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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28화 (2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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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시간을 조금 초과해서 공작가에 도착했다. 첼시는 팔짱을 끼고 초조한 기색으로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평민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걱정 어린 잔소리를 쏟아냈다. 다음부턴 혼자 다니지 않기로 약속한 후에야 파티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가씨가 방에 안 계셔서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제가 제일 먼저 알아차려 망정이었죠!”

“고마워. 삼촌이나 쌍둥이가 알았으면 한바탕 뒤집어졌겠지?”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최근 다른 시녀들의 시중은 물리고 첼시만 뒀었는데 신의 한 수였다. 첼시는 내 물음에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야 하니 다른 시녀들도 도와주기로 했어요. 괜찮으시죠?”

“응. 내가 늦었는걸. 고마워.”

첼시는 내가 오면 바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욕실과 의상에 시녀를 대기시켜 놓았다. 유능한 첼시! 나는 시녀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그녀들의 마사지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피곤할 만도 했다.

“아가씨 지금 잠드시면 안 됩니다.”

눈이 반쯤 감기자 옆에서 지휘를 하던 첼시가 나를 깨웠다.

너무 노곤해서 잠들 뻔했다. 빛의 속도로 목욕을 마친 시녀들은 준비된 드레스를 가져왔다.

“예쁘다.”

“아리엘 아가씨의 취향이 듬뿍 들어갔네요.”

티파티 때 설명했다시피 드레스는 아리엘과 디자이너가 의논해서 제작되므로 나는 지금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화려한 크리놀린 드레스는 연분홍색 레이스를 겹겹이 겹쳐 놓아 피어나는 작약 같아 보였다.

“근데 너무 화려하지 않아? 이런 건 아리에게 어울리는데.”

“아가씨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실 거예요. 일단 시간 없으니까 입으면서 머리도 같이 만지겠습니다.”

한쪽에선 물기 묻은 머리카락을 말렸고, 한쪽은 드레스 단추를 채웠다. 나 때문에 바빠진 그녀들에게 미안했다. 나중에 데인에게 보너스를 부탁해봐야겠다.

“언니 아직 준비 중이세요?”

“응. 내가 늦장 부렸더니 벌써 이런 시간이네.”

준비를 마친 아리엘이 내 방으로 놀러 왔다. 화장까지 끝내고 장신구를 고르는 타이밍에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이 드레스엔 루비가 어울려요.”

“그럼 그걸로.”

옆에서 보던 아리엘이 고른 물방울 모양의 루비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했다.

드디어 끝! 나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무사히 준비를 마쳐준 시녀들에게 감사하며 아리엘과 로비로 이동했다. 로비엔 공작과 에리얼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정성 들여 준비하다 보니 오래 걸렸네요.”

“그건 뭐지?”

예상대로 공작은 내 손에 들린 상자가 뭔지 물었다.

“친구에게 줄 선물이에요.”

“친구? 제이페인 백작의 딸인가.”

“네. 카나린이라고 저번에 공작가에도 놀러 온 적 있어요.”

그땐 용서를 구하러 온 거지만.

무언가를 가늠하는지 게슴츠레 한 녹안이 상자에 고정됐다. 말없이 한참이나 선물을 노려보던 공작을 말린 사람은 아리엘이었다.

“아버지, 우선 마차에 타서 이야기하죠. 파티에 늦을지도 몰라요.”

“그래.”

휴, 리엘이 최고.

나는 에리얼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황궁을 향해 출발했다. 충격 흡수 마법이라든가 온도조절 마법으로 떡칠 된 승차감 좋은 마차는 부드럽게 거리를 달렸다. 나는 창문 너머 노랗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 약속을 잊진 않으셨죠? 오늘은 꼭 저랑 첫 춤을 춰야 합니다!”

“걱정 마. 기억하고 있어.”

황태자 탄신연회 때는 공작과 첫 춤을 췄고, 가볍게 열린 쌍둥이의 생일 파티 때 아리엘과 첫 춤을 췄었다. 에리얼은 이번엔 무조건 자신의 차례라며 건국제 한 달 전부터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었다. 나는 에리얼을 안심시키고 있었는데 물끄러미 지켜보던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선물을 줄 정도로 친해진 건가?”

“네? 네. 그럼요! 카나랑은 절친이에요.”

나는 웃어 보이며 카나린과 친분을 강조했다. 혹시 제이페인 백작의 이미지 때문에 공작이 카나린을 안 좋게 생각할까 봐 걱정됐기에. 백작은 마음에 안 들지만 카나린은 백작과 달랐다.

공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선물과 나를 번갈아 봤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지 읽을 수 없어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가만있으면 반은 가겠지.

‘잘 됐다. 애칭을 지어준 보답으로 주는 선물이라 하면 되겠어.’

입을 다문 공작을 마주 보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 카나린에게 선물을 주는 이유를 따로 정해두지 않았었는데 절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애칭을 지어줬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나에게 애칭을 지어줬고, 애칭의 중요성을 알려줬기에.

제이페인 백작가에서 돌아온 날. 나는 쌍둥이의 애칭을 고민했다.

솔직히 마음속으로 리엘이 리얼이 하고 자주 불렀으나 애칭으로 삼기에는 망설여졌었다. 나중에 쌍둥이와 결혼할 사람들이나 친해진 친구들도 불러야 하는데 내 마음속 애칭은 약간 강아지 애칭 같은 느낌이어서.

‘카나처럼 뜻 있는 애칭을 붙여주고 싶었고.’

결국 고민 고민하다가 엘과 아리라고 했다.

뒤쪽이 아닌 앞쪽을 따서, L과 R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왼쪽과 오른쪽은 대비 되면서도 한 쌍이었기에 쌍둥이에게 잘 어울리는 애칭이라 생각했다. 다만 아리엘을 알이라 부르기엔 남자 애칭처럼 들려서 아리로 순화시켰지만. 어쨌든 쌍둥이는 만족했는지 내가 지어준 애칭을 좋아했다.

‘그리고 카나가 지어준 내 애칭을 들려줬더니 또 질투했지만.’

그래도 쌍둥이에게 애칭을 지어준 이후로 카나린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이 줄었었다. 그들도 내가 진심으로 카나린을 친구로 생각한다는 것을 느낀 거겠지.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시종에게 안내받아 걷다가 입장하기 전에 지나가던 시녀에게 선물 보관을 부탁했다. 들고 있기엔 너무 짐이었고, 불편했기에 나중에 시리우스를 만나기 전에 다시 찾을 계획이었다.

“아르덴타인 공작님과 아리엘 영애 입장하십니다!”

오늘도 우렁찬 시종이 우리의 등장을 알렸다.

아리엘과 공작이 먼저 입장하고 나와 에리얼이 뒤에 들어갔다. 좌중을 압도하는 공작님의 포스가 엄청나서 우리가 입장하자 일시적으로 파티장이 조용해졌다.

‘이 시선은 익숙해지지 않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집중되는 것은 아직 부담스러웠다.

내 떨림을 알아차린 에리얼은 에스코트를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의 진녹색 눈동자는 안정감을 줬다. 나도 괜찮다는 얼굴로 웃었다.

이어서 다른 귀족들이 입장했고 쏠렸던 이목이 분산되자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아르덴타인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화사한 금발을 깔끔하게 넘긴 미중년이 다가왔다. 그의 옆엔 그렌드윈과 벨라도 함께 있었다. 어쩜 저렇게 붕어빵인지.

“카일렌 후작. 무사 귀환을 축하하네.”

“하하. 단순한 외교 분쟁이었는걸요.”

카일렌 후작은 외교 대신이라 작년에 생긴 외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브릴리언 왕국에 방문했었다. 예정보다 의견 조율 기간이 길어져서 올해 겨우 협상을 마치고 건국제에 맞추어 돌아왔다고 한다.

‘아리가 눈을 빛내며 말했었지.’

외교에 관심이 많은 아리엘이 자주 언급했기에 정치에 관심 없는 나도 카일렌 후작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인생 멘토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카일렌 후작이 인사하자 옆에 있던 아리엘의 얼굴이 상기됐다. 눈을 빛내며 한마디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팬의 얼굴!

“인사해라. 카일렌 후작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리엘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아리엘의 마음을 읽었는지 공작은 후작에게 아리엘을 소개했다.

들뜬 마음을 누르고 침착한 얼굴로 인사하는 아리엘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쟤들은 왜 저렇게 보는 걸까.’

카일렌 남매는 나를 향해 열렬한 눈빛을 보냈다.

내가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자 벨라는 붉어진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을 쏙 빼닮으셨군요.”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아리엘의 인사를 받았다.

확실히 공작보다 눈꼬리가 새초롬하게 올라가긴 했으나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닮았다. 쌍둥이지만 에리얼은 좀 순한 분위기였고.

“저는 에리얼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에리얼까지 인사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후작의 시선은 나에게 향했다.

세 쌍의 하늘색 눈동자가 내게 모였다. 세 쌍의 초록색 눈동자도. 하하. 부담스러워.

‘이쪽은 적발, 저쪽은 금발. 나만 동동 뜨네.’

친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이들 사이에서 나만 외부인처럼 보였다. 처음 보면 에리얼의 약혼자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황태자 탄신연회 전까지 사교계 활동은 물론이고, 대외 활동이나 인맥 쌓기 등 외부로 얼굴을 보이는 일이 일절 없었는데 이상한 소문이 생겼었다. 그 소문조차도 황태자의 입으로 듣고 나서 알게 됐었고.

‘공작가의 숨겨놓은 보물이라니. 나를 지칭하는 소문일 거라 생각도 못 했는데.’

어디서 시작된 소문인지 모르겠으나 사교계에선 유명했는지,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소문의 전체 내용이 궁금했지만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물어봐도 다들 어물쩍 넘어갔다.

낮에 헬리오스에게 소문에 관해 물어볼걸.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며 아리엘처럼 치마를 살짝 올려 차분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후작의 한마디에 옆에 있던 벨라가 황급히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대체 뭐라고 했기에. 욕……은 아니겠지?

“아니에요! 저는 그러니까…… 세르니아 님과 만난 이야기만…….”

“그래요. 세르니아 양과 첫 만남 이야기만 5번 들었습니다. 무슨 로맨스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지만 내용은 전혀 흘릴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벨라에게 나와 첫 만남이 그렇게 강렬했나? 내가 도와준 것은 맞지만 쌍둥이도 같이 있었고, 로맨스 소설에 비유할 만큼 낭만적이지도 않은데.

벨라는 후작의 소매를 뜯을 듯이 잡아당겼고, 후작은 딸을 놀리는 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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