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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18화 (1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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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성격을 분석하려다가 그만뒀다. 아카데미에 입학도 하지 않은 내가 쌍둥이를 제외한 등장인물과 엮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니 굳이 머리 아프게 원작과 비교하며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접고 시리우스의 미소에 화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쌍둥이도 따라 앉았다. 우리가 착석하기 무섭게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테이블에 디저트와 홍차를 세팅했다.

“향이 좋네요.”

“흐음. 그렇군요.”

내가 의미 없이 꺼낸 감탄사에 시리우스는 홍차를 지긋이 내려 보더니 ‘이런 게 좋은 향인 건가’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설마 처음 마시는 건가?’

가능성 있었다. 황궁에서 방치당한 시리우스가 우아하게 티타임을 가졌을 리 없었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것도 힘들지 않았을까. 나는 갑자기 시리우스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내 몫의 케이크를 양보했다.

“이것도 먹어보세요. 달콤한 게 맛있어요.”

단것에 열광하는 내가 케이크를 양보한 게 놀라운지 쌍둥이는 포크를 떨어트렸다. 아니 나도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음…….”

내 권유에 케이크를 한입 먹은 시리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제 입에는 너무 달군요. 평소에 단것을 잘 먹지 않아서요.”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시리우스는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변명했다. 단것을 별로 안 먹어 봤다니. 내 동정심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글로 읽었을 땐 현실감이 없으나 실제로 대면한 상대의 불행한 이야기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더 쉬웠다.

‘궁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한 수준이야.’

아동 학대라고! 나는 진지하게 시리우스를 공작가로 데려가야 하는지 갈등에 휩싸였다. 아까만 해도 원작이랑 엮일 일 없으니까 깊이 생각하지 말자고 했었는데, 대화한 지 5분 만에 마음이 바뀐 나는 어떻게 해야 시리우스를 황후의 손아귀에서 빼내 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강아지도 아니고, 쉽게 데려갈 순 없겠지.”

“네? 강아지요?”

시리우스가 강아지도 아니고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황족이니 쉽게 데려갈 수 없겠지. 라고 속으로 생각하던 말을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버렸다.

내 중얼거림은 모두 들었는지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리엘이 무슨 강아지냐고 작게 물었고, 나는 난처하게 웃었다.

“아니. 갑자기 강아지 키우고 싶어져서.”

어이없는 변명이었으나 다행히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강아지를 좋아하십니까?”

“네? 아, 뭐 좋아하는 편이죠.”

시리우스가 나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은 헬리오스의 웃음을 따라 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악당이 새로운 꿍꿍이를 계획할 때 지을 법한 의미심장한 미소!

“그렇군요.”

시리우스는 갑자기 일어서더니 사라졌다. 아무 말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 시리우스의 모습에 나와 아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고,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린 에리얼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텔레포트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만…….”

“황궁에선 마법 못 쓰는 거 아니야?”

당연하게도 황궁에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도록 결계가 있다. 초대 황제가 황궁을 세울 때 당시 대마법사에게 부탁해서 황궁을 보호할 결계를 설치했기 때문에 황궁 마법사는 물론이고, 웬만한 마법사들은 황궁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황궁에서 사용할 수 있는 건 마법 아티팩트뿐. 그런데 그는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했다. 아리엘과 에리얼이 놀랄 만도.

‘뭐랬더라.’

나는 수첩에 적혀 있었던 괄호를 떠올렸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았고, 때문에 그의 몸은 마력이나 정령의 힘을 받아들이기 쉽다고 했다. 숨 쉬듯 마력을 쌓은 그의 몸은 엄청난 마력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선천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었다. 방치당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마력 덕분이라 했었다.

‘황궁 결계를 뚫을 정도로 천재였구나.’

소설에선 그의 천재성이 부각되기도 전에 죽었었다. 이 부분도 데이지가 졸업하고 마탑에 갔을 때 마탑주가 시리우스의 죽음을 안타까워는 장면에서 서술됐었다.

눈으로 직접 보니 새삼 굉장하구나. 내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작은 빛이 일렁이더니 시리우스가 돌아왔다. 새카만 털 뭉치를 들고.

“그건…….”

“강아지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지 말라고.

내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말에 시리우스는 텔레포트를 해서 강아지를 구해왔다. 내가 원한 강아지는 실제 강아지가 아니라 너를 강아지로 만들어 데려갈까 했던 고민이었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었다. 시리우스의 품에 안겨서 혀를 내밀며 헥헥 거리는 강아지는 귀여웠다. 시리우스를 꼭 닮은 새카만 털에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강아지였다.

“어째서…….”

“세르니아 영애가 가지고 싶다고 하셔서요.”

나는 차마 질문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아리엘과 에리얼도 당황했는지 반응하지 못하고 그저 강아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선 어쨌든 내가 수습해야 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일단 공작님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서, 바로 데려갈 순 없을 것 같아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포메라니안같이 생긴 털 뭉치는 살랑이던 꼬리를 추욱 늘어트리더니 촉촉한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봤다. 안 돼. 눈빛 공격이 너무 강력해!

“이 아이를 버리는 건가요?”

시리우스까지 합세했다.

그는 어디서 그런 표정을 배워왔는지 강아지와 똑같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무덤을 내가 팠지. 이제 와서 내가 말한 강아지는 이 강아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기도 애매했다. 결국 새카만 두 쌍의 눈동자를 외면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우스의 품에 안긴 강아지를 받았다. 내 품에 안긴 강아지는 꼬리를 격하게 흔들었고, 시리우스도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저거 다 연기지? 내가 낚인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당한 기분일까. 나는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며 잊고 있었던 본론을 떠올렸다. 가볍게 티타임을 즐기며 안부를 물은 후 건네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살짝 꼬였다.

“시리우스 님 저번에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강아지를 잠시 아리엘에게 넘기고 품에 넣어 뒀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원래는 예쁘게 리본으로 포장했지만 아까 벨라의 상처 때문에 풀었었다. 내심 신경 쓰였으나 고급스러운 상자라서 성의 없어 보이진 않았다.

‘엄청 조금 사용했으니 처음이랑 별 차이 없겠지.’

마력석에 담긴 마력을 다 쓰면 평범한 돌이 되는 것처럼 정령석도 똑같았다. 손수건에 물을 적시기 위해 아주 조금 사용했으나 시리우스에겐 상관없으리라. 그에게 정령석을 주는 이유는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정령의 힘은 시리우스의 기분을 편안하게 한다고 했지.’

아로마 테라피 같은 효과!

시리우스는 내가 건넨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는 안에 담긴 정령석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마음에 안 드나?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시리우스의 표정을 열심히 살폈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시리우스가 상자를 닫으며 입을 열었다. 오묘한 미소였다.

‘너무 약해서 별 도움 안 되는 건가?’

가능성 있었다. 데이지는 정령에게 사랑받는 만큼 그녀의 주위에는 정령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에 비에 정령석에 담긴 힘은 너무 미약했다. 그냥 무난하게 다른 선물을 줄걸. 조금 후회했으나 이미 준 것을 뺏을 수도 없는 노릇.

“이것도 받아주세요. 언니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님의 목숨값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아리엘과 에리얼이 건넨 것은 검이었다. 화려한 보석은 달려 있지 않았으나 검집에 세공된 무늬가 예사롭지 않았다. 장인이 혼신의 힘을 불어넣은 작품처럼 보일 정도였다.

센스 좋은 선물이었다. 검술은 제국의 남자에게 기본적인 소양이었고, 아카데미 입학생의 필수품 같은 느낌이었다. 필수품이 뭔지도 모르는 시리우스에게 딱 맞는 선물! 뭐 입학 전에 헬리오스가 챙겨줬을 수도 있겠지만.

‘이래서 같이 오려고 했던 거구나.’

나는 쌍둥이가 어째서 따라오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그들도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감동이야!

“감사합니다.”

내가 준비한 정령석보다 훨씬 실용성 있고 좋은 선물이라 생각했는데 시리우스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지었던 만들어진 미소를 띠며 형식적인 감사 인사를 했다.

‘은근히 까다롭네.’

감정 없는 시리우스가 선물을 받고 기뻐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도움 되길 바랐고, 조금은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준비했었다.

‘당연한 결과지.’

약간 실망하긴 했으나 얻은 것이 더 많았기에 괜찮았다.

쌍둥이가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게 됐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았다. 나는 미지근해진 홍차를 마시며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작은 황제와 대화가 많이 길어지는지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공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으나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적당히 수다도 떨었고, 감사의 인사도 했으니 할 거 다했네. 나는 티타임을 마무리하려 했다.

“벌써 가시는 건가요?”

시리우스가 아쉬워하는 건 착각이겠지? 나는 그의 표정 연기가 남우주연감이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게까지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다음인가요.”

다음이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중얼거린 시리우스는 겨우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아리엘과 에리얼도 차례로 인사를 하고 일어서자 시녀장이 문을 열어줬다.

‘돌아갈 생각 하니 막막하네.’

왔던 만큼 걸어야겠지. 시작도 전에 지친 나는 시리우스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변화를.

***

황제와 공작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중앙 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었다. 시녀가 집무실에 우리의 도착을 알렸고, 공작은 저녁 먹고 가라는 황제의 제안을 쿨하게 거절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건 시리우스 황자…….”

공작은 내 품에 안긴 강아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왜 말을 끝까지 안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시리우스 황자님이 주셨어요.”

공작은 뜬금없이 강아지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개를 싫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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