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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던 마음과 자신들을 버려뒀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뒤섞였을까?’
정말 보고 싶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복잡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겨 있진 않았겠지.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아리엘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어머니는 우리가 보고 싶었을까요?”
“너희는 보고 싶었어?”
“…….”
나는 조심스럽게 아리엘에게 되물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냐고.
아리엘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렴풋이 남은 그리움은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갈망.
내가 채워줄 수 없는 특별한 존재.
나는 역시 쌍둥이와 공작부인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었다. 조심히 다가가야 할 문제지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 변하는 것은 없으니. 적어도 대화를 나눠보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면 노력해보고 싶었다.
‘삼촌이랑 먼저 이야기해봐야 하나.’
공작부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온실은 고요했다. 숨 막히는 침묵은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상념에 잠겨있어서 자연스럽게 찾아온 정적이었다.
조용한 시간은 저녁 식사가 준비됐다고 전하러 온 시녀에 의해 끝났다. 쌍둥이는 입맛이 없다며 바로 방으로 올라갔고, 나도 방으로 돌아갔다.
***
오후 내내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던 하늘은 결국 비를 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겨울 준비를 위해 부산스럽던 공작가였으나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만 공작가에 울렸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침체됐다. 나는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공작부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똑똑.
‘이 시간에 누구지?’
한밤이었다. 아까 쌍둥이가 잠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왔기에 지금 올 사람은 공작이나 데이지 정도밖에 없었다.
“자니?”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공작가 분위기를 침체시킨 원인이자 방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공작부인이었다.
“아니요.”
문을 열자 가벼운 실내드레스로 갈아입은 공작부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불안한 얼굴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여서 공작부인을 방 안으로 들였다.
“늦은 밤에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뜸을 들이는 그녀가 말하기 쉽도록 물었다.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품에서 로켓 목걸이를 꺼냈다.
“갑작스럽게 공작가에 돌아온 건 죽은 친우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야.”
공작부인은 떨리는 목소리고 공작가에 돌아온 이유에 대해 말문을 텄다.
‘죽은 친우와 약속이라니. 설마 엄마를 말하는 건가?’
원작에도 없던 그녀의 등장이 나 때문이라 말하고 있었다. 저녁에 잠시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공작부인은 엄마와 잘 알던 사이 같았다. 친우라고 할 정도니 많이 친했겠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관계였으나 우선 그녀가 건넨 클로버 모양의 로켓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엄마랑 같이 있는 사람은…….’
낡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두 명의 소녀가 손을 맞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
“나는 로엔이랑 아카데미 동기였어.”
공작부인은 내 얼굴을 통해 먼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릴 적 공작이 내게 엄마의 이름을 꺼냈던 날처럼. 그러나 훨씬 깊은 감정이었다. 행복, 즐거움, 슬픔, 그리움. 감정의 물결이 몰아치는 복잡한 얼굴.
“우리는 금세 친해졌단다. 서로 닮았거든. 나도 로엔도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로웠어.”
엄마와 공작부인은 룸메이트여서 자주 붙어있었고, 서로에 대해 숨김없이 말하는 사이였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소녀의 비밀일기를 훔쳐본 느낌이었다.
“다만 그녀는 다른 가족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머나먼 타국에서 아카데미까지 유학을 왔고, 나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다 도피처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거지만.”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엔 물기가 감돌았다.
백작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폭력 앞에 무력했었다. 지속적인 학대를 당해왔기에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죽은 듯이 살아가고 있던 공작부인을 도와준 사람이 엄마였다고 한다. 가문이라는 속박을 끊어준 사람. 공작부인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로엔은 내게 친구 이상이었단다. 나를 백작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은인이라 해야 하나. 그녀는 내게 성을 버리라고 말해줬어. 전혀 생각도 못 한 방법이었지.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나를 믿어준 유일한 이해자.”
감정이 격해졌는지 그녀는 횡설수설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쌓아왔던 감정의 분출구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공작부인은 고해성사하듯이 울면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런데 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다가 사고를 당했지…… 나 때문에 죽은 거야. 내가 로엔을 죽게 만들었어. 결혼을 안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로엔과 친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살았을 텐데.”
그녀의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방울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손수건을 건넸다. 스스로 격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공작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하얀 손수건은 촉촉하게 젖어갔다.
‘죽음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렸던 걸까.’
나는 부모님보다 먼저 죽은 불효자식이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일부를 공감할 수는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존재가 자신 때문에 사라졌다고 한다면 누가 멀쩡히 버틸 수 있을까.
“미안하구나. 못난 모습을 보여서. 오늘 너를 보러 온 건 로엔이…… 예전에 성인이 된 딸에게 해주고 싶다 했던 것이 떠올랐단다. 그래서 그녀가 못한 일을 내가 대신…… 하고 싶었어. 늦었지만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공작부인은 감정을 추스르고 품에서 무언가 꺼냈다. 작은 상자에 앙증맞은 리본이 달려있었다. 쌍둥이와 공작부인이 온다고 해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틀 뒤가 내 생일이었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나 그녀가 늦게 축하한다고 말한 것은 제국법상 아카데미 졸업일을 기준으로 성인으로 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틀 빠르지만 생일 축하한다.”
공작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으나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앉은 상태에서 그녀의 품에 안겼다.
“르헨에서는 엄마가 성인이 된 딸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신구를 건네는 전통이 있다고 하더구나.”
공작부인은 나를 안은 채로 이야기했다.
그녀는 친구를 잃은 아픔이 컸기에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를 안고 있는 그녀는 엄마이기 전에 한 명의 여린 사람으로 보였기에. 나는 겨우 감정을 추스른 공작부인에게 쌍둥이에 관해 물어도 될지 망설여졌다.
‘엄마랑 숙모랑 친구였으면 삼촌이랑 숙모는 엄마가 이어준 건가?’
그들의 관계는 복잡했다. 내가 모르는 그들의 관계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것이었기에. 나는 그녀가 해준 이야기 속에서 관계를 짐작했다. 그녀가 엄마의 죽음을 모두 자신의 결혼 탓으로 돌렸다면 사교계에 공작과 사이가 안 좋다고 소문이 난 것도 이해가 됐다.
“내가 원망스럽니?”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젓고 그녀를 마주 안았다. 공작부인은 아직 과거의 죽음에 얽매여 있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괜찮다고 그녀의 탓이 아니라고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요. 숙모의 탓이 아닌걸요.”
내가 끊어줘야 했다.
엄마의 딸이었기에,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해야 했다. 단순한 사고였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미안하구나. 미안해. 정말로…….”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미 닿지 못할, 더 이상은 만날 수 없는 친구에게 하는 말. 나는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래도 왠지 엄마라면 괜찮다고 했을 것 같았다. 멋대로 상상한 거지만.
“괜찮아요. 엄마라면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하고, 진심으로 결혼 축하한다고 말했을 거예요.”
“…….”
엄마를 한 번도 못 본 내가 할 말은 아니었으나 만약 나였다면 내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공작부인은 말이 없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한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자 따뜻한 물방울이 볼에 떨어졌다. 이내 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아이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위로를 해야 하나?’
나름대로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쩌면 상처가 너무 오래되어 곪았던 건 아니까.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정도로.
“바닥이 차요.”
나는 울고 있는 공작부인의 어깨를 감싸서 부축했다. 힘이 빠진 그녀는 내게 의지해 일어섰다.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으나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손수건은 이미 다 젖었고 더 이상 건넬 것도 없었다. 나는 공작부인을 의자에 앉히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옆방으로 향했다.
‘데이지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주방에 가서 따뜻한 차와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올 순 있으나 공작부인을 혼자 두고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은 불안했기에. 공작부인은 내가 나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데이지의 방을 노크했다.
“아가씨, 늦은 밤에 웬일이세요?”
데이지는 졸음에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밤에 깨운 적이 처음이라 그녀도 놀랐나 보다. 간단하게 상황설명을 하자 그녀는 금세 반짝이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밤중에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아니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고마워.”
불평 한마디 없이 준비하는 데이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공작부인은 울음을 완전히 그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녀에게 따뜻한 차를 부탁했어요.”
“고맙구나.”
조금 진정된 분위기에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로 주제를 돌렸다. 사실 그녀와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만 너무 몰아치는 것 같아서 숨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풀어도 되나요?”
“그래.”
그녀의 시선이 상자에 머물렀다.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르헨에 그런 전통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이 안에 담긴 장신구가 엄마의 유품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