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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법을 사용해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을 바꿨는지 평민 분장을 하고 있었다.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라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테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어서.”
“죄송할 거까지야.”
자기가 눈치 없다고 뭐라 했으면서.
나의 빈정거린 대답에 별거 아니라는 투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내가 안고 있는 밤이를 내려다봤다.
“뭘 안고 있는 거지?”
방금까지만 해도 버둥거리던 밤이가 헬리오스의 시선을 받자 얌전해졌다.
‘설마 헬리오스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가? 그래서 반대쪽으로 가려고 발버둥 친 걸까?’
밤이는 어쩐지 부루퉁한 눈으로 나를 한번 보더니 내 품으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헬리오스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에이. 아무리 똑똑한 강아지라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나는 이상한 상상을 털어 냈다.
“검은 털을 가진 동물이라니. 처음 보는군. 강아지인가?”
그러고 보니 검은색은 저주의 색이었지! 나는 너무 익숙해서 잊고 있었다. 공작가 사람들은 꺼림칙하게 생각하면서도 나를 위해 내색하지 않은 건가? 그들은 아무도 밤이가 검은색이라는 것을 입에 담지 않았었다.
‘나를 배려했던 걸 수도.’
나는 뭐라고 변명이라도 하려 했으나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시리우스와 가장 자주 보고 가까이서 지내는 헬리오스니까 밤이가 시리우스와 연관됐다는 것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며칠 전에 봤던 시리우스가 헬리오스를 꺼렸던 것이 기억나 일단 모르는 척했다.
“네. 공작가 근처에 버려져서 제가 키우고 있어요. 그런데 황…… 음, 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
주제를 바꾸려고 했는데 헬리오스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이상하게 불러버렸다!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내 입은 왜 이리도 순발력이 없을까.
“태를 묵음처리 한다고 단어의 뜻이 달라지진 않을걸. 그냥 리오라고 불러. 이 차림일 땐 그렇게 불리거든.”
헬리오스는 갈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따로 불리는 이름까지 만들었다니. 한두 번 변장하고 나온 솜씨가 아니었다. 어쨌든 여기서 헬리오스를 만난 것은 예상외였으나 그뿐, 나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촉박한 마당에 그와 수다나 떨 시간은 더더욱 없었고.
“그렇군요. 저는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뭐하냐고 물어 놓고 대답도 안 듣고 가는 건가?”
“변장까지 하고 오셨으니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요.”
“비밀로 할 정도는 아닌데.”
헬리오스는 나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느 부분에서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을까.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삼키고 싱긋 웃었다.
“굳이 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바쁘거든요.”
“너는 뭐 때문에 바쁘지?”
그러나 헬리오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더니 흥미로운 목소리로 내게 질척였다. 젠장.
“사야 할 게 있어서요.”
“그거 궁금하군. 나도 같이 가도 될까?”
“여자 액세서리 살 거예요. 궁금증이 해결됐죠? 그럼 전 이만.”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 1순위가 나를 따라오겠다니, 너무 끔찍했다. 헬리오스라면 정말 따라올 것 같아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는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내가 더 빨랐다. 격식 차린 인사는 생략하고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 돌아서서 도망쳤다!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다.’
나는 일부러 사람이 많은 쪽으로 갔다. 인파 속으로 숨어들면 헬리오스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
‘이게 웬 고생이야.’
시계탑을 보니 벌써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아직 물건 하나 못 봤는데!
되는 일이 없네. 나는 아까 삼켰던 한숨까지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유랑단의 악기 소리와 구경꾼의 함성이 섞여 들렸다.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걷다 보니 광장까지 온 것이다.
‘아, 액세서리 종류는 그쪽에 밖에 없을 텐데.’
광장 쪽을 넘어가면 대부분 먹거리를 파는 곳이다. 잡화류 노점상은 내가 있었던 그 구역밖에 없었다.
없겠지? 없겠지! 헬리오스도 할 일이 있어서 왔을 텐데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바보처럼 왜 솔직히 말했을까. 역시 내 입이 문제야.’
막상 바로 돌아가려니 헬리오스가 있을 것만 같아서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 없지만 헬리오스와 더 이상 부딪히고 싶지 않아서 광장 구석으로 갔다. 계속 밤이를 안고 있었더니 팔도 아프고 공작가에서 쉬지 않고 걸었더니 다리도 아팠기 때문이다. 바닥에 밤이를 내려놓고 나도 쪼그려 앉았다.
“밤아 이제 없겠지?”
“머엉. 멍!”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밤이는 나를 향해 열심히 짖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헬리오스가 나타났을 때도 이렇게 짖었던 거 같은…….
“힉!”
“찾았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깜짝 놀라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뱉었는데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헬리오스였다.
“나랑 숨바꼭질이 하고 싶었던 거야?”
“아니거든요!”
참아야 한다는 이성보다 울컥 솟아난 짜증이 먼저 반응했다. 나는 3초 후에 내 행동을 후회했다. 망했어. 여기서 망했다는 건 헬리오스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었다.
“풉, 그렇게 싫었어? 왠지 도망가니까 잡고 싶어져서. 곤란하게 했다면 사과하지.”
하나도 안 미안한 얼굴로 사과하는 헬리오스였다. 웃음을 꾹 참은 얼굴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름방학 숙제로 곤충관찰을 하는 초등학생처럼.
그래. 내가 이토록 헬리오스를 피한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재밌는 것을 좋아한다. 신기한 것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변태잖아.
‘노선을 잘못 탔어. 차라리 간신처럼 아부나 할걸.’
그는 황후의 자식이고, 황태자라는 신분 탓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자라면서 주위에서 보내는 사랑이 자신의 신분이나 외모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고, 인간불신에 빠진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거나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 아부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반대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녀석.’
그의 성격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부를 떨지 않았냐면 내게 호기심을 보일 거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따지자면 쌍둥이에게서 시작된 호기심이 나에게 넘어온 것 같지만.
‘당연히 엑스트라답게 인사만 하고 엮일 일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있는 둥 없는 둥 스쳐 지나갈 테니 적당히 예의만 지키면 될 거라 생각했었다. 너무 안일한 판단이었다.
“이번엔 무시인가?”
“그럴 리가요. 어째서 리오 님이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 되어 잠시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헬리오스의 얼굴을 보면 자꾸 빈정거리고 싶어진다.
내가 빈정거릴수록 더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헬리오스의 웃는 낯은 왠지 사람 신경을 긁는 부분이 있었다.
“님을 붙이면 평민 아닌 티가 나잖아. 세르니아는 정말 응용력이 없군.”
‘너한테 지적받고 싶지 않거든!’
후, 참자. 반응할수록 헬리오스가 재밌어 할 것이다. 더 이상 관심은 사양이었기에 나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밤이를 안아 들었다.
“나와 또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 건가?”
“아니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요. 따라오시든지 마시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따돌리는 것이 무리라면 도망가 봤자 시간 낭비였다. 엮이고 싶지 않아 피했는데 그럴수록 호기심을 자극한 꼴이었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이 나이 먹고 숨바꼭질 타령이라니.’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데이지를 만난다면 그의 이상한 호기심도 끝나리라. 나는 잡화 노점상이 있는 곳으로 걸었고, 헬리오스도 따라왔다.
“누구에게 선물할 거야?”
“친구요.”
비꼬거나 빈정거릴수록 헬리오스가 재밌어하기 때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친구도 있었어?”
“네.”
또 사람 신경을 긁네.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네 옆에 늘 붙어있는 쌍둥이가 극성이잖아. 그런데도 다가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니까.”
헬리오스는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전달 됐다고 생각했는지 긴 변명을 덧붙였다. 우리 쌍둥이보다 네 친구인 그렌드윈이 더 심하던데, 하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말해 뭐하리. 내 입만 아프겠지.
“괜찮습니다.”
“음.”
내 단답에 처음으로 헬리오스가 난감해했다. 물론 내가 헬리오스보다 앞에 가고 있어서 그의 표정을 못 봤지만. 뭐, 헬리오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조급한 마음에 빠르게 걸었지만 앞에 가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 때문에 좀처럼 빨리 갈 수가 없었다.
“아!”
반대 방향에서 다가오는 건장한 남자가 내 어깨를 치고 갔다. 피하려고 했으나 밤이까지 안고 있는 상태라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기울어지는 몸을 비틀어 밤이가 다치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다가올 충격에 대비해 눈을 꼭 감았는데 차가운 흙바닥 대신 내 허리를 단단하게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실례.”
뒤에서 따라오던 헬리오스였다.
그는 내가 균형을 잡고 똑바로 서자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나를 품 안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아직 성장기의 소년이었으나 나보다 키가 커서인지 내 몸은 헬리오스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별로 안 고마워 보이는데.”
살짝 올려다본 그의 갈색 눈동자엔 여전히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햇빛을 받은 결 좋은 머리카락은 평범한 색임에도 특별해 보였다. 누가 남주인공 아니랄까 봐 하는 짓마저 설렐 법한 행동이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지금 헬리오스에게 반했을 것이다.
“안 잡아 주셨으면 저도, 이 아이도 다쳤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순순히 감사 인사를 했다. 어쨌든 도움받은 것은 사실이니. 딱히 헬리오스의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라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어깨를 감싼 헬리오스는 풀어줄 생각이 없는지 어깨동무를 한 채 이동했다.
노점상에 가까워질 무렵 머리 위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피식하고 웃은 거야? 와. 역시 로맨스 소설 남주. 피식하고 웃다니. 오글거렸지만 헬리오스의 얼굴은 오글거림을 상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