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카나린은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으며 입을 벙긋거렸다.
‘파티? 말을 걸어? 뭐라는 거지?’
그녀는 내가 무언가를 전하고 싶은지 계속 벙긋거렸으나 나는 알아들을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이 전달되지 않아 답답했는지 카나린은 손가락으로 테라스를 가리켰다. 따라오라는 건가.
“잠깐 쉬고 올게.”
“누님 같이 갈까요?”
“아니야. 카나랑 잠시 할 이야기가 있어서.”
테라스로 간다는 말에 쌍둥이가 반응했으나 카나린에게 선물 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오진 않았다. 나는 홀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에게 내 이름을 대며 맡긴 물건을 찾아 홀 앞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일단 카나에게 줄 선물은 내가 들고 있지만.’
속이려고 마음먹었다면 철저하게!
시녀는 알겠다며 홀을 나갔고, 나는 카나린이 들어간 테라스로 향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테라스로 나오자 기온이 확 떨어졌다. 드레스는 노출 없이 꼼꼼히 피부를 가렸으나 얇은 실크라서 보온기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테라스에도 온도조절 아티팩트 좀 설치했으면 좋겠다.’
아무리 돈이 많은 황실이라도 그건 너무 사치겠지.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카나린을 불렀다.
“카나! 추운데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니에요?”
“숄 가져오는 걸 깜빡했어요.”
차가운 공기 때문에 코끝이 발갛게 물든 카나린을 보자 뭐라고 벗어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는 게 함정이지만.
“아까 뭐라고 했어요? 못 알아들어서 미안해요. 답답했죠?”
“아니에요! 그냥, 저는 사교계에서 평판이 안 좋으니까 혹시라도 안에서 말 걸면 니아에게 안 좋은 소문 생길까 봐 걱정돼서…….”
카나린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말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는 차가워진 카나린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마요. 저는 사교계 평판은 신경 안 쓰는걸요. 아! 카나에게 줄 거 있었는데 잘됐네요.”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준비했던 선물을 꺼냈다. 싸구려 갈색 종이에 흰 리본으로 묶여 있는 상자와 내가 손수 구운 쿠키도 함께!
“제 애칭 지어줘서 고마워요. 별 건 아니지만. 작게나마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 준비했어요!”
드레스 주머니 안에 넣어놨던 쿠키는 살짝 부서져 있어서 건네려다가 멈칫했다.
“아…….”
“왜 그래요?”
“쿠키가 부러졌어요. 열심히 만들었는데.”
하트모양의 쿠키가 반으로 뚝, 갈라져 있었다. 하필 하트가 반으로…….
내가 선뜻 건네지 않자 카나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가 들고 있는 것을 내려다봤다.
“니아가 직접 만들었어요?”
“네, 그런데 부서져 버렸네요. 쿠키는 내가 다음에…….”
“괜찮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직접 만든 쿠키라니.”
카나린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들고 있던 선물과 쿠키를 냉큼 가져갔다. 그녀는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으로 아껴먹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다음에 또 구워 줄 테니까 얼른 먹어요. 오래 놔두면 상해서 못 먹을걸요?”
“먹기 아까운데…… 정말 또 구워 줄 거예요?”
“그럼요!”
카나린은 아깝다고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내 재촉에 조심스럽게 쿠키 포장지를 풀었다. 평범한 버터 쿠키였다. 원래는 유모가 쌍둥이에게 종종 해주던 쿠키였으나 저주 미수 사건 이후 유모가 공작가에 나가게 되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울적해하던 쌍둥이를 위해 굽기 시작했었다.
“맛있다!”
“정말? 다행이에요. 선물도 어서 풀어 봐요.”
다람쥐처럼 쿠키를 오물오물 다 먹은 카나린은 조심스럽게 하얀 리본을 풀었다.
시간이 없어서 내가 따로 포장하지 못해 초라해 보였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와…… 예쁘다. 내가 받기에 너무 과분해요.”
카나린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과분하다니. 노점에서 산 건데. 그녀는 유독 자신에 대한 가치가 낮았다. 아마 백작가에서 눈치 보고 자랐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녀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싶었다.
“싼 거지만, 카나에게 내 용돈 모아서 내가 직접 고른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감동 받은 카나린이 머리핀을 보며 울먹였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살짝 문질렀다. 울면 화장 번진다는 가벼운 농담과 함께.
“바로 해도 될까요?”
“네.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랑 잘 어울리겠는데요!”
카나린은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백작이 의상실에서 비싸게 주문했는지 과한 장식이 여기저기 달려있었으나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어떠한 장식품 하나 달려있지 않았다.
“제가 해줄게요.”
챙겨주는 시녀가 없어서 헤어와 메이크업은 언제나 스스로 한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만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만져주고 싶었다. 나는 캐러멜처럼 달콤해 보이는 카나린의 머리카락을 땋았다. 두 갈래로 나눠서 위쪽 일부분만 땋아 반 묶음 하듯이 머리카락을 교차시켰고, 교차한 부분에 내가 선물한 머리핀을 꽂아 단단하게 고정했다. 일명 엘프 머리!
“잘 어울려요! 완전 예쁜데요?”
“고마워요.”
카나린을 부끄러운지 어깨에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말했다.
드레스가 빨간색이라 더 잘 어울렸다.
“카나는 따뜻한 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다음에 만날 때도 하고 올 거죠?”
“물론이…… 어?”
나는 익숙지 않은 구두에 발이 아파서 테라스 난간에 살짝 기대앉았다. 다음에 볼 때도 하고 오라며 장난스럽게 말했는데 쑥스럽게 웃던 그녀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나?
“저 뭐 묻었어요?”
“아니요, 니아 뒤에.”
뒤에? 나는 카나린의 말대로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난간 뒤엔 허공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은 하얀 새가 있었다. 이질적일 만큼 새하얀 새는 느릿하게 날개를 펄럭이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새가 아니야.’
나는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새를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얼굴이 없었다. 눈도 코도 없고 부리도 하얀 그것은 새의 형태를 한 다른 것이었다.
“종이?”
카나린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종이처럼 보였다.
나는 근처를 맴도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궁 안에서 종이로 나를 위협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어렴풋이 예상가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새는 내 손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촤라락 하고 원래의 형태도 없이 펴졌다. 손에 잡히는 것은 하얀 종이 한 장. 이런 마법을 할 사람은 내 주위에 딱 한 명뿐이었다. 시리우스. 안 그래도 어떻게 만날지 고민했었는데 잘 됐다.
‘편지를 이렇게 보낼 줄을 상상도 못 했지만.’
마법으로 편지를 보내라고 한 사람은 나였으나 단순하게 텔레포트 마법을 생각했었지 어떤 마법인지 짐작도 안 갈 만큼 어려운 마법으로 보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감정이 없는 시리우스가 나보다 감수성 풍부하게 느껴졌다.
“대체 뭐예요?”
“편지네요.”
카나린도 이런 마법을 처음 보는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대답하면서 확신이 없었다. 이걸 편지라고 해야 할까? 안부는 물론이고 인사 한마디도 적혀 있지 않은 종이는 편지라기보단 쪽지에 가까웠다.
‘연못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달랑 한 줄.
매끄럽게 기울어진 글씨체는 그의 기다란 손가락같이 유려했다. 오늘 만나서 편지 쓰는 기본 형식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날씨도 추운데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요.”
카나린과 나는 파티홀로 들어왔다. 파티장은 적당히 무르익어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했다.
“신년에 평안이 깃들기를.”
카나린이 내게 말했다. 나도 웃으며 그녀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제국식 ‘새해 복 많이 받아’였다. 헤어질 때 건네는 인사로, 한해를 무탈히 보내라는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
나는 카나린과 헤어지고 일부러 사람이 많은 쪽으로 이동했다.
쌍둥이 몰래 나가야 했으므로.
‘잡히면 못 빠져나가니까.’
다행히 파티장을 가득 채운 귀족들로 인해 나는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속에 숨기라는 말이 딱 맞았다. 나는 살금살금 홀 밖으로 나갔다. 문 근처에 선물 상자를 들고 있는 시녀가 대기하고 있었다.
“고마워.”
시녀는 고개를 꾸벅이고 자신의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나는 상자를 들고 후원으로 나갔다.
많이 생략된 편지였으나 시리우스가 말하는 ‘연못’은 내가 빠졌던 그곳이겠지. 서늘한 바람에 몸을 떨며 빠르게 걸었다. 선물 상자를 풀어 시리우스의 겉옷을 걸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후, 황궁에서 여기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었을 뿐인데 숨이 가빴다. 내 쓰레기 체력은 한결같았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한 박자 쉬고 시리우스에게 인사를 했다.
“잘 지냈어요?”
“네. 세르니아 님을 만날 기대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습니다.”
연못 앞에 서 있던 시리우스는 내 인사에 부드럽게 웃으며 낯간지러운 말을 했다. 나는 과한 시리우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어째서 나를 구했을까.
‘정의감 넘치는 그렌드윈이었으면 이해했을 텐데.’
정의감은커녕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시리우스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내게 묘하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쌍둥이가 하는 집착은 부모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집착. 그렇다면 시리우스는?
“왜 그러십니까.”
내가 말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시리우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왜 나를 만나고 싶었냐고? 아니면 왜 나에게 접근하는지? 나는 복잡한 문제에 답을 찾지 못하고 주제를 바꾸는 것을 선택했다.
“저번에 방문하셨을 때 잊고 가신 물건이에요.”
내가 선물 상자를 건네자 그는 웃으며 선물을 풀었다.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도 추우니 걸치고 있으세요. 이건?”
상자에는 시리우스의 겉옷과 반투명한 종이로 포장한 쿠키를 넣었었다. 시리우스는 쿠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카나린에게 줄 것을 만들면서 시리우스의 것도 같이 만들었다. 내가 추울까 봐 벗어줬으니 고맙기도 했고, 선물 포장했는데 겉옷만 달랑 넣기도 애매해서.
“쿠키에요. 친구에게 주는 김에 시리우스 님 것도 같이 만들었어요.”
“직접…… 만드신 겁니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