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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29화 (2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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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벨라와 후작을 번갈아 보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렌드윈이 내 고민을 가볍게 날렸다.

“오랜만입니다. 세르니아 님, 오늘 춤 신청을 해도 될까요?”

“안 돼. 오늘 누님은 나와 첫 춤을 추기로 했다.”

에리얼이 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그렌드윈을 제지했다.

“그래. 첫 춤은 너랑 추고, 나는 두 번째 춤을 신청하지.”

“안 돼! 두 번째 춤은, 음, 아리가 출 거야!”

우리 리얼이의 말발은 언제쯤 늘려나.

뭐, 저것도 귀엽지만. 지켜보던 아리엘은 얕은 한숨을 뱉었고, 후작의 소매를 뜯고 있던 벨라는 그렌드윈을 살짝 밀치며 들어왔다.

“그럼 아리엘 님 다음엔 제가 신청해도 되나요?”

“어?”

에리얼은 당황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허락해야 할지 말지 자신도 헷갈리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고민했다.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자비를 베푸는 말투로 ‘너는 허락한다.’ 하고 말했다.

‘아니, 왜 네가 허락하냐고.’

내 춤 신청을 나 빼고 정하는 어이없는 상황에 태클을 걸려고 했는데 아쉽게 입장을 알리는 시종이 내 말을 막았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황태자님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외침에 홀은 고요해졌다.

오늘은 황후도 있는 건가? 나는 황후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으나 예법에 맞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영광, 태양의 후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건국제는 처음이었지만 황태자 탄신연회와 비슷한 순서로 흘러갔다. 신년을 맞이해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덕담이 이어졌고, 짧은 연설 끝에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 앉았다.

“황후가 아직 건강이 회복하지 못해 시작을 여는 춤은 황태자가 대신한다.”

제국의 건국제이니 당연히 주인공은 황제!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첫 춤도 당연히 황제가 춰야 하나 황후의 건강이 안 좋아 황태자에게 넘겼다. 뭐, 황태자가 미래의 황제이니 상관은 없겠지만.

다만 탄신연회와 달리 황태자가 파트너를 정할 때까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벨라와 출 거라 생각하며 한쪽으로 밀어뒀던 황후에 대한 호기심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황후는 원작에서도 손에 꼽히게 등장한다.’

아리엘에게 저주를 알려주는 장면과 황태자와 약혼하기 전 데이지와 황궁에서 차를 같이 마시는 장면에서 딱 두 번, 시리우스의 저주에 대해 이야기할 땐 대사 속에서 언급됐을 뿐 직접 등장하진 않았다. 심지어 에리얼의 반란에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었다.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걸까.’

마음속에 황후가 흑막일지 모른다는 가설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나는 황후를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헛되이 날리고 싶지 않았다.

‘뭐지?’

고개를 들어 황후를 보려고 했으나 헬리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잠깐 마주쳤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서히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닐 거야.’

나는 애써 내 옆에 있는 아리엘이나 벨라를 향해 오는 거라고 합리화했다.

“세르니아. 쉬운 부탁 하나만 하지.”

아, 망했다.

헬리오스는 ‘부탁’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의도는 뻔했다. 내 특기는 내 무덤을 파는 걸까? 무의식적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하마터면 황태자의 춤 권유에 한숨을 쉴 뻔했다.

“나와 첫 춤을 추겠나?”

“네. 영광입니다.”

거부권도 없으면서 질문은 왜 하는 건데.

나는 이를 악물고 영광이라 대답했다. 내가 일어서자 에리얼의 진득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윽, 에리얼이 몇 번이나 당부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어서 가슴이 아팠다.

‘이게 다 내 탓이지.’

내가 헬리오스의 손을 잡자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왈츠곡이 잔잔하게 흘렀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귀족들이 일어섰다.

“왜 하필 접니까?”

나는 스텝을 밟으며 헬리오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내 물음에 헬리오스는 피식 웃었다.

“재밌어서.”

재밌어서라니. 그런 무책임한 말을! 에리얼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대했는데!

나는 춤에 집중하지 못했다. 헬리오스의 손을 잡고 왈츠를 추고 있으면서도 에리얼을 찾았다. 뭐라고 사과해야 하지? 실망이 이만저만 아닐 텐데.

‘방금 마주친…….’

빙글빙글 돌면서 순간적으로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루비를 닮았다는 붉은 눈동자는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뱀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꾹.

갑자기 황후와 눈이 마주쳐서 놀란 나머지 헬리오스의 발을 밟았다.

이런. 나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내 풍성한 드레스에 가려져서 다른 귀족들의 눈엔 안 보였겠지?

“저번에도 느꼈지만 세르니아는 정말 춤을 못 추는군.”

장난스러운 얼굴은 낮과 똑같았으나 샹들리에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은발을 보고 있으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맹금류 같은 금안이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반짝였다.

“그러니 다음부턴 저에게 춤 신청하지 마세요.”

“싫은데.”

능글맞게 웃은 헬리오스는 왈츠가 끝나자 내 손등에 쪽 하는 소리를 내며 과장되게 입을 맞췄다. 나는 소름 돋는 행동에 부르르 떨었으나 그는 오히려 내 반응에 유쾌하게 웃었다.

‘역시 내가 싫어하는 거 알고 일부러 한 행동이군.’

첫 춤은 무사히 끝났지만 뒷수습이 문제였다.

황태자를 노려보는 공작과 황태자 때문에 약속이 틀어져서 슬퍼하는 에리얼, 표정이 구겨진 아리엘과 벨라.

‘한숨이 절로 나오네.’

헬리오스와 내가 홀 중앙에서 물러서자 새로운 곡이 시작됐고, 귀족들이 차례로 나와 춤을 췄다. 화려한 드레스가 만개하는 꽃송이처럼 나부끼는 아름다운 장면이 이어졌지만 나는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을 달래야 했다.

“저기, 그러니까…….”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의외로 벨라가 부루퉁한 얼굴을 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헬리오스 님은 언제나 제멋대로예요! 순서가 있었는데 치사하게 새치기를 하다니.”

“동감이야!”

아리엘이 벨라에게 동의하자 순식간에 단결해선 헬리오스를 욕하기 시작했다.

에리얼도 맞장구치며 자신은 한 달 전부터 한 약속이었다며 서러워했다.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벨라와 아리엘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상황이 조금 진정됐다. 쌍둥이와 벨라가 쿵짝이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언제 친해지신 겁니까?”

그렌드윈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

평소랑 똑같은 목소리가 약간 퉁명스럽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

차마 낮에 만난 이야기는 못 하겠고.

내가 곤란해하자 그렌드윈의 무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비밀이면 말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어느 부분이 친해 보이는 걸까. 아무리 봐도 일방적으로 놀림당하는 관계인데. 나는 그렌드윈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니 비밀까진 아니고, 그보다 저는 황태자님이랑 안 친한걸요.”

“그럼 저와 헬리오스 님 중에 누구랑 더 친합니까?”

“둘 중에요?”

둘 다 안 친한데. 굳이 고르라 해도 거기서 거기라.

차라리 벨라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예의상 그렌드윈이라고 했다. 그렌드윈의 딱딱한 얼굴 위에 희미하게 미소가 생겼다.

“역시 그렇죠? 벨라의 귀여움을 아시는 세르니아 님이라면 저를 선택할 거라 믿었습니다.”

벨라의 귀여움을 아는 것과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무슨 관계일지 고민하다가 덕질 친구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유추했다.

‘혼자 내적 친목을 다지는 것 같더니.’

나는 그렌드윈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봤다.

벨라가 귀여운 것은 사실이니까 참는다. 넓은 마음으로 그렌드윈을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얕은 한숨을 쉬고 사라진 공작을 찾았다. 황태자가 춤을 권유했을 때 약간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었는데. 넓은 파티장엔 사람이 북적거렸으나 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귀족들도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공작은 카일렌 후작과 다른 왕국에서 온 사절단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주위에 많은 귀족들이 말을 걸고 싶으면서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일정 거리 떨어져 있었기에 동물원의 동물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사절단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한동안은 붙잡혀 있겠네. 나는 옆에 있는 쌍둥이를 힐끔 봤다. 쌍둥이와 벨라는 평안한 얼굴로 주어가 생략된 욕을 하고 있었다. 파티장을 훑어보던 중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또다.’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헬리오스와 춤추고 있었기에 잠시 스치듯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 한참이나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황태자와 첫 춤을 췄기 때문인가?’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해서 그렇지, 사실 헬리오스와 춤을 추고 난 후부터 귀족들이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공작이 나를 아낀다 하더라도 직계가 아니라서 그들에게 경계대상이나 인맥을 쌓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가벼운 사교계의 가십거리였을 대상이 뜬금없이 황태자와 춤을 췄으니 아닌 척하고 있어도 수면 밑에선 보이지 않는 눈치싸움이 시작됐으리라.

나는 황후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는 황태자를 낳은 친모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젊어 보였다. 그 기묘한 젊음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삼촌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카일렌 후작과 비교했을 때, 황후도 이상할 만큼 젊다.’

공작은 소드마스터라서 평범한 인간보다 오래 살고, 천천히 늙는다고 했다. 그에 비해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카일렌 후작은 동년배들 사이에선 동안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생긴 잔주름은 피할 수 없었다. 황후는 공작과 비슷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

‘어쩌면 마법사일지도.’

생명을 대가로 하는 저주 방법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벼운 저주조차도 대부분 사람들은 모르는데, 금기시될 정도로 위험한 저주를 아는 사람은 마탑의 마법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것이다.

‘권력과 재력으로 구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는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수정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었으나 충분히 가능성 있었기에.

떠들썩한 파티장 속에서 이어진 눈싸움은 의외로 먼저 시선을 돌린 황후에 의해 끝났다.

‘정말 그냥 본…… 음?’

황후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는데 내 시야에 열심히 팔을 흔드는 카나린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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