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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작업멘트가 된 것 같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은 카나린의 눈동자를 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카나린은 한결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혼자서 계속 품어왔을 사정. 딱히 비밀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마땅히 털어놓을 사람이 없었겠지. 나는 카나린의 손을 잡았다.
“별말씀을요. 카나도 저를 애칭으로 불러주세요. 아, 근데 저 애칭이 없어서.”
“괜찮다면 제가 지어드려도 되나요?”
“물론이죠!”
보통 애칭은 이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랑받는 아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에게 자연스럽게 받을 호칭. 그러니 애칭은 주로 부모님이 지어준다.
‘세르? 니아? 아니면 셀?’
나는 내 이름에서 나올 수 있는 애칭의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었다.
“니아는 어떤가요?”
“좋아요!”
무난하네. 하고 생각했으나 이어지는 카나린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얼마나 나를 생각해서 애칭을 지어줬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님이 해주신 옛날이야기에 나온 요정 이름이에요. 장난꾸러기지만 사람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착한 요정이거든요. 니아를 봤을 때 동화 속에 나왔던 그 요정이 떠오르지 뭐에요.”
요정이라니. 나보다 네가 더 요정 같은데요. 나는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이었고, 카나린은 평균보다 키가 작았다. 당연히 나보다 얼굴 하나가 작은 카나린이 요정에 가깝지! 혼자 결론을 내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은 요정보다 여신에 가깝고.’
공작가의 핏줄인지 나도, 쌍둥이도 키가 컸다. 아직 15살이었으나 에리얼의 키는 170을 훌쩍 넘었을 것이고, 아리엘과 나는 170쯤 되지 않았을까. 의상실에서 옷을 맞출 때 키를 말해 준 것 같았는데 흘려들었더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어쨌든 내 애칭이 만들어진 감격스러운 순간이니까! 나는 웃으면서 요정에 대해 물었다. 마법도 정령도 있으니 요정도 진짜 있을 수도 있고.
“요정님의 이야기라니 궁금하네요! 나중에 책 제목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 빌려드릴게요!”
카나린은 가지고 있는 책을 흔쾌히 빌려준다고 했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책일 텐데 조심히 다뤄야겠다.
똑똑.
“이야기 중에 죄송합니다. 공작가에서 마차가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집사가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집사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처럼 시간이 빠르게 흐른 적은 처음이에요.”
배웅하기 위해 같이 일어선 카나린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그래도 며칠 후에 있을 건국제에서 만나잖아요! 편지도 할게요.”
“네!”
카나린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마차에 올랐다. 생각보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백작이 좀 많이 쓰레기란 것을 느꼈지만.
‘애칭이라.’
확실히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나는 아직 부족하구나. 쌍둥이에게 최선을 다했으나 미숙한 점이 많았기에. 육아란 정말 어려웠다. 새삼 전생의 부모님이 존경스러웠다.
‘부모님도 첫 육아였을 텐데.’
반드시 옳은 육아는 없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씩 배워나가는 거겠지. 나는 쌍둥이에게 가족이 되고 싶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
비록 사촌이라 피가 반밖에 섞이지 않았지만 쌍둥이는 나를 가족이라 생각해 줄 것이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삼촌이라 불러 달라고 했으니 그도 나를 가족이라 생각하는 거겠지.
가족이란 반드시 피로만 엮여야 하는 관계가 아니니까.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 카나린에게도 피만 이어진 가족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가족이 생기리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믿음직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
평범한 하루였다.
특별한 사건 없이 어제와 같은 일상.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처럼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갔다고 생각했었다.
“세르니아 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인가 싶어서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떴는데 방 안은 아직 어두웠다.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해 두꺼운 커튼을 쳤더니 더 어둡게 느껴졌다. 나는 캄캄한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몇 번이나 끔뻑였다.
‘뭐지? 분명 날 깨웠는데.’
꿈이라기엔 목소리가 선명했다.
낮고 허스키하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 잠깐? 나는 잠기운이 확 달아났다. 에리얼과 공작을 제외하곤 한밤중에 내 방에 찾아올 남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세르니아 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암살자?’
아니야. 암살자였다면 잠들어 있을 때 죽였겠지. 자고 있는 목표를 깨워서 친절하게 이제 너를 죽일 거라고 예고할 리는 없었다. 굳이 암살자까지 고용해서 나를 죽이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면 대체 누구?
“세르니아 님. 이쪽입니다.”
경계심을 가지고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테라스에 있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에 서랍에 넣어놨던 작은 단검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나는 오른손으로 단검을 꼭 움켜쥐고 왼손으로 커튼을 젖혔다.
“어?”
“오랜만입니다.”
촤라락 거리며 커튼이 걷히자 실루엣의 정체가 드러났다. 시리우스.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하늘 아래 유독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보였다. 어째서 이런 한밤에? 나는 예상외의 인물에 잠시 사고가 정지했다.
“어째서?”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장을 완성하기 전에 단어를 뱉어버렸다. 하지만 내가 뭘 질문했는지 알아들은 시리우스는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다음이 오지 않아 불안했습니다.”
“다음이요?”
뭔 헛소리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창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갔다. 완전한 겨울이라 서늘한 바람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숄이라도 두르고 나올걸.
“춥습니다. 이거라도 걸치세요.”
시리우스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내 어깨를 덮어줬다. 입고 있던 옷이라 그런지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아,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 늦은 밤에, 아니지 여기 공작가인데 대체 어디로 들어왔어요?”
나는 어디서부터 태클 걸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횡설수설했다. 그 모습이 웃겼는지 시리우스는 하얗고 기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오. 손 예쁘다. 나는 시리우스의 쭉 뻗은 손가락에 잠시 시선을 뺏겼다.
“이 아이 덕분에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홀린 듯이 시리우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가리킨 아이는 그의 발밑에서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검은 털 뭉치. 밤이었다.
“밤아, 너는 왜 여기 있어?”
이곳은 2층이었다. 작은 포메라니안 같은 밤이가 밖에서 들어올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 밤이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꼬리를 흔들며 내 옆으로 왔다.
“밤이라고 지으셨습니까. 잘 어울리는군요.”
그는 아까부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어쩌면 경계심을 줄이려고 웃고 있는 걸까.’
첫인상이 너무 강렬한 탓에 나는 그의 모든 행동이 가식처럼 느껴졌다. 이 행동도 연기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 내가 얼굴을 굳히고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의 웃는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경계하실 것 없습니다. 그 아이는 저와 마력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연결된 마력을 토대로 결계를 뚫고 좌표를 찍어서 텔레포트 했습니다.”
와. 완전 만능이네. 나도 전생에 출근할 때 저런 능력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밤이와 시리우스가 마력으로 연결됐다는 부분에서 이질감을 느꼈다. 동시에 공작이 내 방에 출입을 금지한다는 말도 같이 떠올랐다.
“밤이와 마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감각이나 뭐 그런 것도 공유한다는 건가요?”
“시도는 안 해봤지만 가능하지 않을까요. 한번 해볼까요?”
“아니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더니 시리우스는 긴 검지를 내 입에 대며 ‘쉿’ 하고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격하게 반응하실 줄 몰랐습니다.”
“당연하죠! 그건 범죄라고요. 절대 안 돼요.”
“세르니아 님이 싫다고 한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어쩐지 평범한 강아지 치고 똑똑하다 생각했었는데 마력으로 연결되었다니. 밤이에 대한 새로운 사실에 놀랐으나 눈을 반쯤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으로 잘못했다 하는 시리우스를 혼내기도 애매했다. 그래. 15년 동안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자란 아이니까 어떤 점이 잘못됐는지 모를 수도 있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시리우스를 내 방으로 들였다.
“제가…… 들어가도 되나요?”
“날도 춥고, 대화를 나눠보니 금방 끝날 거 같지 않아서요. 시녀를 부를 수 없어 차는 대접은 못 하지만요.”
나는 밤이를 무릎에 올려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리우스를 마주 봤다. 오랜만에 본 시리우스는 많이 변해 있었다. 헬리오스나 에리얼에 비해 선이 가늘고 키도 작았는데 성장기의 청소년이라 그런가?
“우선 저를 어떻게 불렀어요? 분명 귀에 속삭이는 것만큼 가깝게 들렸는데 그것도 마법인가요?”
나는 제일 처음부터 짚고 넘어갔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머릿속이나 멀리서 크게 소리친 것이 아니었다. 꿈결이었으나 확신할 수 있었다.
“네. 소리 전달 마법입니다. 원하는 소리를 마력에 담아 세르니아 님 귀에 흘려보낸 거죠.”
“그 소리는 저만 들을 수 있었고요?”
“네.”
어쩐지 귀에 속삭이더라. 나는 첫 번째 의문을 풀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다음’은 무슨 말인가요?”
다음이 오지 않아서 불안했다. 몇 번을 되뇌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시리우스는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대답했다.
“저번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음에 보기로.”
“저번이요?”
나는 저번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설마 마지막으로 봤을 때 예의상으로 한 말인가? 했던 것 같긴 하다. 6개월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그날이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으나 대충 다음에 보자는 식으로 인사를 했던 것 같았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황당했다. 의미 없는 인사말이었는데. 그걸 약속이라 생각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