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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키스를, 해도 되겠습니까?”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다른 손을 나에게 내밀며 물었다. 아니 그렇게 야하게 말하지 말라고. 기사가 있는 세계답게 손등 키스는 존중의 인사로 많이 행해진다. 건전한 인사를 단숨에 19금으로 만들다니.
거절하기도 애매해서 시리우스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경건해 보일 정도였다. 방금까지 야릇하게 웃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자 목덜미를 핥던 촉감이 같이 떠올라 순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주책이야!
“다음에 만나러 올 땐 반드시 편지를 쓰겠습니다.”
한참이나 내 손등에 머물렀던 입술이 떨어지고 시리우스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완전히 분홍색으로 변한 눈동자에 내 얼굴이 담겨있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서늘했던 시리우스의 손이 미지근해졌다. 내가 차가워진 건지, 시리우스가 따뜻해진 건지. 서로 비슷한 온도를 공유한 손이 떨어졌고 시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구름이 걷혔는지 테라스에서 환한 달빛이 들어왔다.
“그럼, 건국제 때 뵙겠습니다.”
그는 테라스의 문을 열며 인사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런데 시리우스의 검은 머리칼에 달빛이 내려앉은 순간 헬리오스와 같은 은발로 보였다. 뭐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는 사이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사라져 있었다. 테라스엔 싸늘한 바람에 커튼만 나부꼈다.
“아 맞다. 옷 주는 거 깜빡했네.”
나는 어깨에 걸쳐진 겉옷을 움켜줬다.
예고도 없이 등장한 손님은 바람처럼 돌아가 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꿈이 아니었을까 착각할 정도였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과 냉기를 막아주는 시리우스의 겉옷이 아니었다면.
***
어젯밤 현실감 없는 밀회의 증거, 시리우스의 겉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침 준비를 도와주는 시녀보다 일찍 아리엘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외출 준비를 마쳤는지 단정하지만 우아한 느낌을 주는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아직 아침도 안 먹었는데. 나완 달리 부지런한 아리엘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들고 있던 시리우스의 겉옷을 이불 속으로 숨겼다.
“역시 저도 언니를 따라갈래요.”
내 행동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리엘에게 예쁘다는 칭찬을 하고 있었는데 대뜸 내 어깨를 잡으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화법이 점점 닮아 가네.’
하지만 대략적인 상황을 토대로 아리엘이 하고 싶은 말은 유추할 수 있었다.
“안 돼. 너는 공식행사잖아.”
“그렇지만!”
“괜찮아. 에리얼도 같이 가니까 걱정 마.”
“그 녀석은 전혀 믿음이 안 가는 걸요.”
곧 다가오는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해 다른 왕국에서 외교대신들이 방문했다. 건국제는 이틀 뒤지만 그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환영회가 열리는데 공작부인의 빈자리를 대신해 아리엘이 공작과 함께 그 파티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번엔 아리엘이 먼저 참석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지.’
그리고 나와 에리얼은 카일렌 후작가의 티파티에 초대됐다.
아리엘도 함께 초대됐으나 환영회가 먼저 잡힌 일정이라 티파티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아리엘, 난 네 선택을 존중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어릴 적부터 다른 왕국의 언어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아리엘에게 환영회는 외교대신들과 대화하며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아리엘이 나와 함께 티파티에 가는 걸 바라지 않았다.
“저는…….”
아리엘은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마음인지.
“아리엘 아가씨, 공작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첼시가 아리엘을 데리러 왔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면서도 마음이 무거운지 그녀는 머뭇거리며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환영회 잘 갔다 오고! 저녁때 어땠는지 알려줘. 기대할게.”
“언니도요.”
아리엘은 후기를 기대한다는 내 대답에 겨우 방에서 나섰다. 아리엘이 떠나고 나도 슬슬 티파티에 갈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크게 의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시녀들의 손길을 받으며 생각에 잠겼다. 유아 시절에는 엄마를 대신해 나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나와 있고 싶어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나는 쌍둥이가 성장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길 바랐지, 나로 인해 제자리에 멈춰있길 바라지 않았다.
평소에 나를 과하게 감싸고 돈 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님을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다는 심리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는데 나에 대한 의존이나 집착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일단은 아카데미 입학까지 지켜볼까.’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되면 강제적으로 떨어지게 되어 의존도가 낮아질 수도 있으니.
“아가씨 드레스는 어떤 걸로 할까요?”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첼시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과 오늘 날씨에 맞춰 내 취향에 맞는 드레스 몇 벌을 가져왔다. 나는 가장 따뜻해 보이는 드레스를 선택했다. 겨울 티파티라서 실내에서 진행되지만 나는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이다.
“누님 준비 끝나셨습니까.”
“응. 출발할까?”
나와 에리얼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예상치도 못한 티파티. 그것도 카일렌 후작가의 티파티였다. 벨라와 그렌드윈을 또 만날 거란 기대도 없었기에.
“카일렌 후작가는 처음이라 떨린다.”
마차를 타고 도착한 카일렌 후작가는 의외로 가까웠다. 이렇게 가까웠는데 한 번도 못 봤었다니. 내가 너무 집순이었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평범한 티파티인걸요.”
에리얼이 싱긋 웃으며 나를 에스코트했다.
에리얼도 티파티는 처음일 텐데? 매일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나는 여유로운 척하며 리드하는 에리얼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세르니아 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홀에 도착하자 우리를 발견한 벨라가 쪼르르 달려와서 반갑게 맞이해줬다.
우리도 딱 맞춰왔는데 다른 귀족들은 조금 일찍 왔는지 제일 마지막에 도착했다. 뭔가 주인공스러운 등장이네. 나는 오늘 초대된 손님들을 살짝 둘러보며 벨라에게 인사했다.
“벨라 영애. 오늘 티파티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참석해주셔서 영광인걸요.”
그녀는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수줍다는 듯이 드레스 앞자락을 꼭 움켜쥐며 말했다. 분홍빛으로 물든 벨라의 뺨은 생기를 더했고, 반짝이는 금발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명화 속에 나오는 천사처럼 보였다.
“벨라 영애는 오늘…….”
“다들 건국제 준비로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터링 없이 천사 같다는 말을 입 밖으로 뱉으려고 했는데 후작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티파티의 시작을 알렸다. 벨라가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고, 자리에 앉은 우리는 후작부인의 인사말을 들었다.
이번 티파티는 건국제 전, 영지에서 올라온 귀족들이 수도의 파티에 적응할 수 있도록 예행연습 같은 파티였다.
보통 교류가 있거나 같은 파벌인 귀족들끼리 모여서 하는 티파티인데 저번에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며 벨라가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테이블은 귀족 부인들끼리 모인 테이블과 아직 어린 귀족들끼리 모인 테이블로 나누어져 있었다.
우리 테이블에는 카일렌 남매와 저번 황태자 탄신연회 때 봤던 귀족 영애 몇 명, 처음 보는 귀족 영애 한 명, 이렇게 앉았다.
본격적인 티파티가 시작되자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하나둘씩 세팅되고 따끈한 홍차도 나왔다. 나는 디저트를 보며 눈을 빛내고 있었는데 옆에 다가온 사람 때문에 차마 포크를 들지 못했다.
“벨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뚝뚝한 얼굴로 다가온 사람은 그렌드윈이었다.
담백한 감사 인사였으나 마주 본 푸른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아니요. 당연히 할 일이었지요. 벨라 영애가 무사해서 다행이었죠.”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 차애와 대화할 수 있는 건 기쁘지만 지금은 눈앞에 있는 디저트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원래는 선물을 준비하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물질적인 것들은 아르덴타인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실 것 같아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벨라를 도와주신 은혜를 그런 시시한 것들로 대처할 수 없으니까요. 하고 마음의 소리 같은 혼잣말도 중얼거렸다.
‘왠지 시리우스가 요구한 빚이 생각나는군. 뭐, 벨라는 내가 없었어도 죽진 않았겠지만.’
나는 시리우스처럼 사채업자가 되고 싶지 않아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고 거절했다.
“아닙니다. 부디 부담 없이 말씀해주십시오.”
결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시스터 콤플렉스였나. 동생을 끔찍이 아낀다는 설정을 떠올리자 지금의 반응이 이해 갔다.
“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벨라 영애는 오늘따라 천사 같네요.”
아까 하려던 말을 그렌드윈에게 했다. 부담스러운 대화를 끝내기 위해 주제를 돌리려는 의도였다. 나는 제일 무난해 보이는 주제로 그렌드윈이 좋아하는 벨라의 칭찬을 했다. 보통 그렇지 않은가. 대화할 때 좋아하는 주제가 나오면 별로 안 친한 사람과 대화하더라도 막힘없이 말이 줄줄 나오는 경우가.
“당연한 말씀이지만 벨은 언제나 천사 같았습니다. 하얗고 투명한 피부도 결 좋게 흩날리는 금발도 하늘보다 푸른 눈동자도.”
어라? 왠지 내가 스위치 누른 느낌인데.
그렌드윈은 갑자기 벨라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벼운 칭찬은 이내 찬양으로 변했다. 평소엔 목석같던 눈동자를 빛내며! 순간 랩퍼인 줄. 라임까지 맞춰가며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벨은 마음도 곱습니다. 명화 속에 있던 천사가 지상에 강림했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그렌드윈에게 반응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