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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사람은 난데 왜 그렇게 아픈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어쩜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정말 흑기사 같은 등장이었다. 내 질문에 시리우스는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
“입학식 날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아. 그거 약속이었었나?
나는 건국제 때 만나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보다 질문에서 미묘하게 빗겨 난 답이었다. 나는 어떻게 왔냐고 물었는데. 물끄러미 시리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질문에 대한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하얀 새.’
그의 머리 위에 하얀 새가 있었다. 내가 손을 뻗자 사뿐히 내려앉더니 원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아카데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전히 편지라기엔 애매한 쪽지였다.
그래도 이 편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었을 것이다. 시리우스가 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나를 노리던 암살자가 떠올랐다.
‘암살자는 어떻게 됐지?’
비명은 들었지만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색이었다. 붉은 액체의 웅덩이가 있었다. 그리고 내 시야는 암흑에 덮였다.
“눈에 담기 잔인한 장면입니다.”
시리우스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어떤 상태인지 봤다. 시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짓이겨진 덩어리들이 퍼져있는 것을. 19금 공포영화로 면역을 쌓지 않았더라면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
‘자체 모자이크라도 됐으면 좋았을 텐데.’
시력이 좋은 게 이럴 땐 불편하구나. 전생에는 난시가 심해서 보름달이 6개로 보이곤 했었는데. 상황에 맞지 않은 태평한 생각을 하다가 비릿한 냄새가 훅 풍겨왔다.
‘피 냄새가…….’
시각을 가려서 후각이 더욱 예민해졌다. 나는 시리우스의 손을 떼며 고개를 원래 방향으로 돌렸다. 시리우스는 내 시선이 시체 쪽에 닿지 않자 얌전히 손을 거두었다. 나는 가라앉은 호흡을 정리하며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다. 또 시리우스가 나를 구해줬다.
그는 내 감사 인사에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줬다. 후원에서 감사 인사를 했을 땐 빚을 졌다고 했는데.
“살아계셔서 다행입니다. 세르니아 님, 안아드릴까요?”
두 번째는 능글맞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다리가 풀려 일어서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무릎을 꿇은 채로.
‘온도 차 너무 심하잖아.’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것을 시리우스도 알고 있었기에 이런 장난을 치는 거겠지. 공작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안기는 것은 처음이라 어디에 손을 올려야 할지 망설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기다렸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시리우스의 목에 양팔을 살며시 감았다. 어깨보단 목을 잡는 게 더 안정감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그는 느릿하게 나를 안아 들었다. 내 등을 단단하게 받치고 다리의 상처에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해서 감싸더니 단숨에 일어섰다.
호리호리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적당히 잔근육이 있어서 나를 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마법사는 왠지 체력이 약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시리우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아이처럼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의 신발 밑을 적시는 붉은 액체와 대조되어 괴리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껄끄러운 마음을 감추며 시리우스에게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지 부탁하려고 했는데 잊고 있던 존재를 깨달았다.
‘데이지!’
데이지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어쨌든 그녀 혼자 복면을 쓴 암살자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분명 벅찰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분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힘이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뿐이라서.
“시리우스 님…… 부탁이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더럽히는 일이라서.
“세르니아 님이 원하신다면.”
시리우스의 목을 감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한심해.’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에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런데도 간사하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을 적실 붉은색이 점점 커질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괜찮습니다. 저를 마음껏 휘두르셔도.”
내 망설임을 읽은 시리우스가 말했다. 나는 차마 그의 눈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얼굴의 시리우스의 가슴에 묻고 작게 웅얼거렸다.
“근처에 저를 도와준 분이 있어요. 그녀를 구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에게 안겨있었으나 중력이 사라지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기에 날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원한 바람을 맞자 답답하던 속이 좀 풀렸다. 살짝 고개를 들자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벌써 이런 시간인가.
“저기군요.”
기울어진 태양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는데 시리우스가 천천히 하강했다. 그가 말한 방향을 봤더니 검은 복면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갈색 로브가 보였다.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어. 하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지쳤는지 움직임이 둔해졌고, 암살자들은 숫자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뒤쪽에서 두 명의 복면인이 접근했다. 나는 위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알았지만 지친 그녀는 앞에서 몰아치는 암살자들을 상대하기 바빠서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지 위험해요!”
나는 다급한 상황에 그녀를 데이지라 불렀다. 내 목소리에 반응한 그녀는 뒤가 아니라 위를 봤다. 파란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황급하게 한 번 더 말했다.
“뒤쪽……!”
그러나 늦었다. 그녀가 내게 시선을 뺏긴 사이 암살자들이 기습했다.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허공에 있는 것도 잊고 팔을 뻗었다. 시리우스가 나를 단단히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기울어진 몸은 떨어졌으리라.
“걱정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시리우스는 교복 재킷을 벗어서 머리 위에 덮어줬다. 나는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재킷을 내리려고 했는데 시리우스가 꾸욱 누르며 말했다.
“금방 끝낼 테니. 벗지 말고 기다리세요.”
시리리우스는 나를 공중에 내려놨다. 그의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떠 있었다. 나는 그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죽이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하지만 이것조차 내 욕심이었다. 시리우스의 손에 피를 묻힌 내가 조금이나마 그 책임을 가볍게 하려는 욕심.
‘강해지고 싶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누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머릿속으로 자책하고 있는 사이 서서히 몸이 하강했다. 이것도 시리우스의 마법이겠지. 나는 재킷을 내려도 되는 건가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조심스럽게 재킷을 벗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끝났습니다.”
정말 순식간에 끝났네.
나는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다가 슬쩍 뒤쪽을 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열 명은 족히 넘을 숫자였는데 그의 뒤편엔 시체 하나 없이 말끔했다. 길 중앙에 갈색 로브를 입은 사람만 덩그러니 쓰러져 있을 뿐.
“쓰레기는 치웠습니다. 증거가 남지 않도록.”
시체들을 말하는 거겠지. 새삼 마법의 대단함에 소름 돋았다. 많은 사람을 죽이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고, 그것을 치우는 데도 손가락 한 번의 움직임이면 가능했다.
‘아니. 모든 마법사가 가능한 건 아니고 시리우스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나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마땅히 건넬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잘했다고 칭찬할 수도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고 잔소리할 수도 없었다.
‘시리우스에게 너무 내 생각을 강요했던 걸까.’
이 세계가 전생보다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귀족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서 죽는 평민이 있다는 것도, 산을 넘던 상인이 도적에게 습격당해 죽는 것도 이 세계에선 당연한 이치였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한다는 것.
‘시리우스가 죽지 않길 바랐기에.’
그랬다. 나는 그를 걱정해서 생명을 무겁게 여기라 말했었다. 이곳에서 살인이 죄가 아닐지라도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는 인간의 마음을 갉아먹는다. 붉은 피는 쌓여서 정신을 옭아맨다.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시리우스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짊어져야 했다. 강해져야 했다. 나를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세르니아 님, 많이 무서우셨습니까?”
말없이 멍하니 있자 걱정 어린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 와중에도 나를 먼저 걱정해주는구나. 나는 풀렸던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약간 후들거리긴 했어도 일어설 수 있었다.
“아니요.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했었는데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미안했다. 모순적인 나의 태도에 대해. 시리우스는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분홍색 눈동자가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피에 잠기지 않길 바랐다.
“괜찮습니다. 세르니아 님에게 힘이 되어 기쁩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를 향해 웃어 보이는 시리우스는 정말 순수했다. 오직 나를 위해서. 단지 그뿐이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맹목적으로 나를 위하는 시리우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감정.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능력이 닿는 한에서 시리우스를 도와주자고 다짐했다. 붉었던 하늘에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고 연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이제 곧 밤이 오겠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저음이 들렸다.
“빚이 하나 또 늘었군요.”
시리우스의 입에선 오랜만에 듣는 단어가 나왔다. 그런데 늘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아니 저번에 구해주신 보답은 이미 드렸잖아요!”
“그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때 분명히 제가 원하는 걸 받겠다고 했었죠.”
내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지었으나 통하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