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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데이지가 입학을 안 했다면?’
나는 팔짱을 끼고 조그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가만히 있기엔 진정이 되지 않아서.
“세르니아 누님.”
방금 들어갔던 그렌드윈의 목소리였다. 중앙 게시판이 입구랑 가까웠나? 나는 정신 차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뛰어갔다 왔는지 지친 기색은 없었지만 머리가 바람에 날려 마구잡이로 뻗쳐있었다.
“그렌드윈님, 어떻게 됐어요? 몇 등이었나요?”
다급하게 재촉하자, 그렌드윈은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무슨 뜻이지? 이해가 안 돼서 재차 물으려고 했는데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이름은 없었습니다.”
“이름이…… 없다고요?”
나는 그렌드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정말 입학을 안 했다고? 대체 왜?
원작이랑 상관없이 귀족들이라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데이지의 부모님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데이지를 공부시켜 아카데미로 보낸 것이었다.
“세르니아 누님, 괜찮으십니까? 얼굴빛이 좋지 않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찌푸려지려는 미간을 피고 입꼬리만 겨우 올렸다. 억지 미소였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웃음이었다. 그렌드윈은 내 어깨를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지가 입학하지 않아 원작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더라도 실질적으로 내게 피해는 없으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 맞았다. 다만 찝찝했다.
“제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하늘색 눈동자에 걱정이 어려 있었다. 역시 그의 눈은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었다. 나는 데이지에 관한 고민을 그만뒀다. 그녀가 입학하지 않아 행방이 묘연했으나 내가 걱정한다고 바뀌는 일은 없었다.
나는 새삼 그렌드윈에게 감동받았다. 귀찮을 수 있는 부탁에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선뜻 들어줬기에.
‘덕질 친구를 위해서 이유도 묻지 않고 달려갔다 오다니 역시 의리파야.’
나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렌드윈의 금발을 정리해줬다. 오. 나보다 머릿결 좋은데. 부드러운 금발은 내가 살짝만 손대로 차분해졌다. 꼼꼼하게 정리를 마치고 그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이유도 묻지 않고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면 제가 오늘 그렌드윈 님에게 했던 부탁을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
그렌드윈은 침묵했다.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었던 건가. 나는 대답 없는 그렌드윈의 눈치를 봤다.
‘입이 무거운 캐릭터였는데? 생각해보니 실제로 만난 그렌드윈은 내 이미지 속의 그렌드윈보다 수다스러웠던 거 같기도 하고.’
어려우면 비밀로 안 해도 된다 말하려고 했는데 그렌드윈이 한 박자 늦게 뒤로 물러섰다. 뭔데. 내가 뭐 잘못했는데.
“아, 그, 죄송합니다.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정말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머리카락 정리해 준 거뿐이지만 그럴 수 있지. 그렌드윈은 여동생 바보니까 다른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함부로 손대서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벨에게 하듯이 제게도 편하게 말해주세요.”
반말하라는 건가. 차마 나보다 연상으로 보여서 편하게 말하기 부담스럽다고 할 순 없었다. 시리우스나 헬리오스는 덩치나 하는 짓이 딱 청소년 같은데 그렌드윈은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풍겨서 성인처럼 느껴지게 했다. 키도 190cm는 가뿐히 넘어 보이고.
“그래.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했다. 할 말이 없을 땐 화제 돌리기가 최고지.
그렌드윈의 딱딱하던 눈매가 사르르 접혔다. 돌로 만든 조각상 같던 얼굴이 처음으로 웃었다. 언제나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더니. 한낮의 햇살을 듬뿍 머금은 금발이 절묘하게 빛나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별말씀을요.”
그의 웃는 얼굴을 보게 될 줄이야. 나는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하다가 민망해서 헛기침을 했다.
“흠, 아카데미 입학 축하해. 그럼 이만.”
“잠시만요.”
데이지에 대한 것도 일단락됐고, 감사의 인사도 두 번이나 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학을 축하한다고 말하고 헤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부름에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오늘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쌍둥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렌드윈이 웃음기는 사라졌지만 생기가 감도는 얼굴로 말했다. 쌍둥이에게도 비밀로 하겠다며 신뢰감을 주는 발언도 덧붙였다.
“믿을게.”
“세르니아 누님,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렌드윈은 절도 있게 인사를 하고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나도 다시 마차 대기소로 향했다. 아카데미는 마을과 떨어져 있어서 조금 걸어야 했다. 넓은 부지를 차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곽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길은 잘 닦여 불편한 점은 없었다. 다만 학생을 제외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기에 고요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덩그러니 있는 길이라 스산했으나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입학식에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에 대하여.
‘모른다고 달라질 게 있나? 내가 너무 소설에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
확실히 내가 읽었던 ‘신유신’과 내가 있는 세계는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소설과 비교하며 저 캐릭터는 이런 캐릭터이고 이 상황은 이 에피소드라는 편견에 사로잡혔다.
‘아니면 전제가 잘못된 건가?’
내가 살아서 원작이 비틀어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원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슈욱!
갑자기 단검이 날아와 발밑에 박혔다. 생각에 잠겨 걷고 있다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검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확인이 안 됐다.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나는 애써 두려움을 누르며 주위를 둘러봤다. 신경을 집중하자 희미한 바람 소리가 계속 들렸다. 길 쪽이 아니라 주변의 숲속에서.
‘나를 노린 게 아닌가?’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리던 평화로운 풍경이 단검 한 자루에 순식간에 격변했다. 그냥 걸을 땐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목격자가 있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나무에서 내려왔다.
고저 없이 건조한 목소리는 나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여라.”
대답은 건너편 나무에서 흘러나왔다.
위험했다. 이들은 진짜 암살자다. 머리로 인지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치마를 말아 쥐고 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암살자가 훨씬 빨랐다. 그는 명령이 떨어지자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다가왔다. 날카로운 단검을 들고.
“운디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맑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외치자 내 앞에 투명한 물의 막 같은 게 생겨났다.
“미꾸라지가 정체를 드러냈군.”
암살자는 자신의 검이 막혔음에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먹잇감을 몰아넣은 사자처럼 행동했다. 그는 백스텝을 하며 거리를 확보했고, 물의 막이 사라지자 갈색 로브를 입은 사람이 내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낮에 음식점에서 봤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도망가세요.”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으나 나무에서 나타난 복면인들로 인해 퇴로가 막혀 불가능했다. 언뜻 봐도 열 명이 넘어 보이는 복면인들은 우리를 포위하고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다프네, 나의 부름에 응답하라!”
푸른빛이 일렁였다. 생소하지만 단번에 정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의 정령을 다루고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라면 한 명밖에 없어.’
하지만 데이지라고 하기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성숙해 보였다. 내가 로브를 입은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도 상황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소환한 물의 정령은 거대한 물회오리를 여러 개 만들었고, 사방으로 둘러쌌던 복면인들은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거리를 벌렸다.
“이틈이에요. 어서 도망가세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력이 없는 나는 있어봤자 방해밖에 안됐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없는 편이 그녀가 움직이기 편하리라.
“감사합니다.”
나는 아카데미 쪽으로 달렸다.
복면인들은 잠깐 주춤했으나 금방 체계를 잡고 움직였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지 한 명만 나를 쫓아왔고, 나머지는 로브를 입은 여자를 둘러쌌다.
나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잡히면 정말 끝이었다.
불편한 구두를 신고 달려서 뒤꿈치가 까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가 후들거려도 멈출 수가 없었다.
‘움직여! 제발 움직여!’
무서워서 뒤도 못 보고 달렸으나 결국 체력의 한계가 찾아왔다. 앞으로 가려는 마음과 달리 지친 육체는 기우뚱거리며 넘어졌다.
“헉, 헉.”
폐가 아팠다. 뇌까지 산소가 닿지 않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통 없이 죽여주지.”
암살자는 자비를 베푼 것처럼 말했다. 은색의 금속이 내 목을 노리고 다가왔다. 무력함에 눈물이 났다. 내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다가올 고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컥!”
그런데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어떻게 된 거지? 괴상한 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뜨려고 했는데 뭔가 내게 닿았다. 화들짝 놀랐으나 느껴지는 것은 차가운 단검이 아니라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시리우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태양을 등지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시리우스는 하얀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과 땀으로 지저분해진 내 얼굴을 닦아줬다. 그는 내가 진정할 수 있도록 천천히 얼굴을 닦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많이 아프십니까?”
시리우스는 피가 나는 내 다리를 보며 물었다. 넘어질 때 다리가 쓸렸는지 스타킹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있었으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삼켜져 고통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교복을 찢어 내 다리에 감쌌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상처를 지혈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