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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엘의 설명이 끝나자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에리얼이 먼저 내려서 나와 아리엘의 손을 잡아줬다. 마차에서 내리자 희미한 바다 향기가 느껴졌다.
“엄청 크다! 황궁보다 더 큰 것 같아.”
“많은 학생을 수용해야 하니 비슷하지 않을까요?”
에리얼도 설레는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웅장한 아카데미 입구를 보자 가슴이 뭉클해졌다.
‘길었어.’
정말 길었다. 소설의 시작까지 오는 데 18년이나 걸렸다.
드디어 시작점에 도달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미래가 걱정이라 해야 할지.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숨기고 쌍둥이를 불렀다.
“입학식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마을 구경하자!”
“좋아요.”
“밥부터 먹죠!”
예상보다 일찍 도착해서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활기가 넘치는 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도착해서 바로 헤어지면 아쉽기도 했고.
“저기가 유명하다고 해요.”
아리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점심시간 전인데도 북적이는 가게였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세 명이에요.”
“편하신 자리 앉으시고 주문하실 때 불러주세요.”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녀가 메뉴판을 건넸다. 주로 평민들이나 상인들이 오는 식당인지 우리가 들어오자 식사를 하면서도 힐끔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딱 봐도 귀족 같아 보여서 조심하는 눈치였지만.
“해산물이 들어간 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해요.”
오. 해산물 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하니 데이지가 좋아해서 단골이 됐다는 가게가 생각났다. 가게 이름까지 자세히 나오진 않았으나 가게에서 식사를 하다가 헬리오스와 마주치는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정보는 누구에게 들은 거야?”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다들 너처럼 생각 안 하고 행동하진 않거든.”
에리얼은 처음 온 곳임에도 맛집에 대한 정보가 있는 아리엘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나는 재빠르게 메뉴판을 훑었다. 가게에 들어오기 전엔 그다지 배가 안 고팠으나 맛있는 냄새를 맡고 있으니 군침이 돌았다.
“생각보다 종류가 다양하네.”
“나는 미트 스파게티!”
해산물이 유명하다는 가게에서 꿋꿋이 육류를 시키는 에리얼을 한심하게 쳐다본 아리엘은 봉골레 파스타를 시켰고, 나는 고민하다가 가게 이름이 적혀있는 시그니처 메뉴를 시켰다.
‘파란색 눈동자?’
메뉴를 정하고 점원을 부르려는데 로브를 입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로브를 푹 눌러쓰며 시선을 회피했다. 잠깐 스쳤지만 푸른 바다를 닮은 눈동자는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아니겠지?’
데이지라면 로브가 아니라 교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쌍둥이처럼.
로브를 입은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주문 안 하냐는 아리엘의 재촉에 정신을 차렸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요?”
“음, 착각했나 봐.”
그래. 착각이겠지. 파란 눈동자만으로 데이지라고 단정 짓기엔 부족했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내며 다가온 점원에게 주문을 마쳤다.
‘사라졌어?’
주문을 마치고 로브를 입은 사람이 앉아 있는 곳을 쳐다봤는데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그냥 다 먹어서 일어난 거겠지. 눈이 마주치고 당황해서 자리를 떴다 하기엔 집요하리만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었다.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음식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가 먹음직스러워서 로브를 입은 사람에 대한 찝찝함은 순식간에 잊혔다.
쌍둥이도 눈을 빛내며 포크를 들었다.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 전투적으로 먹었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
“진짜 맛있었다.”
“미트 스파게티는 보통이었어요.”
“그러게 내가 해산물로 먹으랬잖아.”
우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나왔다. 식사 때 못한 대화를 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마을 시장도 구경했고, 광장을 지나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카데미에 가까워질수록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잘 다녀와. 편지 쓰고.”
“네. 매일 편지 쓸게요.”
“저도요!”
“아니야. 매일은 말고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씩만 써.”
옆에 있던 학생들이 우리를 보고 속닥이며 지나갔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뿐인데 마치 평생 못 만날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이상하게 쳐다볼 만도 했다. 나는 살짝 부끄러웠으나 헛기침을 하고 쌍둥이를 한 번에 끌어안았다.
“건강하게 지내.”
이제 양팔로 끌어안기 힘들 정도로 자랐다. 그 모습이 대견하기도 해서 왈칵 눈물 흘릴 뻔했다. 이것이 자식을 초등학교에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
우리는 아카데미 입구에서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이제 정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됐다. 나는 계속 뒤돌아보는 쌍둥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나도 슬슬 돌아가자.’
시원섭섭한 마음을 털어내며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꺄르르 웃으며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니 내 캠퍼스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과제랑 시험만 빼면 좋았지. 4학년 때는 실습에 시험에 과제 폭탄이라 죽을 맛이었지만.
“이번에 신입생 대표가 헬리오스 님이라며.”
“그분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다니. 너무 설레.”
추억에 잠겨있던 나는 들려오는 대화 내용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평범한 소녀들의 대화였으나 내용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나는 다짜고짜 지나가는 학생을 잡아서 물어볼 뻔했다.
‘신입생 대표는 데이지였는데?’
일반적으로 고위 귀족이나 황족은 입학시험을 치지 않으나 호기심이 왕성한 헬리오스는 아카데미 입학시험으로 어떤 문제가 출제되는지 궁금해서 평민 행세를 하고 시험을 응시한다. 그것이 데이지와 헬리오스의 첫 만남.
시험에 응시한 헬리오스는 자신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데이지를 궁금해했다. 입학식 연설을 마치고 헬리오스가 데이지에게 말을 거는데 데이지는 그가 황태자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경계한다.
헬리오스는 신선한 반응을 보이는 데이지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운명처럼 얽히며 점점 스며들어 사랑으로 변하는 성장 로맨스 스토리였는데!
‘헬리오스가 신입생 대표라는 것은 입학시험에 데이지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는 거잖아.’
이건 내가 살아있는 거랑 상관없지 않나?
데이지가 공부 안 한 거니까. 아니 성실한 데이지가 공부를 안 할 리가 없는데. 내적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빠르게 되돌아갔으나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들은 안 보였다. 어쩌지.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직접 아카데미에 들어갈 순 없고, 쌍둥이는 이미 들어갔다.
‘입학식이 시작했는지 돌아다니는 학생도 없어.’
방금까지만 해도 복작거리던 입구가 한산했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입구를 지키는 경비병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세르니아 누님?”
입구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괴상한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렌드윈 님?”
“익숙한 뒷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르니아 누님이셨군요.”
서브 남주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그렌드윈은 성인 남성이라 해도 믿을 건장한 체격으로 내게 다가왔다. 교복이 아니라 기사단 제복을 입어도 전혀 위화감 없을 모습!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렌드윈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내게 내려진 동아줄 같았다.
“그렌드윈 님, 입학식 시작했을 텐데 안 들어가고 뭐 해요?”
급하긴 했으나 입학식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 있다는 것은 그에게도 다른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내 물음에 그렌드윈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입학식이 지루해서 몰래 나왔습니다.”
“땡땡이를 쳤다고요?”
의외였다. 아무리 봐도 고지식, 보수적, 성실 그 자체인데 땡땡이라니.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안 바쁘시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어요?”
“쌍둥이를 불러와 드릴까요?”
솔깃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쌍둥이라면 내가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들어주겠지만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급할 뿐.
“입학시험 순위가 중앙 게시판에 걸려있을 건데 거기에 데이지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이 몇 등 했는지 알아 와 주실 수 있나요?”
“입학시험 순위요?”
데이지를 찾겠다고 아카데미를 전부 뒤지는 것은 시간 낭비에 인력 낭비다. 내게 중요한 건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데이지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입학시험 순위를 보는 것이다.
‘데이지는 자작 가문이기 때문에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무조건 입학시험을 쳐야 한다.’
물론 고위 귀족의 추천제도 있으나 그런 방법을 사용했다면 사교계에 소문이 돌았어야 했다. 추천할 수 있는 고위 귀족도 드물고 추천 학생은 한 해에 한 명 나올까 할 정도로 희귀하기에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사교계가 놓칠 리 없었다.
“네.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간절한 눈으로 그렌드윈을 쳐다봤다. 그는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더니 커다란 손을 내 머리에 얹었다.
“뭐, 뭐 하시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초조함을 느꼈을까. 그렌드윈은 수정처럼 맑은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안심시켰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스러웠으나 머리를 덮은 커다란 손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렌드윈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나는 차분해진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렌드윈도 내 웃음에 화답하듯 살짝 입꼬리를 올리더니 금방 다녀오겠다며 말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렌드윈을 보며 심호흡을 했다. 불안하고 초조하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근데 여기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있나?’
만약 데이지가 수석을 못 했다면 원작과 틀어진다. 헬리오스와 접점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헬리오스와 접점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이상했다.
‘이미 원작과 다른 내용이 되어버렸으니 굳이 원작 내용을 따라갈 필요도 없었고.’
내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나. 그러나 데이지가 신입생 대표가 아니라는 말을 듣자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