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38화 (38/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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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부탁하신 것입니다.”

“고마워.”

내가 부탁한 것.

한 달 동안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그녀가 데이지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루테론 자작 가문에 대해 조사했다. 아주 기본적인 것들이라 데인에게 부탁했더니 일주일도 안 걸렸다. 데인에게 건네받은 편지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데이지는 루테론 자작가의 외동딸.’

나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뜯었다. 종이에 적힌 문장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담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말도 안 돼.”

다른 사람이 봤다면 그저 자작가의 딸에 대한 신상정보였으나 내가 바란 정보는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다. 루테론 자작가의 외동딸은 현재 18살로 아카데미에서 만난 할렉스 백작가의 장남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으로 있음. 금발에 가까운 밝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이름은 셀레나…….”

데이지는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이부터 시작해서 외관과 이름까지. 유일하게 같은 건 외동딸이라는 것.

머리가 아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소설에 들어왔다고 믿었는데 여주인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머지 등장인물은 어째서 같은 거야?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수첩을 꺼냈다.

‘어디부터 손대야 하는 걸까.’

깃펜을 들었지만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뚝, 하고 검은 잉크가 흰 종이에 떨어졌다. 번져가는 검은 잉크를 보면서 겨우 펜을 움직였다.

‘여주인공이 없음.’

꾹꾹 눌러쓴 한 문장. 여태껏 정리해왔던 모든 전제를 엎어버리는 문장이었다. 혹시 소설을 읽은 건 전부 내 망상이 인가? 내 전생도? 아니면 소설과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라거나. 그러기엔 데이지를 제외하고는 너무 똑같았다.

‘추리 소설이냐고.’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수첩을 뒤적였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재 데이지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아카데미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훑어봤다. 초반이라 그런지 대부분 호감도를 높이는 사소한 에피소드들이었다.

‘메인 스토리는 아리엘의 저주 이후인가.’

데이지가 그렌드윈, 시리우스, 헬리오스, 에리얼 순으로 만나고 그들이 데이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 주된 내용이었다. 역하렘 소설답게 돌아가면서 호감도를 쌓다가 2학년이 되어 전부 같은 반이 된다.

그러다 뜬금없이 아카데미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을 같이 해결한 헬리오스와 데이지는 급속도로 친해진다. 아리엘은 눈앞에서 꽁냥거리는 그들을 보고 질투심이 폭발해서 졸업을 앞두고 저주를 걸고.

‘황후의 첫 등장, 그리고 시리우스의 죽음.’

누차 말하지만 소설 속에 등장했던 악역은 쌍둥이였다. 에리얼은 아리엘이 죽음을 계기로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데이지는 헬리오스와 썸을 이어가며 졸업.

‘2부는 황궁으로 배경이 바뀌고, 데이지는 마탑으로 들어갔다가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근데 데이지가 없어. 성장 로맨스 판타지인데 주인공이 없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들고 있던 종이를 와락 구겼다. 나는 수첩을 덮고 옆방으로 향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보기 위해.

처음 공작가에 왔을 때 내 다리를 치료해준 사제가 그녀의 상태도 보고 갔다고 했다. 외적인 상처는 없었고 그저 정신을 잃은 것뿐이라고 해서 금방 일어날 줄 알았다. 왜 못 일어나는 걸까. 복잡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는 평안해 보였다.

“대체 넌 누구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지만 너무 답답했다. 죽음도 피해간 마당에 데이지가 없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저 당연하게 믿고 있던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혼란이 나를 심란하게 했다.

마치 ‘인간은 중력이 있어서 땅에 발을 붙이고 걸을 수 있습니다.’라는 이론을 믿어왔는데 갑자기 ‘저기요, 사실은 중력은 없대요.’ 하면 당연히 ‘아니! 중력이 없다고요? 그럼 인간은 어떻게 땅을 걸을 수 있는데요?’ 하는 질문이 나오는 느낌.

‘진짜 모르겠다.’

데이지는 양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시체처럼 잠들어 있었다. 이곳은 포도당 주사도 없는데 에너지는 어떻게 공급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언니, 요즘 날씨가 부쩍 더워졌습니다. 아카데미에도 여름이 찾아와 하복을 입었습니다. 언니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요. 엘은 무식하게 더위에 질 수 없다며 햇빛 아래에서 검을 휘둘러대지 뭐예요. 언니가 편지로 잔소리해 주세요. 제 말은 듣지도 않아서…….]

“풉.”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오는 쌍둥이의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아리엘의 편지는 대체적으로 격식이 갖춰져 있는데 이상하게 에리얼 이야기만 나오면 폭주해서 글씨체도 문단 구조도 날아가 버린다.

이후로 감정이 격해졌는지 휘갈겨 쓴 문장이 한 페이지 가득 차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닙니다. 저는 아카데미 생활에 잘 적응했습니다. 존경할만한 선생님도 많아서 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즐겁습니다. 다만 이맘때쯤 언니와 서재에서 책 읽던 나날이 그리워집니다. 함께 햇빛을 피해 낮잠 자던 일이나 데인 몰래 분수대에서 수영하던 추억에 잠기곤 합니다. 언니 보고 싶습니다.]

‘오늘도 똑같네.’

아리엘의 편지는 언제나 추억 이야기를 하며 보고 싶다고 끝난다. 매주 끊임없이 나오는 추억 이야기에 새삼 많은 추억을 쌓아왔다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Ps. 곧 여름방학이지만 저와 엘은 아카데미에 남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재밌게 들었던 과목의 심화 수업이 방학 때 개설한다고 해서 고민한 끝에 듣기로 결정했습니다. 방학 때 돌아가지 못해서 너무 아쉽습니다.]

‘정했구나.’

한 달 전부터 편지에 듣고 싶은 수업이 방학 때 개설하는데 수강하면 공작가에 못 오게 되므로 망설이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들으라고 설득했고, 겨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제 곧 내 품에서 떠나겠지.’

넓은 세상에는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았기에. 집은 편안하지만 발전하기 위해선 밖으로 나서야 했다.

“상자에 넣을까요?”

“부탁해.”

나는 다 읽은 아리엘의 편지를 건넸다. 상자에는 지금까지 받은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상자였는데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편지의 양이 많아져서 상자를 바꿀 때가 됐다.

‘쌍둥이 말고도 자꾸 보내는 사람이 늘어서 문제야.’

매일 한 통씩 보내던 쌍둥이를 말려서 편지 수가 줄어드나 싶었는데. 카나린이나 벨라도 주기적으로 편지를 보내 왔고, 뜬금없이 그렌드윈에게서 보고서 같은 편지도 받기 시작했다. 주제는 에리얼 관찰일기. 아니면 벨라의 찬양일기.

‘헬리오스는 대체 왜 보내는 걸까.’

그래. 그렌드윈까지는 이해하려고 했다. 입학식 날 나름 의리도 생겨서. 그런데 헬리오스도 한번씩 장난스러운 편지를 보내왔다. 진지하게 편지 보내는 것이 아카데미 유행이라도 된 건 아닐까 고민도 했었다.

‘정작 시리우스에겐 한 통도…….’

생각하지 말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즘 앉아만 있었더니 잡생각이 많아졌나 보다. 산책이나 가야지. 여름이 다가와서 수국을 심었다던데 구경이나 해야겠다.

“아가씨 양산 가져올까요?”

“괜찮아.”

나는 옆에서 졸졸 따라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첼시가 아니었다. 첼시는 요즘 시녀장 밑에서 배우는 시간이 많아져서 내 전담 시녀가 바뀌었다.

“모자는 어떠세요? 햇볕이 따갑습니다.”

“고마워. 데이지.”

나는 데이지가 건네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정원으로 향했다.

그렇다. 전담 시녀는 입학식 날 주워온 여자였다.

***

정체 모를 여자가 의식을 차렸다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왔다. 방에는 데인과 의원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침대에 다가가자 눈을 뜨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드디어 묵은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당신은 데이지인가요?”

나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었다. 데인과 의원이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가 데이지인가요?”

왠지 공허해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분명 질문은 내가 했는데 왜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는 걸까. 말장난 같은 대답이었다. 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데인과 의원의 표정도 좋지 않고.

“아가씨, 그…… 이분은 기억상실증인 것 같습니다.”

“기억 상실?”

소설에 여주인공만 걸린다는 그 기억 상실? 나는 머릿속에 물음표가 한가득 떠올랐다. 왜 갑자기 기억 상실증이래. 그럼 내 궁금증은 누가 해결해주는데.

“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의식을 잃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억 상실이 정말 있는 병이었구나.”

아차, 마음의 말이 입으로 나가버렸다.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병명을 현실에서 들을 거라 생각도 못 해봐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주제를 돌렸다. 고칠 방법은 있냐고 묻자 의원이 고개를 저었다.

“정신적인 문제는 사제님이 오셔도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는 경우도 있고,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돌아오기도 한다지만 어디까지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완벽한 치료 방법은 없습니다.”

오. 드라마 속에서 들은 적 있는 대사 같은데.

신빙성 있는 의원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론은 내 궁금증은 해결 못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여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보시는…….”

“저를 버리실 건가요?”

“네?”

당돌하다고 느낄 정도로 직선적인 질문이었다. 버리다니, 누가 보면 내가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는 악덕 사장님 같잖아. 나는 그녀에게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기억을 잃어서 갈 곳도 없고, 그때 쫓기고 있었지.’

사실 이제 나에게 그녀가 데이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을 잃었다는 그녀가 데이지인 것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데인에게 루테론 자작가에 대해서 더 철저하게 조사해달라고 했으나 그들에게 사생아는커녕 사촌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 있는 그녀가 데이지일 리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이미 주워온 시점에 기억까지 잃어버렸으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일단 기억을 잃은 그녀를 어떻게 할지 정해야 했다. 그녀를 쫓던 복면인들이 어떤 세력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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