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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나중에 뭘 요구할지 두려워졌다. 아니야. 생각하지 말자. 뭘 생각하던 내 상상 이상일 것 같으니.
‘그보다 로브 입은 사람은 괜찮은 건가?’
나는 쓰러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의 몸엔 다행히도 상처의 흔적이 없었다. 숨도 쉬고 있었다. 근데 이제 어쩌지?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여기에 놔둘 수도 없었다.
‘역시 내가 데리고 가야 하나?’
일단 나를 도와주기도 했고, 쓰러진 사람을 못 본 척할 수도 없었다. 결정을 내린 나는 그녀를 어떻게 마차까지 옮길지 고민하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슬슬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고, 또 부탁하기엔 진짜 너무 염치없었다.
“흐음, 몸에 이상이 없으니 이대로 방치해도 상관없을 텐데요.”
내가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동안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던 시리우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으니 여기에 놔두고 가면 위험할지도 몰라요.”
“세르니아 님이 위험한 일에 엮이길 바라지 않습니다.”
시리우스의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물의 정령을 다루는 파란 눈의 여자. 아무리 생각해도 데이지 같았기에. 만약 데이지라면 어째서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다.
‘정말 데이지일까?’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그저 몇 가지 단서들로 데이지일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 확실히 그녀는 데이지라기엔 성숙해 보였다. 나는 문득 시리우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데이지라면 시리우스가 뭔가 느끼지 않을까.
“시리우스 님. 혹시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글쎄요. 으음, 기묘하긴 하군요.”
“어떤 점이요?”
뭔가 느껴지는 건가. 나는 그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차 물었다. 시리우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와 데이지를 번갈아 봤다. 뜸 들이니까 더 궁금한데.
“인간이 아닌 느낌이 듭니다. 정령에 가까운…….”
시리우스가 말끝을 흐렸다.
인간이 아닌 것 같다니. 데이지가 아닌가? 마력이나 정력을 잘 느끼는 시리우스가 한 말이니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령도 아닌 이상한 존재 같군요. 역시 엮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그가 단호하게 말했으나 놔두고 가기엔 찝찝했다. 신경 쓰이는 점도 있고. 시리우스는 내 얼굴을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결심하신 모양이군요.”
“네. 은인을 버릴 순 없잖아요.”
“그런가요. 저도 은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그것도 두 번이나 구한.”
윽. 갑자기 뼈 때리는데요. 나는 시리우스의 말에 질 수 없어서 받아쳤다.
“알죠. 방금 빚 하나 또 늘었다고 악덕사채업자처럼 말했는데 절대 잊을 수 없죠.”
하하. 나도 뼈를 때리자 시리우스는 천천히 받을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고…….”
아카데미에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기에.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리자 발밑에서 하얀빛이 생겼고 풍경이 일그러졌다. 텔레포트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
나는 공작가로 무사히 돌아갔다. 마차까지 텔레포트를 해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가 깜짝 놀란 것만 빼면.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어쩌다 상처가…….”
공작가에 도착하기 무섭게 데인이 반겨줬다. 그는 내 상처를 보고는 기함을 터트렸다. 기사를 시켜서 나를 방까지 옮기고 사제를 불러왔다.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내가 말릴 틈도 없었다.
“같이 오신 분도 현재 사제님이 치료 중입니다.”
“고마워. 그, 삼촌에게는…….”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래?”
데인은 푹 쉬라며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감았다. 그녀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오늘 있었던 일을 공작에게 어디까지 보고해야 하나.
끼익.
문을 여는 소리에 데인인가 싶어서 이불을 살짝 내리고 고개를 빼꼼했는데 서늘한 녹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언제 이까지 들어왔데? 인기척 없이 다가온 공작을 보고 굳어버렸다. 아직 뭐라고 변명할지 못 정했는데.
“자고 있었나?”
“아니요. 이제 자려고 했죠.”
이불을 내리고 상체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그는 내가 내린 이불을 다시 덮어줬다.
“누워있어라.”
나는 목 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운 방에 불도 켜지 않고 그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마치 기분 안 좋은 날 티타임을 가지자고 하던 날처럼.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다쳤다고 들었다.”
예상외로 공작이 먼저 말했다. 그것도 데리고 온 사람에 대해 먼저 묻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처에 대해서였다. 마주 본 녹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를 걱정한 걸까?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예전에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 이제야 입 밖으로 나갔다.
“걱정하셨나요?”
“…….”
어두운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괜히 물었나. 공작의 성격상 걱정했더라도 말할 리 없는데.
“그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대답을 바라지 않았는데 그가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랐기에. 공작은 감정표현이 서툴렀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내색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더 놀랐다.
“다치고 왔다는 소식에 걱정했다. 그러니 다음부턴 다치지 마라.”
차분해진 녹안으로 내게 말했다.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전생에 내가 유치원 일로 힘들어할 때 소주 한 잔 사 주시며 기운 내라고 위로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 나는 아직 부모님이 필요했구나.’
스스로 어른이라 생각했다. 쌍둥이는 물론이고 벨라나 카나린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그들과 있을 때도 은연중에 내가 보호자라고 생각했다. 이번 생의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부모님에게 응석 부리고 싶은 건 다 똑같네.’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응석 부리던 게 떠올랐다. 나에게도 아직 부모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슴이 뭉클했다. 내게도 보호자가 있다는 사실에. 공작의 따뜻한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왜 그러지? 아픈가?”
내가 눈물을 보이자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아니요. 그냥 삼촌이랑 있으니까 안심돼서 그런가 봐요.”
“얼른 자거라.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테니.”
그는 침대 옆에 앉았다. 예전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워했을 텐데, 지금은 편안했다. 아버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공작의 숨소리가 든든하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
쌍둥이가 입학하고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그동안 다리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다. 사제가 치료해준 덕분에 흉터도 남지 않았다.
“아가씨, 벨라 님이 오셨습니다.”
첼시가 벨라의 방문을 알려왔다. 시녀들이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고,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벨라를 마중하러 갔다. 완연한 봄이었다. 정원에는 붉은 장미가 활짝 폈다. 붉은 장미는 정말 아르덴타인과 잘 어울렸기에 내가 의견을 피력해서 심은 꽃이었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니아 언니!”
“벨, 오랜만이야.”
정원 입구에 도착하자 벨라가 보였다. 그녀도 나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벨라는 오늘도 천사 같았다. 봄이랑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다쳤다고 들었어요.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벨라에겐 알리지 않았는데 어디서 내 소식을 들어서는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쌍둥이에게도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걱정 가득한 편지폭탄을 받았었다. 데인이 말한 걸까?
“응. 다 나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오라버니의 편지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렌드윈은 에리얼에게 들었나? 에리얼의 편지에도 종종 그가 등장했으니. 둘이 좀 친해졌나 보다. 우리는 장미 정원을 산책하며 소소하게 근황 이야기를 했다. 주된 이야기는 아카데미에 간 형제였다.
“오라버니가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서 좋긴 한데 피곤하지 않을까 걱정 돼요.”
“그렌드윈 님도 벨에게 편지 보내는 게 좋기 때문에 매일 쓰는 게 아닐까?”
마음도 천사 같은 벨라니 그렌드윈이 동생 바보인 거겠지. 우리가 테이블에 도착하자 삼단 트레이에 디저트가 가득 쌓여있었다.
“와. 맛있겠다!”
“벨을 위해 준비했어.”
우리는 즐거운 티타임을 보냈다.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벨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에겐 말하지 않았으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그렌드윈과 떨어져 지내는 건 처음이니.’
그녀가 자라는 동안 늘 그렌드윈이 옆에 있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기에 그렌드윈 외에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헬리오스가 다였다. 그런데 둘 다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 혹시 외로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늘 공작가로 초대한 것이다.
가문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해 주기적으로 티파티는 했으나 벨라는 그쪽의 또래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며칠 전에 카나에게 편지가 왔는데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더라.”
“아, 카나린 님이랑 친하다고 했죠. 저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럼 방학 때 다 불러서 티파티 할까?”
“좋아요! 니아 언니가 주최하는 티파티는 무조건 참석할게요.”
벨라의 밝은 미소를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접시에 디저트들이 동났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다. 벨라는 아쉬운지 다음에는 후작가로 초대할 테니 시간을 비워두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후에야 돌아갔다.
벨라가 돌아가자 공작가는 조용해졌다. 쌍둥이가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혼자 장미 정원을 멍하니 걸었다. 혹시 외로웠던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멍멍!”
청승 떨며 걷고 있었는데 장미를 헤치고 검은 털 뭉치가 나타났다. 밤이는 솜뭉치를 물고 와 내 앞에 가지런히 내려놨다. 어서 던져달라는 듯이. 이게 재밌는지 내가 산책만 나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타난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밤이가 있어서 덜 외롭지. 자, 물어와!”
“멍!”
솜뭉치를 멀리 던지자 짧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뒤태가 귀여워서 흐뭇하게 보고 있었는데 데인이 편지를 들고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