 웬만하면 몸을 사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나는 얌전히 시녀장의 뒤를 따라 걸으며 궁을 구경했다.
복도는 휑했다. 권력이나 부를 자랑하기 위한 사치품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장식품도 없었다. 썰렁한 복도엔 우리의 발소리만 울렸다. 어째 이곳만 기온이 더 낮은 느낌인데.
끼익.
드디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인형처럼 표정 없이 책을 읽고 있는 시리우스가 있었다. 그는 두꺼운 책을 덮고 일어서더니 우리를 향해 웃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시리우스 아슬란데라고 합니다.”
그래! 맞아. 내가 아는 시리우스는 이런 녀석이었다.
감정은 없지만 멀쩡한 사람인 척하는 녀석! 유일한 존댓말 남! 소시오패스 기질이 다분해 보이지만 데이지에게는 세상 다정한 서브 남주.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시리우스 님을 뵙습니다. 아리엘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에리얼 아르덴타인 입니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했던 아리엘과 에리얼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나도 쌍둥이를 따라 시리우스에게 인사했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시리우스 님을 뵙습니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소개도 못 한 점 사과드립니다.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복형제지만 웃는 얼굴이 헬리오스와 똑같았다. 아니 시리우스가 헬리오스의 흉내를 내는 것이겠지. 그는 감정이 없었기에 어떤 상황에 웃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 울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헬리오스가 가르쳐준 레퍼토리를 토대로 응용하며 그의 표정을 흉내 낼 뿐.
“꽤나 급작스럽게 방문 연락을 받아서 준비가 미흡한 점 양해 바랍니다.”
그는 싱긋 웃었으나 그 말엔 뼈가 있었다. 공작의 성격상 어제 말 꺼낸 것을 보니 어제 연락했겠지. 하루 만에 무너질 것 같은 궁을 낡았지만 그래도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단장하는 데 엄청난 인력이 투입됐을 것이다. 황궁 시녀들이 갈려 나갈 만했네.
“죄송합니다. 제가 감사의 인사를 최대한 빨리 드리고 싶다고 삼촌을 졸랐거든요.”
아리엘과 에리얼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눈으로 봤으나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이 일을 내 탓으로 돌렸다. 이렇게 변명하는 게 가장 무난했으니.
“괜찮습니다. 저도 세르니아 영애가 보고 싶었거든요.”
“!”
“!”
시리우스가 수줍게 웃으며 말하자 아리엘과 에리얼이 방어벽처럼 내 앞으로 나섰다. 얘들아 진정해. 그냥 입에 발린 말이라고. 나야 시리우스가 별 뜻 없이 한 말이라는 걸 알았으나 쌍둥이는 아니었다. 경계태세로 돌변한 쌍둥이는 시리우스를 노려봤다. 정작 시리우스는 쌍둥이의 눈초리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우선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시리우스는 여유롭게 자리를 권했다. 며칠 전에 봤던 시리우스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땐 날 것 그대로의 시리우스였지 않았을까. 가식이라는 껍데기를 쓰기 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이제 엮일 일 없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