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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20화 (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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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니아. 어째서 왔어요!? 제가 분명 거절하라고 했잖아요. 혹시 아버님이 뭐라고 하시진 않았어요?”

날카로운 말투와 다르게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맑은 주황색 눈동자에는 내 안색을 살피기 바빴다.

“네. 별말씀 없으셨어요. 그것보다 왜 마중 나오지 않았어요? 기대했는데.”

나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입술을 비죽이며 장난을 쳤다. 그에 카나린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님께서 저는 방에서 대기하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장난이에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이 아닌걸요. 표정 풀어요.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저는 너무 좋은걸요.”

으음, 이런 반응을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시무룩하게 풀죽은 카나린을 다독이자 그제야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저도, 이렇게 세르니아를 만나서 좋아요.”

백작의 무례는 벌써 잊혔다. 나에게 큰 타격을 줄 만한 일도 아니었고, 그보단 카나린에 대한 연민이 더 컸기에.

그녀의 방 안은 백작가의 응접실과는 비교도 안 됐다. 통일성 없었으나 돈을 많이 쏟아부은 티가 나는 응접실과 다르게 그녀의 방엔 제대로 된 사치품 하나 없었다. 가구도 낡았고, 입고 있는 옷도 소박했다. 무도회 때는 과하게 입고 있었는데.

‘보여주기식이었네.’

과한 보석도 화려한 드레스도 그저 백작가의 겉치레일 뿐 실상에서 카나린에게 투자하는 것은 아깝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방 안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나요? 오늘은 겨울치고 날씨도 좋은데 산책이나 할까요?”

“그게……. 아버님은 제가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제가 초대했는데 죄송해요.”

몸을 움직이면 도파민이 나와서 힘이 난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 있었다. 그래서 카나린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산책을 제안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니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이 집에 있는 게 보기 싫어? 말이야 방귀야. 나는 찌푸려지는 미간을 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아니에요. 사실 밖에 좀 춥더라고요. 건국제 전에 감기 걸리면 큰일이니 그냥 방 안에서 수다나 떨죠!”

“저도 좋아요. 오늘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세르니아가 좋아하는 몽블랑 케이크를 준비했어요!”

“정말요? 와 너무 좋아요. 역시 카나린이에요!”

내가 웃자 카나린도 따라 웃었다.

몽블랑 때문이지만 어쨌든 분위기가 풀려서 다행이다. 나는 시녀가 준비해준 몽블랑을 한입 크게 베어 물며 행복해했다. 나를 흐뭇하게 보고 있던 카나린이 새로운 주제를 꺼냈다.

“다음 주면 올해도 끝나네요. 건국제 준비는 다 하셨나요?”

“저는 저번 주에 쌍둥이와 의상실에 다녀왔어요.”

“그렇군요. 세르니아는 예쁘니까 어떤 드레스도 다 어울릴 거예요.”

오. 쌍둥이랑 똑같은 말 하는데.

카나린도 친구 콩깍지가 끼였나 보다. 나는 웃으면서 카나린도 그럴 거라고 말하자 그녀의 표정은 또 어두워졌다.

‘어디에 지뢰가 있었지? 그냥 어떤 드레스 입어도 잘 어울릴 거라 했는데.’

내가 한 말이 카나린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얕은 한숨을 뱉은 카나린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모르겠네요.”

“카나린이 고르지 않았어요?”

“제 의견과 상관없이 아버지가 가시는 의상실에서 가장 비싼 드레스를 입거든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해탈한 표정이었다.

‘와. 백작님 진짜 가지가지 하네. 어? 자기가 무슨 가지야? 가지냐고.’

나는 몽블랑으로 풀렸던 분노가 다시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게 디자이너들은 대체적으로 주요 분야가 있다. 귀부인의 드레스 위주인 디자이너, 어린아이 드레스나 연미복 중심인 디자이너. 당연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영애들 사이에서 이름 날리는 디자이너도 따로 있다.

‘그런데 성인 남자 귀족이 주류인 의상실에서 딸의 옷을 사다니 돈 낭비잖아!’

나는 분노를 삼키고 웃었다.

그래도 친구 부모님한테 쌍욕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일 화나는 사람은 카나린일 텐데.

‘빠른 독립이 답인데.’

곧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적어도 2년은 백작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선 카나린이 졸업하고 어떻게 됐는지 안 나왔던 거 같은데.’

나는 포크로 몽블랑을 괴롭히며 카나린에게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고심했다.

“세르니아?”

“아 죄송해요. 몽블랑이 너무 맛있어서 쪼개 먹으려고요.”

카나린이 주황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내 안색을 살피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제가 도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고민해드릴 수 있으니까요.”

카나린이 진지하게 말했다. 감동이야!

나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니구나. 카나린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안심했다.

‘그렇다고 본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카나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네가 걱정이야.’라고 말하겠는가.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음, 이제 쌍둥이가 곧 아카데미에 입학하잖아요.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돼서요.”

“그렇군요. 그분들이라면 세르니아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지내실 거 같은데요.”

응.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단호박 쌍둥이는 어디를 가도 잘 지내겠지. 그 공작님 밑에서 자란 아이들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린도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인데 걱정 안 되나요?”

“저요?”

내 물음에 카나린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한편으로 기대돼요. 저는 영지에서도 늘 방에만 있었고, 누군가와 교류를 한 적도 없어서. 아, 물론 세르니아가 처음이에요.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초대해서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저도요. 저도 카나린이 첫 친구예요!”

우리는 배시시 웃었다.

“정말, 그때 세르니아를 민 건 잘못했지만 공작가로 사과하러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때는 세르니아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었는데.”

원래 그런 친구도 있지 않은가.

쟤랑은 절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대화를 나누거나 뭔가 한번 엮이기 시작하면서 친해지는 경우.

나도 마찬가지였다.

카나린과 친구가 될 거라는 상상은 물론이고 용서를 구하러 공작가에 찾아왔을 때도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순한 동정. 그뿐이었었다. 그런데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카나린의 새로운 매력을 알게 됐고, 생각보다 잘 맞는다고 느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로 길게 이어질 줄도 몰랐고.’

초여름에 시작된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감상을 전하며 공감대가 형성되니 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저, 세르니아…….”

“네?”

감상에 젖어있었는데 카나린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혹시 애칭으로 불러도 되나요?”

“애칭이요?”

“아, 아니. 저는 세르니아가 저를 애칭으로 불러줬으면 좋을 거 같아서요. 싫으시면 괜찮아요!”

내가 되묻자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정작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애칭이라서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친한 사람끼리는 애칭으로 불렀지!’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를 애칭으로 부른 적도, 불린 적도 없었기에 생각해본 적 없던 문제였다.

“아니 그게 아니고 사실 제 애칭이 없어서요.”

나는 일단 카나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애칭이 없다고요?”

카나린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응. 그거 아니야.

아이고, 너무 성급하게 말해버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대충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카나린의 이상한 상상이 멀리 나가기 전에 나는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네. 삼촌은 원래 애칭을 부르는 성격이 아니고 쌍둥이는 언제나 언니, 누님하고 부르거든요. 생각해보니 저도 쌍둥이에게 애칭으로 부른 적 없네요.”

“아, 공작가에선 다들 애칭을 잘 안 부르나 봐요.”

“네. 숙모가 없어서 그런지 조금 딱딱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좀 더 신경 써서 쌍둥이의 애칭을 불렀어야 했는데. 이건 언니 실격이네요.”

휴, 됐다. 포장 잘했어!

솔직히 애칭에 중요성을 못 느낀 부분도 있었으나 이곳에선 ‘애칭=친밀감의 상징’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아니에요! 집안 분위기가 그런 거잖아요. 사실 저도 애칭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어머님밖에 없는걸요.”

카나린이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대체적으로 딸의 드레스는 아빠의 의상실이 아니라 엄마의 의상실에서 엄마와 함께 맞춘다. 그런데 카나린은 백작의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췄다고 했지.

‘쌍둥이처럼 어머니와 떨어져서 지내는 걸까. 아니면…….’

카나린은 무어라 말하려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지 찻잔을 문지르며 침묵했다. 나는 그녀를 재촉하지도 않고, 주제를 바꾸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카나린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말하기 싫어서의 머뭇거림이 아니라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을.

“어머님은 저를 카나라고 불러주셨어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 이름이거든요. 작은 노란 꽃이 한 줄기에 올망졸망 모여서 피는 귀여운 꽃이에요.”

“그렇군요. 카나린을 똑 닮았을 거 같아요.”

유채꽃 같은 느낌이려나. 카나린은 추억에 잠겼는지 아련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고마워요. 어머님은 원래 몸이 약하셨어요. 동생을 낳고 더 약해져서 5년 전 이맘때쯤 돌아가셨어요.”

“…….”

“아버님은 어머님을 사랑하지 않으셨어요. 알고 있었어요. 어머님은 백작 가문이었지만 가난했고, 아버님은 더 신분이 높은 사람과 결혼했어야 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거든요.”

그 양반 정말 쓰레기구만.

나는 카나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으나 백작의 행동이 자꾸 신경을 긁었다. 물론 귀족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경우보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 결혼하는 부부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예의란 게 있어야지!’

“그 후로 한 번도 애칭으로 불려본 적 없었거든요.”

“제가 부를게요! 카나 그러니 웃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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