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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니아는 정말 솔직하군. 그래서 재밌어.”
“세상엔 저보다 재밌는 사람이 더 많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헬리오스의 품에서 나왔다. 사람은 아직 많았으나 헬리오스의 품에서 쇼핑을 하기엔 불편했기에. 내가 나가려고 하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나는 실없는 생각을 가볍게 넘기고 가까운 노점상에 펼쳐진 좌판부터 둘러봤다.
“액세서리를 산다고 했지? 나도 같이 골라줄게.”
“제가 알아서 고를게요.”
단호하게 거절했으나 내 칼 같은 거절에도 헬리오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좌판에 깔린 액세서리를 추천했다.
“이건 어때? 노점상에서 파는 것 치곤 좋은 보석이 박혀있군.”
“아이고, 형씨 보는 눈이 있구먼! 이건 브릴리언 왕국에서 들어온 보석이라네.”
헬리오스는 푸른색 보석을 가리켰다. 바다를 닮은 푸른 보석은 확실히 상인의 말대로 좋아 보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색이 아니라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제가 원하는 색이 아니네요.”
카나린보단 벨라에게 어울릴 법한 목걸이였다.
좌판에 깔린 다른 물건들을 훑어봤으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이왕이면 붉은색이나 주황색이 좋은데.
“근데 이런 노점상에서 산 물건도 괜찮나?”
“괜찮아요. 뭘 주더라도 제 선물이라면 좋아할 거예요.”
옆으로 넘어가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있던 헬리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귀족일 텐데 이런 싸구려를 선물로 줘도 괜찮냐는 뜻이겠지. 나쁜 의도로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기분 상하진 않았다.
그가 봤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사치에 돈을 아끼지 않고, 몸에 걸치는 것이 자신의 위치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으니.
‘카나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녀라면 길 가다가 주운 돌멩이를 주더라도 좋아할 것이다. 내가 줬다는 것에 의미를 둘 것이기에. 그건 쌍둥이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내 주위엔 물질적인 가치보다 물건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부럽군.”
헬리오스가 작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끄러운 소음에 금세 묻혔으나 바로 옆에 있던 나에겐 분명히 들렸다. 부럽다고. 헬리오스는 좌판을 보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친구가 있잖아요.”
“나는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렌도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그렌드윈을 가리켜 말하자 오히려 그가 반문했다. 나는 당연히 소꿉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유신’에서도 그렌드윈은 헬리오스를 진심으로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데이지를 포기한다.
“불안하면 직접 물어보면 되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
지금 여기에 있는 헬리오스에겐 닿지 않는 그렌드윈의 속마음이었다. 데이지와 헬리오스의 행복한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그렌드윈은 오직 독자에게만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렸었다.
서브 병이 있는 내가 그렌드윈에게 반한 장면이었으므로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헬리오스는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렌드윈이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물어보라고?”
“네.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으니까요.”
내가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으니.
좌판에 고정됐던 시선이 내게 옮겨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주 본 얼굴엔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웃고 있으나 살짝 찡그려진 눈썹과 미세하게 떨리는 입꼬리는 감추고 싶어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솔직한 심정 같았다.
“…….”
“괜찮아요. 만약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때부터 새로 만들어 가면 돼요.”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관계의 형태가 있다. 그것은 한없이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때론 단순했다. 인생 2회차인 나도 인간관계는 아직 어렵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관계는 시작하지 않으면 절대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공작이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도 삼촌과 대화하면서 알게 됐지.’
단절되었던 관계가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연결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충동적으로 공작을 찾아가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쉽게, 말하는군.”
아랫입술 사이에서 짓이기듯 나온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전혀 묻어있지 않았다. 언제나 능글맞은 헬리오스에게 여유가 사라져있었다.
‘으음, 여기도 끌리는 건 없네.’
세 번째 노점상에서도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었다. 나는 좌판을 이동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어요. 저도 어려웠던 사람이 있었어요. 좀 먼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용기를 가지고 대화를 하다 보니 점점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저는 그 사람과 대화해서 다행이라 생각해요. 헬리오스 님도 용기를 가지고 다가가 보세요. 어쩌면 상대방도 같은 마음일 수 있어요.”
내 경험을 이야기했다. 헬리오스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는 만큼 그 관계를 형성하는데도 다양한 방법이 존재한다. 어쩌면 말하지 않고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확률은 정말 희박하겠지. 나는 그저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알려줬을 뿐이었다. 선택은 헬리오스의 몫이었다.
“넌…… 정말 이상해.”
복잡해 보이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길게 뜸 들이던 헬리오스는 허공을 응시하다 얕은 한숨을 내쉬고 허탈하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 소리를 했나? 그래도 한결 가벼워진 그의 얼굴을 보니 알아서 잘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칭찬은 아니라고. 그리고 나는 리오다.”
평소의 여유가 돌아왔는지 자신을 리오라 칭한 헬리오스는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리오에 더럽게 집착하네. 나는 그를 무시하고 노점상에 깔린 물건을 훑어봤다.
‘으음, 핑크색이 제일 나은데. 핑크색으로 사줄까.’
이 부분이 마음에 들면 저 부분이 마음에 안 들고, 저 부분이 마음에 들면 이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집은 분홍색 귀걸이도 디자인은 예뻤으나 원래 사려고 했던 색이 아니라서 머뭇거려졌다. 내가 고민하고 있었는데 얌전하게 안겨있던 밤이가 격하게 움직였다.
“어?”
“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좌판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헬리오스의 손이 나에게 향했고, 나보다 먼저 반응한 밤이가 손을 덥석 문 것이다!
밤이가 누구를 문 것은 처음이라 놀라서 굳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밤이의 입을 잡았다.
“밤아, 물면 안 돼!”
“멍!”
내 제지에 밤이는 입을 벌렸다. 풀려난 헬리오스의 손은 이 자국이 약간 남긴 했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피 났으면 황족의 몸에 상처 냈다고 사형당하는 거 아니야?’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헬리오스의 눈치를 봤다.
내가 헬리오스를 막 대하긴 했으나 적당한 선을 지켰는데 지금은 확실하게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밤이가 했지만, 신분이 깡패인 세계이므로 당장 목이 날아갈지도 몰랐다.
‘아니야. 그래도 아르덴타인이니까 봐줄지도.’
나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빨개진 손을 살폈다. 한 손으로 밤이를 안고, 왼손으로 헬리오스의 손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아니, 이상하게 더듬은 게 아니라 혹여 살이라도 까지진 않았을까 걱정됐기에.
‘살도 안 까졌고, 피도 안 나타났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소독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파상풍 주사가 있을 것 같진 않으니 사제를 불러야 하나? 이세계에 항생제는 있었는지 고민하며 물린 부분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는데 헬리오스의 몸이 살짝 떨렸다.
“따가운가요?”
“흠, 아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허세는.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떻게 소독해야 할지 다시 고민했다. 아프지 않더라도 잇자국이 나면 병균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오늘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의원이나 사제에게 꼭 상처를 보여주고 치료받으셔야 합니다.”
“너도 은근히 극성이군.”
이 녀석이 2차 감염의 무서움을 모르네.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갈색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을 소중히 여기나 보군. 내가 갑자기 손을 뻗은 잘못도 있으니 이건 서로 잘못한 걸로 하자.”
이번엔 대인배 같은 면모를 보여주며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밤이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으나 어쩐지 탐탁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무사히 넘겨서 다행이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자 그의 손을 살폈던 왼손을 잡았다.
“잠깐 실례하지.”
헬리오스는 씨익 웃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얼떨결에 따라가면서도 목적지가 궁금해서 물었다.
“어디가요?”
“아까 봐둔 물건이 있었거든.”
그에게 끌려서 도착한 곳은 광장과 가까운 노점상이었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지루해 보이는 노인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물건을 팔려는 의지가 없는지 우리가 구경하는데도 하품만 했다.
“이건 어때?”
주인의 인상을 살피고 있었는데 헬리오스가 내 눈앞에 불쑥 물건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워서 안 보이는데요.”
“자!”
헬리오스는 들고 있던 물건을 내 손에 쥐여줘다.
붉은 리본에 오렌지색 보석이 달린 머리핀이었다. 빨강도 파랑도 초록도 아닌 오렌지색 보석은 정말 찾기 힘들었었다.
“드디어 찾았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정말 얼마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분홍색 귀걸이를 사려고 했었는데. 붉은 리본 중간에 금테로 세공된 오렌지 색 보석이 장식된 머리핀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얼른 값을 계산했다.
노점상치고는 비싼 가격이었으나 생각했던 예산을 크게 초과하지 않아서 그냥 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물건을 샀습니다.”
“감사하면 다음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헬리오스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황족은 호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거야?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어감만 좀 다를 뿐 빚졌다고 원하는 걸 내놓으라던 시리우스와 닮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잊고 있던 시리우스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데! 나는 되살아나는 촉감을 떨쳐내며 황급히 말했다.
“어,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좋아. 쉬운 걸로.”
아, 급한 마음에 말을 더듬어 벼렸다. 그러나 헬리오스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내 말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왠지 함정에 빠진 느낌인데. 나는 찝찝했으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공작가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