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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이 가장 아끼는 장신구는 로켓 목걸이같이 보였기에.
“이건?”
포장지를 뜯자 작은 상자가 나왔다. 상자를 열자 연녹색 에메랄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있었다. 스퀘어 모양으로 컷팅이 된 에메랄드 반지는 아르덴타인 공작가를 떠오르게 했다.
“로엔의 결혼반지란다.”
엄마의 결혼반지. 만약 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정말 이것을 물려줄 법했다. 나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약지에 꼈다. 반지는 마치 내 것이었던 것처럼 꼭 맞았다.
‘엄마랑 손가락 굵기가 똑같았나 보네.’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나 반지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것 같았다. 반지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데이지는 따뜻한 허브차와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네고 재빨리 나갔다.
공작부인은 수건으로 퉁퉁 부은 눈을 눌렀다. 나는 데이지가 준비한 허브차를 잔에 따랐다. 향긋한 카모마일 향이 방안에 퍼졌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공작부인은 한층 진정되어 보였다.
‘지금 쌍둥이 이야기를 꺼내도 되려나.’
오늘이 아니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지만 공작부인 또 운다면 정말 탈진할까 봐 걱정됐다. 깊은 내적갈등에 빠졌다. 고민하는 내 표정을 읽은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뭐든 해도 돼.”
따뜻한 허브차로 목을 축인 공작부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계속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별장으로 내려가신 건가요?”
“공작가에 머물고 싶지 않았어. 로엔의 죽음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거든. 그리고 너를 볼 자신이 없었단다. 나는 겁쟁이라서.”
정말 겁쟁이였다면 오늘 돌아오지도 않았겠지. 그녀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으나 그녀의 성격으로 짐작건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쌍둥이가 보고 싶진 않았나요?”
“……잖아.”
빗소리에 삼켜진 공작부인의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그늘진 호박색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공작부인의 손을 잡았다.
“보고 싶지 않았을 리가 없잖아. 내 자식인걸.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아이들을 품에 안을 수 있겠니. 그건 로엔과 너에 대한 기만이지.”
공작부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는 죄책감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별장으로 내려간 것은 속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저 누구에게도 도움 되지 않은 선택이었을 뿐.’
자신만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잘못됐다. 그녀의 선택은 새로운 비극을 만들었다.
“반대에요. 엄마의 죽음에 속죄하고 싶다면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았어야죠.”
“뭐?”
“만약 숙모가 먼저 죽어서 남은 이들을 지켜본다면 어떻게 하길 바라나요? 엄마가 저와 생이별하고 혼자서 아파하길 바라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로엔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 죽음에 신경 쓰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말에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간단히 나오는 결론이지만 현실에 닥친 죽음 앞에서 초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다.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에 머물며 앞으로 나아가길 망설인다. 그나마 공작부인은 엄마의 죽음을 직시했기에 속죄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독이 되었지만.
“맞아요. 엄마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공작부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어둠이 걷혔다. 공작부인을 옭아매던 죄책감의 족쇄가 끊어졌다.
“그랬구나. 나는 또 나만 생각했구나. 내가 속죄라고 생각해서 했던 행동은 너와 내 아이들을 상처 입혔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어요!”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 이제부터 시작하면 돼요. 쌍둥이와 대화를 나눠요. 전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잖아요. 쌍둥이도 숙모를 이해해 줄 거예요. 가족이잖아요.”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당연하죠.”
나는 확신했다. 그들이라면 괜찮을 거라고.
공백이 길었기에 서먹하고 어색하겠지만 그조차도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그러니 천천히 조금씩 대화를 이어나가고 감정을 교류해나간다면 충분히 공백을 메꿀 수 있다.
“고맙다.”
공작부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주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녀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어느새 비가 그쳤다.
***
복도 반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세르니아의 방을 나와서 자신의 방으로 가던 마리아나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발소리만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렸기에.
“아직 안 잤어요?”
어두워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울어서 부은 얼굴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울었나?”
그러나 무심한 녹안은 마리아나가 들키기 싫은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래서 부딪히고 싶지 않았는데. 마리아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탐탁지 않은 표정에도 네르메스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요. 세르니아를 만나고 왔어요.”
“그랬군.”
“안 궁금해요? 내가 그 아이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
사실 마리아나가 오랜만에 공작가로 돌아와 가장 놀랐던 점은 네르메스의 변화였다.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였기에 변화를 금방 알아차렸다.
“별로. 그래서 아까 한 말은 변함없나?”
마리아나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네르메스가 짜증 났다. 도착하자마자 네르메스를 만난 그녀는 안부 인사보다 먼저 내일 돌아갈 거라고 통보했었다. 희미한 웃음을 띠고 묻는 그의 얼굴은 그녀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성격 나쁜 건 여전하네요.”
“너도.”
네르메스의 웃음이 진해졌다. 마리아나는 그의 웃음을 외면하고 비가 그친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마리아나는 네르메스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그도 세르니아에 의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의외였다. 네르메스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절대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형과 로엔을 제외하고는.
“모르스와 로엔의 딸이기 때문인가요?”
네르메스의 선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마리아나는 애매하게 걸쳐있었다. 선 안에 있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밖에 있지도 않은. 그래서 그들은 결혼한 것이다. 서로 사랑을 바라지 않았기에.
둘의 관계는 조금 특이했다.
귀족 사이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은 흔했다. 그러나 네르메스와 마리아나는 사랑 때문도 아니었고 가문의 이득 때문에 한 결혼도 아니었다. 그저 어렴풋이 서로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
마리아나는 네르메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아카데미 시절 로엔은 아르덴타인 형제를 소개해줬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모르스와 정반대인 네르메스는 마리아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풋풋하던 시절이었다.
“너도 느꼈을 텐데. 그 아이는 특이해.”
그리운 추억에 잠겨 있던 마리아나는 네르메스의 대답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고 있었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처럼.
“좋은 배우자는 될 수 없지만 좋은 친구는 되어주지.”
“여전히 내려다보는 말투네요. 제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좀 하시죠.”
“그래. 알고 있다. 혼자 멋대로 한 결정이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
“다만 네가 죽을 때까지 지켜주겠다. 네가 아르덴타인의 울타리에 있는 한.”
네르메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못 본 사이 그의 선 안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모르스와 로엔의 죽음 이후 아무도 그의 선 안에 못 들어갈 거라 생각했었는데. 틀린 생각이었다.
‘네르메스의 변화는 세르니아인가.’
네르메스의 말이 맞았다. 세르니아는 특이했다. 그녀의 말은 마법 같았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일 텐데. 그녀는 마음을 꿰뚫어 보고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자신에게도. 문득 네르메스와 세르니아가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소중한 이의 죽음으로 조각나버린 아르덴타인 공작가를 엮어 놓는 실이었다. 이 또한 가족의 형태가 아닐까. 마리아나는 보랏빛으로 물든 새벽의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
공작부인이 공작가에 머물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녀는 원래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내 설득에 의해 계속 공작가에서 지내기로 했다. 쌍둥이와 공작부인은 아직 서먹하지만 조금씩 관계를 회복하고 있었다. 공작가도 활기를 되찾아갔다.
“언니, 다들 도착했어요.”
“나도 다 끝났어!”
차분히 말하는 아리엘과 달리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하필 오늘 늦게 일어난 거야! 머리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데이지가 단정하게 만져 준 머리라서 가슴만 탕탕 쳤다.
‘어제 늦게 잔 내 탓이지.’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쌀쌀한 날씨였으나 온실 안은 따뜻했다.
아늑한 온실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에 다양한 디저트가 세팅되어 있었고, 녹색이 가득하던 식물 사이에 붉은 리본이 꽃처럼 달려있었다.
오늘은 아르덴타인 공작가에서 티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저번에 벨라와 지나가는 이야기로 했던 것이 실제가 됐다!
‘이렇게 빨리하게 될 줄이야.’
어렴풋이 언젠가 해야지. 하고 먼 미래의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 벨라가 티파티는 언제 하냐며 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언제가 좋냐고 되물었는데 바로 이번 달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니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온실에 도착하자 벨라가 가장 먼저 반겨줬다. 내가 파티 주최자인데 반김을 받다니.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벨라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겨울이라 몽글몽글한 솜이 잔뜩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귀여워라. 내가 벨라를 보고 흐뭇하게 웃고 있었는데 뒤에 있던 그렌드윈과 눈이 마주쳤다. ‘누님이 봐도 귀엽죠? 우리 벨이 세계 제일 예쁘죠?’ 하는 눈빛이었다.
“주인공이라 제일 늦게 등장한 건가?”
그렌드윈의 눈빛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있었는데 귀에 꽂히는 빈정거림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