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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해.”
그의 손에 뺨을 비볐다. 손가락이 길어서 뺨을 감싼 손은 귀까지 닿았다. 술기운으로 뜨거워진 얼굴이었기에 그의 손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시리우스가 손을 거두며 나를 재우려고 했다. 한창 기분 좋았는데, 아쉬운 눈길로 그의 손을 봤다. 많이 취했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혀가 꼬이지 않도록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갈 수 있어. 그보다 오늘은 왜 온 거야?”
밤에 찾아온다고 적혀 있었지만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왠지 시리우스가 곤란해하는 표정이었다. 가식적인 얼굴이 아니라 나 때문에 곤란해하는 것을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주운 여자가 신경 쓰여서…….”
아하, 데이지가 신경 쓰였구나.
역시 여주인공은 데이지와 관련 있는 건가. 시리우스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질투…… 가 나진 않습니까?”
“질투가 왜나?”
진심으로 궁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시리우스가 신경 쓰인다는 건 기억을 잃은 데이지가 여주인공이라는 건가? 그럼 왜 루테론 자작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거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나는 시리우스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군요. 세르니아 님은 질투가 나지 않으셨군요.”
그는 웃었다. 가면을 덮어쓴 웃음. 시리우스 궁에서 만났을 때 짓던 웃음이었다.
“오늘 빚을 받아도 되겠습니까?”
“빚?”
나는 말갛게 웃으며 되물었다. 뇌가 술에 절여져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기에. 시리우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네. 원하는 것을 받기로 했지요. 그러니 거절은 불가합니다.”
“뭐?”
정신이 몽롱해서 시리우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반쯤 풀린 눈으로 그에게 되물었으나 그는 웃음기 지우고 내게 다가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냥 그의 분홍색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붉은 장미들 사이에서 홀로 피어있던 분홍색 장미가 떠올랐다.
“네, 라고 대답해주세요.”
“네? 왜…….”
‘왜 네라고 대답해야 해’라고 물으려고 했는데. 입이 막혔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뽀뽀? 지금 뽀뽀하고 있는 건가. 시리우스도 나도 누구 하나 눈을 감지 않고 서로 바라봤다. 밀어내야 하는데. 근데 기분 좋아. 그저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뿐인데.
시리우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꽃 같던 분홍색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열기를 품은 눈동자는 이내 눈꺼풀에 숨었다. 먼저 눈을 감은 건 시리우스였다. 동시에 그의 팔이 내 허리와 목덜미를 단단하게 잡았다.
‘읏, 아니 잠깐.’
맞대고 있던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불쑥 들어왔다. 가벼운 뽀뽀야 쌍둥이에게 하는 기분으로 할 수 있었지만 키스는 달랐다. 남들이 하는 키스는 많이 봤으나 내가 하는 키스는 처음이라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혀가 내 입속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내 입안에 들어온 다른 존재가 너무 낯설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얽히는 기분이 이상했다. 혀에 닿는 느낌이 너무 생소해서 그의 혀를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게 쫓아왔다. 치아를 건드리며 입천장을 쓸었다. 모든 신경이 입에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진작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겠지. 뜨거운 숨이 몰려들어 왔다.
‘뜨거워.’
언제나 서늘하던 그의 손도, 입안을 휘젓고 있는 그의 혀도.
어느 쪽의 열기인지도 모를 만큼 비슷해졌다. 숨, 숨 막혀. 키스하면 코로 숨 쉬는 거랬는데 콧김이 닿을까 봐 참고 있었다.
내가 파들거리며 그를 밀어내자 생각보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열정적으로 얽히던 혀가 나가자 긴 은색 실이 나와 시리우스의 입술이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겨우 호흡이 가능해지자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도 못 하고 깊은숨을 뱉었다. 초점을 잃어버린 흐릿한 시야에 시리우스가 보였다. 느릿하게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촉, 하는 가벼운 버드키스. 그리고 내 아랫입술을 한번 핥고 떨어졌다.
“첫 키스는 와인 맛이군요.”
키스. 내가 시리우스랑 키스…….
술이 확 달아났다. 지금 대체 술기운에 뭐한 거지?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세르니아 님은 술보다 달콤합니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저를 미치게 합니다.”
그의 눈동자에 희미한 광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살필 여력이 없었다. 미친 건 내가 아닐까? 미쳤다고 키스를 해? 두 살이나 어린애랑? 술 마시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세르니아 님, 저를 보세요.”
허스키한 저음이 혼돈에 빠진 정신을 붙잡아줬다. 나는 그의 목소리에 홀려 생각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밤하늘보다 어두운 흑발 때문에 그의 피부가 더 하얗게 돋보였다. 약간 빨개진 눈가는 나른하게 반쯤 감겨 묘한 퇴폐미를 풍겼다. 유려하게 올라간 입꼬리, 붉은 입술에 시선이 머물자 아까 전 감촉이 되살아났다.
‘미쳤어!’
열이 올랐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분위기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아니야. 분명 시리우스의 얼굴에 홀린 거겠지! 나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와인 한 병에 취기가 오를 줄 누가 알았냐고. 생각해보면 소주 3병은 전생의 주량이었다. 이 몸으로 술을 마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니 분명 데이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키스로 이어진 거야?’
대화의 흐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알딸딸하게 오른 알코올에 생각이 짧아져서 뭔가 놓쳤나?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또,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에 빠지셨군요.”
시리우스의 단정한 손이 내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닿은 손엔 아직 열기가 남아있었다.
“이번엔 비비지 않으십니까?”
“뭐, 뭐를!”
분홍색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접힌 시리우스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제 손에 얼굴을 비비셨기에 물어본 겁니다.”
아까 왜 그랬을까. 술에 취해 시원하다며 얼굴을 비비던 10분 전의 나를 욕했다. 술 마셨으면 곱게 들어가서 잠이나 잘 것이지. 그의 말에 도저히 변명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흠, 허락 없이 만지지 마세요.”
결국 내가 내세울 무기는 하나뿐이었었다. 계속 들먹이는 느낌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허락 안 했다고 언급하면 시리우스는 순순히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은회색 눈동자가 언제나 저를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끊임없이 원하게 됩니다.”
“…….”
어쩜 저렇게 꿀 발린 대사가 술술 나오는지. 하지만 잘생긴 얼굴로 내뱉으니 두근거리긴 했다. 나는 가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어색한 공기를 바꿀 다른 주제를 생각했다. 그러나 하얘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건 없었다.
“사실 그때 주워온 여자가 수상해서 확인차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시리우스가 주제를 돌렸다.
그래. 우리 그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본론으로 돌아왔다.
“딱히 수상한 움직임은 없더군요. 그녀를 추적하는 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은 그녀의 행방조차 못 찾은 거겠죠. 공작가의 보안은 철저하니까요.”
그 철저한 보안을 뚫고 잘도 왔구나. 라고 말하려다가 마법이 금지된 황궁에서도 텔레포트 하는 녀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개념 범위에서 벗어나는 시리우스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데이지에 관한 것을 물었다.
“데이지를 쫓던 세력의 정체는 알 수 없어?”
시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꼬리가 잡히진 않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대체 시리우스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궁금했으나 묻진 않았다.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와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판단력이 돌아왔기에.
“그리고 이런 명분이라도 만들어서 세르니아 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좋은 꿈 꾸시길.”
“잠!”
깐 기다리라고 말하기도 전에 훅하고 사라졌다. 다급하게 시리우스를 잡으려고 했지만 뻗은 손은 허공을 갈랐다.
“치사하게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냐.”
시리우스가 사라진 빈자리를 허망하게 노려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존재가 환상 같았다. 한여름 밤의 꿈도 아니고 대체 무슨 일이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붙은 입술을 쓸었다. 빈 와인 잔이 눈에 들어왔다. 와인은 한동안 못 마시겠다.
***
계절은 빠르게 흘렀다.
계속될 것만 같던 더위가 물러가자 나뭇잎은 하나둘씩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이 나뭇잎을 떨어트렸고,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은 짧아져 갔다.
공작가는 겨울 준비를 위해 바빠졌다. 이번 겨울은 조금 특별했다. 아카데미에 갔던 쌍둥이가 방학을 맞이해 돌아오는 것도 있지만 어제 받은 편지 한 통으로 더욱 부산스러워졌다.
“마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한창 밤이와 공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물끄러미 지켜보던 데이지가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공을 던지다가 멈칫한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나도 공작부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지.’
공작은 외전에서 언급이라도 됐으나 공작부인은 정말 딱 한 줄이었다. 쌍둥이를 낳고 요양차 별장에 갔다는 것. 소설에서는 공작부인이 공작가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이유는 뭘까.’
습관적으로 원작과 차이점을 비교하며 이유를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원작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굳어버린 버릇이라 잘 고쳐지지 않았다.
‘데이지도 없는 마당에 원작이 뭐가 중요해.’
문제는 쌍둥이가 아직 공작부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필 타이밍이 안 맞아서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 공작부인은 편지를 보내고 바로 출발해서 모레쯤 공작가에 도착한다. 별장 쪽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어서 육로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오니까 내일 도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