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39화 (3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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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리우스가 증거가 남지 않도록 정리했다고 했으니 추적하긴 어렵겠지.’

보통 영화에서 보면 암살자들 중 한 명은 살려놓고 정체를 묻기도 하던데. 정체는커녕 형태도 남지 않았으니. 반대로 그쪽에서도 우리를 추적하기 힘들 것이다.

“버리실 건가요.”

내가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그녀는 혼자 단념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 없어서 불안했나 보다. 눈 떴는데 기억도 없고 사람들까지 자신을 모른다면 누구라도 불안하겠지.

“아니요. 제가 데려왔으니 끝까지 책임은 지겠습니다.”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원하던 답이 아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녀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뭐든 하겠다니 약간 노예 같잖아. 그렇게 험한 일은 안 시키겠지만. 그녀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나는 중요한 사실을 잊을 뻔했다.

“이름은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요?”

내가 지어줘야 하나? 아니면 스스로 정하려나? 나는 우선 그녀의 의견을 물어봤다. 본인이 불릴 이름이니까 자유를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데이지.”

“네?”

“아까 저를 보고 데이지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분과 닮았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저도 그분을 못 봐서 모르겠는데요. 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데이지를 아는 사람도 없으니 대충 둘러대도 되지 않으려나. 잠깐 머뭇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라고 들었거든요. 그쪽처럼.”

“그런가요.”

그녀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내게 고정됐던 시선을 떼고 침대를 내려다봤다. 소설 속에서는 데이지 맑은 파란색 눈동자를 청명한 여름 하늘에 비유하곤 했는데 그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같았다.

‘나이도 나랑 비슷하거나 나보다 많아 보이고, 역시 내 착각이었나.’

나는 이제 데이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질색이었기에.

“저는 데이지가 좋아요.”

네? 데이지요?

더 이상 데이지에 집착 안 하겠다는 결심을 방금했는데. 하지만 그녀도 바꿀 생각이 없는지 단호한 얼굴이었다. 자기가 좋다면 뭐.

“그래요. 그럼 데이지라고 부를게요.”

“그, 아가씨는 이름이…….”

그제야 내가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실수를. 나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저는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

데이지는 빠르게 적응했다.

뭐든 하겠다고 했으나 기억도 잃었는데 험한 일을 시킬 수 없어서 내 전담 시녀를 맡겼다. 처음에는 시녀장이 격하게 반대했으나 데이지의 싹싹함과 뛰어난 습득력에 허락하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내 마음도 편하고.’

데이지에 대한 불안 요소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그랬기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가장 먼저 눈치채고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가씨 덥진 않으세요? 얼음물이라도 가져올까요?”

“괜찮아.”

그런데 데이지도 의외로 잔소리쟁이였다.

꼼꼼하고 준비성 좋은 것을 넘어 내가 부탁하지 않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하게 대비했다. 데이지의 행동과 준비성에 데인이 아주 흡족할 정도!

“멍멍!”

산책 나오자 어김없이 후원을 뛰어놀던 밤이가 나타났다.

밤이를 보고 있으니 어째 공작가에 점점 내가 주워온 것들이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에이 착각이겠지. 나는 다가오는 여름 햇살을 받으며 머릿속의 생각들을 가볍게 털어냈다. 밤이를 끌어안고 산책을 이어갔다.

‘분홍색 장미?’

문득 내 눈길을 사로잡는 장미가 있었다.

정원에는 전부 붉은 장미를 심었을 텐데 딱 한 송이만 돌연변이처럼 분홍색으로 피어있었다. 진분홍도 아니고 몽글몽글한 솜사탕 연핑크였다.

“아가씨?”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따라오던 데이지가 의아하게 봤다. 그녀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며 넘어갔다. 그저 붉은 장미 속에 피어있는 분홍 장미가 신기해서 쳐다본 것이라고 떠오른 인물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어 온도조절 아티팩트가 있는 실내에서만 생활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공작가 안에서 쾌적한 하루를 보냈다. 어제와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나 지루하진 않았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다가 졸려서 불을 껐는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췄다. 어쩐지 달빛이 나를 부르는 느낌이었다.

커튼을 걷자 커다란 보름달이 보였다. 늑대인간도 아닌데 하얀 보름달을 보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홀린 듯이 테라스로 나왔다. 창문을 열자 후끈한 열기가 몰려왔으나 이런 더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강에서 마시던 맥주 맛이 떠오르네.’

달구경을 하고 있으니 술이 당겼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예전에 갖다 놓았던 와인을 꺼냈다. 방에 놔두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안주도 없었지만 풍경이 달콤했다. 혼자서 달빛에 건배라는 헛소리까지 하며 와인을 쭉쭉 들이켰다.

“얼음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벌써 반이나 비어버린 와인병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안에서 막 꺼내왔을 땐 시원했는데 여름 열기에 냉기가 금방 사라졌다.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마워!”

투명한 와인 잔에 짤랑거리며 얼음이 생겨났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붉은 와인을 쪼르르 따르다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뭐지 벌써 취했나? 내 주량은 소주 3병이었는데. 나는 눈을 비볐다. 그런데 눈앞에 얼음과 웃고 있는 시리우스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닙니까? 얼굴이 빨갛습니다.”

“아니, 나 주량 센데! 가 아니라 너 왜 여기 있어?”

시리우스는 맞은편에 앉아 나를 보며 싱긋 웃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세르니아 님이 ‘달빛에 건배’라고 하실 때부터 있었습니다.”

“나 방금 입으로 말했니?”

“네. 작게 중얼거렸지만 충분히 들을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시리우스가 얄미워 보였다. 아니 왔으면 말을 하지. 머릿속에 헛소리의 향연이 스쳐 지나갔다. 부끄러워 죽겠다. 거의 처음부터 다 봤다는 거잖아.

“편지 쓰고 온다며! 왔으면서 말도 안 하고 구경하면 재밌나?”

뭐가 그렇게 웃긴지 이번엔 눈썹까지 찌푸리며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이내 하얀 손가락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세르니아 님이 너무 귀여워서요.”

어, 누가 그렇게 말하면 봐줄 줄 아나! 라고 생각하는 머리와 다르게 기분은 좋았다. 흠흠, 나는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기분 풀린 것을 내색하지 않고 부루퉁하게 말했다.

“그래서 편지는요?”

“보냈는데, 세르니아 님이 받질 않으시더군요.”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자 테라스 난간에 하얀 새가 앉아 있었다. 새를 보자 여태껏 쌓였던 불만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참았을 텐데 취기가 올라와서 억눌러지지 않았다.

“애초에 편지를 보낼 거면 텔레포트라던가 좀 곱게 보내면 덧나나? 그리고 아카데미 들어갔는데 굳이 저렇게 보내야 해? 거기 편지함 따로 있잖아. 평범하게 주소로 붙이라고.”

후, 더운 열기 때문인지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나는 얼음이 반쯤 녹아버린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하다. 달콤한 포도 향이 입안에 감돌았다. 남은 얼음을 입에 넣고 와그작 씹어 먹었더니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세르니아 님이 무조건 받으시도록 보내겠습니다.”

“그래요. 알면 됐어요.”

시리우스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하얀 새는 내가 실내에서 나오질 않아서 테라스에 계속 있었나 보다. 이런 여름에 밖에 나가기 싫은 게 당연한 거지. 내가 손을 뻗자 팔랑이며 날아와 착지했다.

‘밤에 찾아가겠습니다.’

괴도야? 이건 편지가 아니고 예고장 수준인데. 나는 어이없는 얼굴로 종이를 내려다봤다.

“편지 쓸 줄 몰라요? 먼저 인사 쓰고, 자기소개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좀 상세하게 써요. 밤에 왜 찾아오는데요? 형용사까지는 안 바라니까 주어랑 목적어는 쓰라고요!”

한 줄짜리 쪽지를 편지라고 우기는 꼴을 보고 있으니 열이 뻗쳐서 화산처럼 불만이 터져 나왔다. 열을 내며 쏘아붙였으나 시리우스는 그저 말갛게 웃고 있었다. 누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했어. 지금이라면 뱉을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제 편지를 기다리셨습니까?”

“…….”

갑자기 돌직구를 날리는 시리우스의 물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내 대답을 듣지 않았음에도 만족한 얼굴이었다.

“오늘따라 솔직하시네요. 술 때문인가요?”

“내가? 난 언제나 솔직했어.”

“평소엔 좀 더 예의를 차리거나 속으로 생각하셨죠. 저는 오늘 세르니아 님이 더 좋습니다. 편하게 말하는 것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평소에 내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시리우스에게 존댓말 했는데. 지금은 편하게 반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보다 연하니까 반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거기다 지금은 둘밖에 없었고.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리우스는 느릿하게 웃으며 빈 와인 잔에 다시 얼음을 채워줬다. 자연스럽게 와인병을 들고 잔에 술을 따랐다.

“설마 술 마셔 봤어?”

“그럴 리가요. 와인 냄새도 지금 처음 맡는걸요.”

비꼬는 건가. 능청스러운 그의 표정에 나는 한숨을 쉬고 잔을 들이켰다. 그래. 마시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냐.

“술이, 약하신가 보네요.”

“아냐. 와인 한 병 정도는…….”

괜찮았을 터인데, 왜 눈이 감겨오는 걸까. 으음. 나는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부릅떴다. 하지만 기울어지는 고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가 옆으로 앉아 있네.’

시리우스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한여름인데도 그의 손은 서늘했다.

‘아, 시리우스가 옆으로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기울어진 거였구나.’

그가 잡지 않았더라면 내 얼굴은 시리우스의 손이 아니라 테라스 바닥에 닿았겠지.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아니지 왜 허락 없이 잡았냐고 말해야 하나?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입에서는 전혀 딴소리가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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