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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렌드윈은 덕질 친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고, 헬리오스는 놀리는 맛이 나는 사람 정도의 취급이었으나 카나린이나 벨라는 꽤나 나를 좋아했다. 단순히 내가 그녀들을 도왔기 때문일까?
‘특히 시리우스.’
고민의 시발점이자 최대의 난제.
당시에는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으나 아무리 고민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진심으로 내게 정령친화력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정령친화력 검사까지 받기도 했었다! 물론 꽝이었지만.
눈동자의 색이 변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자신의 감정을 자각했다는 뜻. 납득이 가지 않는 것과 별개로 시리우스는 맹목적으로 나에게 집착하겠지. ‘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잘생기긴 했지만…….’
얼굴이 잘생겼고, 퇴폐미 다음으로 좋아하는 병약미를 풍겼으나 내겐 그저 잘생긴 애였다! 하는 짓이 꼭 선생님한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기다려’ 하고 명령하면 말 잘 듣는 강아지 같기도 했고.
‘그런 모습이 귀엽지만 연애대상은 아니야.’
아카데미에 입학하면 2년은 안 만나니까 어쩌면 그동안 감정이 식을 수도 있다!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어두운 후원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분홍색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다. 각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대사도 함께.
‘또 무덤을 팠구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시리우스랑 엮이면 자꾸 이불킥하게 된다. 로맨틱은 개뿔, 오글거려서. 나는 애써 시리우스를 머리에서 지웠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으나 철벽 치는 건 잘하니까 평소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합리화했다.
‘일단 시리우스는 제쳐놓자.’
나는 두꺼운 책을 덮으며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최근에 서재에서 살다시피 하며 책만 봤더니 시력이 떨어진 것 같다. 나는 옅은 한숨을 쉬고 낡은 수첩을 꺼냈다. ‘신유신 정리 노트’라고 한글로 적혀 있는 수첩을.
등장인물의 성격과 특정 에피소드 등 기억하고 있던 것을 시간순으로 정리했었다. 오랜만에 이 노트를 꺼낸 이유는 다가오는 입학식 때문이었다. 이 세계는 수첩에 적혀 있는 세계와 달랐다.
내가 죽지 않으므로 많은 것이 비틀렸다. 아리엘은 헬리오스를 사랑하지 않았고 카나린도 자존감을 회복하며 조연 악역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벨라의 첫 친구도 데이지여야 했으나 내가 됐다.
‘헬리오스나 그렌드윈은 그대로인가?’
나는 책상 위에 배치된 깃펜을 들었다. 검은 잉크를 살짝 찍어 하얀 종이에 변해버린 관계를 정리했다. 혹시라도 발생할 변수를 위해서였다.
애초에 내 목표는 내 죽음을 피하고, 쌍둥이를 개화시켜 공작가의 멸문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표를 이미 이뤘다. 현재 에리얼의 성격상 데이지에게 반하더라도 반란이라는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바뀌어 버린 상황에서 데이지가 등장하면 어떻게 변할지 짐작이 가진 않으나 그녀 자체가 선한 인물이니 나쁘게 변하진 않을 것이다.
‘황후만 견제하면 되려나.’
똑똑똑.
“아가씨, 아리엘 아가씨 수업이 끝났습니다.”
“알려줘서 고마워.”
서재 문밖에서 첼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잉크가 마르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뭐 하고 있어?”
“어머, 언니 빨리 오셨네요. 쓰레기 정리하고 있었어요.”
아리엘의 방으로 갔더니 그녀는 아주 시원하게 종이를 찢고 있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종이는 한두 장이 아닌지 테이블 위에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아리엘은 상큼하게 웃으며 시녀에게 치우라고 명령했다.
‘눈이 웃고 있지 않아.’
그녀가 찢고 있는 종이의 원래 형태는 편지였을 것이다.
건국제가 끝나고 내게 쏟아지는 혼담이 적혀 있는 편지. 귀족 영애의 결혼 적령기는 18세부터 20세 사이다. 지금 내 나이는 열여덟. 공작가의 사촌이고 황태자와 친분이 있어 보였기 때문인지 제국 방방곡곡에서 약혼제의나 혼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어중간한 남자들에게!
처음 들어보는 가문이 대부분이고 이름 있는 백작가에서도 혼담이 몇몇 들어왔으나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가문을 승계하지 못하는 차남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랑 결혼하냐. 거기다 시집가면 어떤 취급 받을지 딱 보이는데.’
공작가와 연결될 끈 정도로 취급하겠지.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결혼 생각이 없었다. 나는 한적하게 살고 싶다. 결혼이란 단어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쌍둥이가 나 데리고 산다고 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내가 찢어진 종이들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시녀들은 능숙하게 테이블을 정리하고 찻잔과 간단한 디저트를 준비했다.
“언니?”
“아, 종이들이 아까워서 난로 장작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봤어.”
“공작가에는 난로가 없는데요.”
온도조절 아티팩트로 인해 난로를 사용하지 않았다. 재활용도 안 되는 편지네. 나는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다음 주에 벌써 아카데미 입학식이네!”
나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른 주제를 꺼냈다. 내가 하루 종일 고민하던 원작 시작과 데이지의 등장. 이왕이면 아리엘이랑 데이지가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네요. 벌써 시간이…….”
활기찬 내 목소리라 달리 아리엘은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었나? 아리엘은 2년 동안 나와 떨어지는 것이 불만인지 처음엔 자신도 아카데미에 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나도 안 갔으니 자기도 안 가겠다며.
‘달래느라 힘들었어.’
교육기관치고는 짧았으나 교육의 질은 제국 최고였다. 뭐,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학생은 손에 꼽지만. 대부분 인맥 쌓는 목적으로 입학했다. 아카데미를 빙자한 예비 사교계와 예비 정치판!
나야 더 공부할 생각도 없었고, 사교활동이나 정치 활동을 할 생각도 없었기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러나 아리엘은 정치와 외교 활동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아카데미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배워왔으면 했다.
“준비는 다 해가?”
“네. 부피가 큰 짐은 미리 아카데미로 붙여놨어요.”
“잘했네!”
밝게 웃으며 칭찬을 했더니 그녀도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었다.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검술 연습을 마치고 달려온 에리얼에게 씻고 오라며 아리엘이 눈살을 찌푸린 헤프닝을 빼면 평범한 하루였다.
역시 나는 일상이 좋았다. 원작이 시작되고 운명같이 필연적인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이 평화는 변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다.
***
아침이 밝았다.
어제와 똑같은 아침이었으나 공작가의 일꾼들은 어제보다 바빴다. 오늘 쌍둥이가 아카데미로 떠나기 때문이다.
“언니 피곤하시면 쉬어도 괜찮아요.”
“아니야. 나 원래 아침잠 많잖아. 잠이 덜 깨서 그래.”
나는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카데미는 제국의 남쪽에 있다. 수도에서 아카데미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육로로 이동하는 것과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 육로로 이동할 경우 한 달 정도 걸린다.
그러나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하루면 된다. 29일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 보이지만 이용금액이 전혀 착하지 않아서 웬만한 귀족들도 쉽사리 이용하지 못한다.
‘삼촌은 허락하셨고.’
다이아몬드 수저 아니랄까 봐 텔레포트 게이트 비용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번 탈 때 수도의 집 한 채 값이라는데 나도 같이 가서 무려 왕복 비용이 든다!
“누님, 저희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아카데미는 학생만 출입이 가능하니까……. 윽.”
아리엘이 에리얼의 발을 꾹 밟았다.
응. 활기차네. 나는 아파하는 에리얼을 신경 쓰지 않고 긴 하품을 늘어뜨리며 마차에 올랐다.
“알고 있어. 그래도 아카데미 앞까지 배웅하고 싶은걸.”
“언니…….”
“누님…….”
아카데미는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당연하게도 입학식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고 싶었다. 약간 다른 사심이 있다면 데이지를 보고 싶다는 것. 쌍둥이가 새삼 감동이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양심이 살짝 찔렸다.
‘아니 사심은 아주 약간이고 어쨌든 쌍둥이 배웅을 위해 가는 건 맞으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혼자만의 변명을 내뱉었다.
쌍둥이가 올라타고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공작은 배웅을 나오지 않았다. 하필 오늘 귀족 회의가 있어서 이른 아침에 황궁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인사는 다 했으니.’
저녁 식사 중에 의외로 공작이 먼저 쌍둥이에게 아카데미에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여전히 주어, 목적어를 잘라먹은 말이었으나 쌍둥이와 나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나름대로 쌍둥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언니 제게 기대서 눈 좀 붙이세요.”
멍하니 어제 저녁 식사를 떠올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졸려 보였는지 아리엘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듬직한 그녀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내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높이를 맞춰줬다.
푹신한 의자와 익숙한 아리엘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 안정감이 찾아왔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나보다 쌍둥이가 더 크겠지.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으니.
‘아, 서로가 있으니까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구나.’
쌍둥이는 이럴 때 좋네. 나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들었다.
***
“언니 도착했어요.”
얼마나 잤지?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내 몸을 흔들었다.
몸 이곳저곳이 찌뿌둥한 것을 보니 오래 잠들었나 보다. 나는 기지개를 쭈욱 펴며 창밖을 봤다. 마차는 아직 달리고 있었으나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이색적으로 변해있었다.
“벌써 텔레포트 게이트 탔어?”
“네. 이제 곧 아카데미 도착이에요.”
텔레포트 게이트에서 아카데미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남쪽은 기후가 따뜻하고 무역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수도보다 건물에 생기가 넘쳤다.
“알록달록하네.”
“바닷바람에 건물이 자주 상해서, 고칠 때 색도 다시 칠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색을 자주 바꿀 수 있어서 다양한 색으로 칠한다는 거구나. 역시 아리는 똑똑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