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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손에 들고 있는 공을 물어뜯는 밤이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데이지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고민했으나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별장으로 내려가셔서 나도 잘 몰라.”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데이지를 말렸다. 아마 잘 아는 사람이 드물지 않을까. 공작부인은 결혼해서 잠깐 머물다가 별장으로 내려갔으니. 제일 잘 아는 사람은 공작이겠지만 도저히 그에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다고 했었는데.’
어째서 안 좋은지도 몰랐다. 깊은 한숨을 쉬며 들고 있는 공을 멀리 던졌다. 공을 쫓아 뛰어가는 밤이를 보자 조금은 힐링 됐다. 귀여워라.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바람이 차갑습니다.”
“응. 그러자.”
데이지는 완전히 일에 적응했다. 옆에서 나를 챙기는 솜씨가 첼시 못지않게 세밀해서 시녀장이 엄청 흡족해했다. 안 그래도 ‘추운데 슬슬 들어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밤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안으로 들어왔다.
한여름 밤의 꿈같은 하루를 빼면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여름 내도록 밤만 되면 이불킥을 차며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으나 시간이 약이었다. 시리우스의 얼굴을 안 봤더니 그날의 기억도 점차 잊혀갔다.
가을에는 공작가 안에서만 지내고, 나갈 일은 가끔 벨라를 만나러 후작가에 방문하는 것밖에 없었다. 편지는 여전히 많이 쌓였다. 아카데미에서 정말 편지 쓰기 열풍인지 카일렌 후작가 티파티에서 만났던 영애에게서도 편지를 받았다.
‘또래 친구들이 다 아카데미에 있으니 편지 보낼 친구가 나밖에 없는 거겠지.’
책상에 쌓인 편지를 뜯어보고 답장을 썼더니 어느새 해가 져 있었다. 이렇게 별거 아닌 일상도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어두워진 방안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며 상념에 빠졌다.
‘원작과 다르더라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나도 슬슬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는 일상을 평화로웠으나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쌍둥이를 언제까지 품에 안고 있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졸업하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겠지. 나도 그만 원작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했다.
***
“언니!”
“누님!”
마차에서 내린 쌍둥이는 겉옷도 벗지 않고 나를 불렀다. 오랜만에 보는 쌍둥이는 한층 성장해 있었다. 성장기의 아이들답게 잠깐 안 본 사이 무럭무럭 자랐네.
“수고했어. 피곤하진 않아?”
“괜찮아요.”
“맞아요. 앉아만 있어서 힘이 남아도는걸요!”
에리얼과 아리얼은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내 품으로 달려왔다. 겉은 성장했어도 속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쌍둥이를 끌어안고 상봉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는데 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흠, 오랜만에 만나 기쁜 건 이해합니다만 식당에서 공작님이 기다리십니다. 나머지는 안에서 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는 식당으로 향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겨우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태어나서부터 늘 붙어있었기에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렌이 저를 팔아넘기고 자기만 쏙 빠졌다니까요! 그 녀석 곰같이 생겼으면서 하는 짓은 어찌나 약삭빠른지!”
“정말? 그렌드윈은 우직해 보였는데.”
에리얼은 그렌드윈과 같이 수업을 빠졌는데 자신만 벌 받은 이야기를 했다. 어린아이가 억울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하는 모습과 겹쳐 보여서 웃음이 났다. 일단 에리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장단을 맞췄다. 입학식 땡땡이칠 때부터 알아봤지. 그는 성실한 생김새와 달리 귀찮은 일을 싫어했다.
‘서로 애칭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군.’
그렌드윈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리얼의 얼굴엔 애정이 묻어있었다. 역시 둘은 죽이 잘 맞나보다. 에리얼과 그렌드윈의 우정에 대해 생각하던 나완 다르게 옆에서 듣던 아리엘이 ‘수업에 빠진 것이 잘못이니 반성하는 게 맞다’며 정석적인 잔소리를 쏟아냈다.
에리얼은 본전도 못 찾고 울상을 지으며 반성하고 있다고 중얼거렸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에 도착하자 먼저 기다리고 있던 공작이 우리를 맞이했다.
“늦었군.”
건조한 목소리였으나 타박하는 기색은 없었다.
쌍둥이도 오랜만에 보는 공작이 반가운지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도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이렇게 식탁에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일 년 만이었다.
자리에 앉자 화려한 만찬이 차례로 나왔다. 에리얼과 아리엘은 식사를 하면서 은연중에 자신들의 피알을 열심히 했다. 아카데미에서 높은 성적을 받은 것이라던가, 선생님에게 칭찬받은 것들.
“잘했다.”
묵묵히 쌍둥이의 이야기를 들은 공작이 한마디했다. 단 한 마디였으나 쌍둥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었다. 나는 흐뭇했다. 공작을 무서워하던 쌍둥이가 이젠 마주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것과 쌍둥이를 무시하던 공작이 아이들의 성장을 보고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에.
“네!”
“네.”
딱딱하던 공작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가득 찼던 음식들이 비워지고, 마지막 순서인 디저트가 나왔다.
“내일 마리아나가 온다.”
공작이 무심하게 던진 말은 즐겁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충분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에 반응한 쌍둥이는 포크를 든 채로 굳어버렸다. 정작 폭탄을 던진 공작은 평온한 얼굴로 치즈케이크를 음미했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러운 점은 갑자기 도착한 공작부인의 편지와 똑같았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공작부인과 대면한 적은 없으나 왠지 공작이랑 비슷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 식사는 무난히 끝났다. 마지막만 빼면. 식사를 마친 쌍둥이는 곧장 내 방으로 직행했다.
“언니, 알고 계셨어요?”
“나도 어제 알았어. 미리 알려주고 싶었지만 편지를 보내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리니까.”
내 이야기를 들은 아리엘은 수긍했다. 하지만 머리론 이해하더라도 마음은 진정되지 않겠지. 태어나자마자 떨어져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엄마였다. 쌍둥이의 심란한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미리 알았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
오히려 에리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불안도 기대도 전혀 담기지 않은 눈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에리얼은 어린 시절부터 포기가 빨랐다. 그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왜 이제 와서 오시는 걸까요.”
이제 와서라는 단어가 유독 날카롭게 들렸다. 아리엘은 설탕도 넣지 않은 찻잔에 스푼을 휘휘 저으며 단념이 섞인 질문을 했다. 문득 십 년 전쯤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쌍둥이가 5살쯤이었나.’
내가 공작과 거래를 한 날이었다.
그때는 쌍둥이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에 충동적으로 움직였었다.
‘이번에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어릴 때와 달랐다. 그들 사이에 생긴 세월의 거리감이 너무 컸기에.
나는 쌍둥이에게 공작부인에 관한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에리얼의 시선을 따라 창문을 보며 주제를 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벌써 해가 졌네. 겨울이 성큼 다가왔구나.”
석양은 하늘뿐만 아니라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붉게 물들였다.
멀리서 보이는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풍경이었다. 쌍둥이도 한결 편안해진 표정이었다.
똑똑똑.
어쩐지 조급함이 묻어있는 노크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첼시였다. 표정 관리를 능숙하게 하는 그녀가 드물게도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님이 오셨습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전해준 소식에 쌍둥이가 굳었다.
‘분명 도착은 내일이었을 텐데.’
물론 일정에 따라 하루빨리 도착하기도 한다. 그저 쌍둥이가 마음의 준비할 시간이 하루 사졌을 뿐. 나도 복잡한데 쌍둥이는 오죽할까. 그래도 우선은 공작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이동해야 했다. 쌍둥이의 손을 잡았다. 긴장했는지 둘 다 손이 차가웠다.
“가자. 숙모께 인사해야지.”
“…….”
“네.”
아리엘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에리얼은 냉정했다. 반응은 달랐으나 둘 다 긴장한 기색은 역력했다. 복도의 분위기도 무거웠다.
“마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사 먼저 하시겠습니까?”
로비와 가까워지자 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물음에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네르메스를 보고…….”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데인과 마주 보던 공작부인의 시야에 우리가 들어갔기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이구나. 너희는 기억에 없겠지만 많이…… 자랐네.”
공작부인은 아름다웠다. 아리엘과 닮았으나 풍기는 분위기에서 연륜이 느껴졌다. 진녹색 머리카락은 짙은 녹음을 떠오르게 했다. 공작이나 황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동안이었다.
쌍둥이는 공작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그녀도 복잡한 눈으로 쌍둥이를 바라봤다. 어색한 공기가 로비를 가득 채웠다. 발을 동동 구르는 데인과 눈이 마주친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르니아라고 합니다.”
기억이 맞다면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공작부인을 만난 적 없었다.
그녀는 쌍둥이를 지나 내게 시선이 닿았다.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공작부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지?’
공작부인의 얼굴이 한층 복잡해졌다.
“로엔과 똑 닮았구나.”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공작부인이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녀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가 적당히 마무리되자 데인이 공작부인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엄마랑 아는 사이인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멀어져가는 공작부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쌍둥이가 나를 끌고 온실로 갔다. 심란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온실에 가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얌전히 따라갔다. 온실에 도착하자 겨울임에도 푸름을 간직한 식물들이 우리를 반겨줬다.
“저분이 어머니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요.”
“나도. 그냥 남 같았어.”
쌍둥이는 따뜻한 우유와 달콤한 케이크가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서 공작부인을 만난 감상을 늘어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케이크에 손도 못 대고 있는 쌍둥이의 표정은 어두워 보였다. 나는 섣불리 그들을 위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