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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가 내 생각보다 훨씬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념이나 상식은 백지 수준이었다.
‘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나는 시리우스에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완전 어린이라고 생각하는 게 덜 스트레스 받겠지.
“시리우스 님 일단 그날 했던 말은 예의상 했던 말이었어요.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을 몰랐습니다.”
“……거짓말이었나요?”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 변화에 소름 돋을 정도로.
“아니요. 거짓말은 아니죠! 시간을 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오늘 이렇게 만났잖아요?”
나는 애써 변명을 쥐어짜 내며 시리우스를 향해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공작에게 잘 안 써서 연습 안 했는데 먹힐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가…… 만나러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안 만났을 거라는 뜻인가요.”
예의 바른 말투와 다르게 가뭄에 갈라진 대지처럼 건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번엔 질문조차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죠. 언젠가 만났을 거예요. 예를 들어 건국제 라든가 아니면 아카데미 입학식이라든가.”
“…….”
침묵이 무거워!
시리우스의 눈동자는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도 그 눈동자를 마주 보며 표정을 읽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십니까?”
“쌍둥이가 하죠.”
물론 아카데미에 외부인 출입금지라 입학식을 관람할 순 없겠지만. 기념적인 쌍둥이의 입학식이니 입구까지 배웅하고 싶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식을 보는 느낌이랄까.
“세르니아 님은 하지 않는 건가요?”
“네. 저는 이미 졸업할 나이인걸요.”
나는 이제 성인이다. 아카데미에 복학생이 있을 순 있겠지만 내가 굳이 나보다 2살이나 어린 아이들과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고 싶진 않았다.
“그럼 건국제와 아카데미 입학식 이후에는 못 보는 건가요?”
오늘 밤하늘만큼이나 새카만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일렁거렸다. 붉은빛은 그의 눈동자에 잠시 감돌다 사라졌다. 나는 그의 눈동자 변화에 시선을 빼앗겨서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언제든지 볼 수 있어요.”
“언제든지?”
그래. 상식이 없으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면 되지. 전생의 직업병이 도졌다. 나는 순수하게 질문하는 시리우스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시리우스 님. 만날 약속을 잡고 싶으면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야 하는 건 알고 있죠? 저에겐 괜찮으나 다른 상대에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가는 건 상대를 곤란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에요.”
“그렇군요.”
시리우스는 의외로 빠르게 수긍했다. 정말 이해했나? 나는 시리우스를 믿기로 했다. 그의 무지는 황후의 학대에서 비롯된 것이니. 원래 머리는 좋은 거겠지.
“그러니 먼저 연락을 해야 해요. 연락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가장 무난한 것은 편지를 쓰는 것이죠.”
“편지요?”
그는 진심으로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연기할 때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지은 순수한 표정이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고 있으니 나는 그에 대해 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리우스에게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사람은 데이지뿐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어.’
감정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본적인 희로애락과 더불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소설에서 나왔던 것처럼 시리우스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사람은 데이지! 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랬기에 데이지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감정을 전혀 못 느낄 거라는 고정관념에 갇혀있었다.
‘호기심도 감정의 일종이고.’
나는 시리우스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유치원에 있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쌍둥이는 자식 같았다면 시리우스는 유치원에서 가르치는 아이 같았다.
“네. 편지로 간단한 안부를 묻고, 본론을 적어요. 어떤 이유 때문에 편지를 보내는지 적으면 돼요. 만날 약속을 정하는 거라면 정확한 시간과 장소, 만나야 하는 이유를 적어서 보내요.”
“어떻게 보내나요?”
당연히 시종을 시켜서.
인데 시리우스의 궁엔 시종이 없다. 나는 뭐라고 말할지 잠시 망설였다.
‘어차피 시리우스는 원래 시종을 시켜서 보내는 것 자체를 모르니 헬리오스에게 부탁하면 된다고 말할까?’
편지를 보내는 방법도 몰랐으니 이렇게 말하더라도 뭐가 이상한지 모르리라.
“저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다고 헬리오스 님에게 부탁하면 보내주실 거예요.”
“…….”
또다시 이어진 침묵.
내가 뭔가 신경을 건드렸나? 조금 전만 해도 편지 쓰는 법에 대해 열심히 들으며 호기심을 담아 눈동자를 반짝였는데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형님에겐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 보내는 거요?”
“……네.”
왜지? 나는 시리우스의 궁 특성상 편지를 보내줄 시종이 없을 것 같아서 황태자를 언급한 거였는데, 사이가 안 좋았나?
그렇다고 시리우스를 기피하는 황궁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온전히 전달할 리가 없었다. 현재 시리우스 궁에 살고 있는 관리인도 헬리오스의 사람이고.
‘황궁에서 시리우스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은 헬리오스밖에 없다고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본인이 싫다니 강요할 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던 나는 시리우스의 특징이 떠올랐다.
“그럼 마법으로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마법 천재라면 편지만 텔레포트 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방법은 마음에 들었는지 싸늘하던 표정이 풀렸다.
“간단한 방법이군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던 시리우스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려는 걸까. 나도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굳고 말았다.
‘분홍색?’
새카맣던 시리우스의 눈동자가 분홍색으로 변했다. 일렁이던 붉은 빛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에게 시리우스는 바짝 다가왔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
“당신은 너무 무방비합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보라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시녀가 머리를 손질할 때를 제외하고 누가 내 머리를 쓰다듬은 것은 처음이어서 생소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욕심이 생깁니다.”
유리조각상을 대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보고 있으면 자꾸 닿고 싶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은회색 눈동자가, 다음엔 보라색 머리카락이, 그리고 하얀 피부가.”
시리우스의 손길은 머리를 지나 목덜미로 내려갔다.
서늘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반대쪽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았기에 밀리지 않았다.
“말했잖습니까. 당신은 너무 무방비하다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귀에 속삭였다.
밀착된 몸을 통해 느껴진 그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선이 가늘다고 생각했었는데, 얇은 잠옷 너머로 그의 근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은 시리도록 차가웠는데 귀에 닿아오는 숨길은 뜨거웠다.
나는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사고가 정지했다.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잠식시켰다.
“한밤중에 얇은 슈미즈 차림으로 방에 초대하면.”
목덜미를 간지럽히던 손은 서서히 내려갔고, 그의 얼굴도 내 목에 닿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시스템다운 됐던 내 머릿속에서 경고 벨이 울렸다. 위험하다. 이 상황은 위험하다!
“참으려고 해도, 흔들리게 됩니다.”
내 목에 얼굴을 박은 시리우스가 웅얼거렸다.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거미줄에 잡힌 먹이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덜미에 뜨뜻하고 몰캉한 것이 닿았다.
“!”
그는 아주 달콤한 사탕을 핥듯이 내 목을 지나 쇄골을 핥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턱을 간지럽혔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머리로 따라가기 힘든 상황과 동시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리우스의 온기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읏, 안 돼!”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슈미즈를 들어 올리고 허벅지를 쓰다듬자 반사적으로 안 된다는 말이 튀어 나갔다. 밀착한 그의 몸을 떨쳐낼 순 없었으나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은 안간힘을 다해 막았다.
‘절대로 안 돼!’
마비됐던 이성이 돌아왔다.
내 필사적인 저항이 통했는지 시리우스는 내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물러선 그의 얼굴엔 진한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죄송합니다. 세르니아 님의 향에 취해 잠시 제어가 안 됐습니다.”
내가 무슨 술도 아니고 향기에 취하는 게 말이 되냐!
너무 어이없는 변명에 화도 나지 않았다. 이 녀석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진지한 걱정이 먼저 들었다.
‘성교육도 안 받았겠지?’
그가 쓰다듬던 목덜미가 아파 왔다. 진짜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하는 걸까. 딱 혈기왕성할 시기였으나 아직은 미성년자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시리우스 님, 제가 할 말은 많지만 간략하게 말하겠습니다. 우선 이런 행위는 미성년자가 하면 안 됩니다.”
시리우스는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일방적으로 하는 건 범죄에요!”
“네. 다음부턴 절대 세르니아 님의 허락 없이 손대지 않겠습니다.”
눈을 내리깔자 길게 뻗은 검은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한층 처연해 보였다. 불쌍해 보였으나 나는 몇 번이고 재차 이런 행위가 범죄임을 강조했다. 내가 성교육을 해 줄 순 없지만 적어도 이게 나쁘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시켜야겠다고 판단했기에.
“약속하겠습니다. 꼭 성인이 되고 나서 상대방의 동의를 받은 후에 하겠습니다.”
“네. 꼭 지키셔야 해요. 아, 시리우스 님이 성인이라도 상대방이 미성년자면 안 됩니다.”
가벼운 훈계를 끝내고 약속을 받아냈다.
시리우스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 나는 그제야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존재를 깨달았다.
‘보고 있었으면 말렸어야지!’
무릎에 앉아 있었던 밤이는 내가 일어서며 테이블 밑으로 내려갔었는데, 지금 보니 태평하게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나중에 밤이에게 ‘물어’와 ‘짖어’를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불쌍한 표정이 단숨에 사라진 시리우스는 눈을 곱게 접으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