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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님은 대체 어떻게…….”
“렌과 벨이 아르덴타인 공작가에 놀러 간다고 해서 따라왔지.”
차마 초대도 안 했는데 왜 왔냐고 물을 수 없어서 말끝을 흐렸더니 그는 당당하게 따라왔다고 대답했다.
“저, 저는 초대장 없이 가는 건 좀 예의에 어긋난다고 말했어요.”
“맞습니다. 벨은 민폐라고 말렸습니다.”
카일렌 남매가 헬리오스를 배신했다! 벨라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아이고, 귀여워. 그렌드윈은 그런 벨라를 두둔하며 헬리오스 잘못이라고 했다. 정작 헬리오스는 능글맞게 웃었다.
“파티란 사람이 많을수록 즐거운 법이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은발을 깔끔하게 넘긴 헬리오스는 안 본 사이, 키도 엄청 자랐고 선도 훨씬 굵어져 있었다. 그것과 별개로 뻔뻔한 성격은 그대로라 여전히 정이 안 갔지만. 나는 헬리오스를 무시하고 카나린에게 인사했다.
“카나, 와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초대해줘서 감사해요.”
편지는 자주 주고받았지만 얼굴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녀는 조금 야위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볼을 쓸었다. 제이페인 백작이 또 그녀를 구박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오늘 많이 먹고 가야 해요!”
“갑자기요?”
카나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단호하게 피력하는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왁자지껄한 상황을 지켜보던 에리얼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우선 다 모였으니 티파티를 시작할까요?”
파티라고 하기엔 사람도 적고 소소했으나 거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 앉자 은은한 다즐링 향기가 온실에 퍼졌다. 이렇게 다 모이니 신기했다. 아르덴타인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아주 조촐한 티파티에 여주인공 빼고 ‘신유신’ 등장인물들이 정모 하는 느낌!
‘데이지는 있지만.’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데이지를 힐끔 보며 생각했다.
기억을 잃은 그녀는 어쩌다 보니 데이지의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내심 쌍둥이가 공작가로 돌아왔을 때 그녀를 보고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예상은 틀렸다. 쌍둥이는 그저 첼시 대신 내 옆에 있는 시녀에 대한 관심을 보일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데이지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네.’
주요 등장인물이 거의 모여 있었으나 그들 중에서 데이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데이지가 기억을 잃은 여주인공이라는 가설을 지우며 모인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내가 읽었던 ‘신유신’의 캐릭터가 아니었다. 실제로 여기에 존재하며 나와 같이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들은 평면적이지 않았다.
“벨라 님은 이번에 아카데미 입학이시죠?”
“네! 너무 설레요. 그리고 말씀 편히 하세요.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선배신데.”
접점이 없어야 할 벨라와 카나린도.
“렌! 저번에 빌려 간 손수건 언제 돌려줄 거야? 그거 누님이 직접 수놓은 소중한 거라고!”
“집에 놔두고 왔다.”
“저번엔 아카데미에 있다더니?”
서로 싫어했어야 할 에리얼과 그렌드윈도.
“황태자님이 오셔서 언니가 불편해하잖아요.”
“나 때문에 불편하다니 그거참 영광이군.”
헬리오스를 짝사랑 했어야 하는 아리엘과 그녀를 귀찮아했을 헬리오스도. 전부 변해있었다.
‘내가 한 건 별로 없지만.’
정말이었다. 나는 그저 쌍둥이를 부둥부둥 사랑으로 키웠을 뿐. 유일하게 오늘 티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한 명이 떠올랐으나 나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멈췄다.
‘뭐, 초대했어도 안 왔겠지.’
시리우스는 다른 사람과 엮이는 것을 싫어하니까. 사람 많은 곳도 안 좋아하고. 언제나 단둘이 봤었기에 이 티파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언니 입술에 뭐 묻었어요?”
“응? 아니, 아니.”
아리엘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나도 모르게 검지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건 다 시리우스 때문이야. 내 흑역사 제조기. 여름방학 이후 그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편지도 없었고. 아니 그보다 만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볼 것 같은데.
“누님 얼굴이 빨개요.”
“차, 차가 뜨거워서!”
에리얼의 물음에 말을 더듬었다. 진정하자. 아예 생각하지 마. 나는 웃으며 아카데미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입학 초기부터 방학 전까지 다양한 사건이 있었는지 다들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저 잠시 자리를 비울게요.”
한창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옆에 앉아 있던 아리엘이 일어섰다. 화장실 가나 보다 하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에 집중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리얼의 자리도 비어있었다.
“엘은?”
“아까 배가 아프다고 나갔어요.”
그렌드윈이 즉답했다. 벨라랑 카나린도 있는데 우리 리얼이 이미지 어쩔 거야. 귀족끼리 예의상 화장실 간다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랬기에 에리얼이 그렌드윈에게만 말하고 자리를 비웠겠지.
나는 에리얼의 빈자를 애잔한 눈으로 봤다. 그때 티파티를 위해 달아놨던 조명들이 꺼졌다. 투명한 유리창 넘어 들어오는 햇살 초록색 잎사귀를 통과해 빛을 비추었으나 나뭇잎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 때문에 시야가 어두웠다.
“어?”
갑자기 뭐지? 그런데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경 쓰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오히려 내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저기…….”
내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곡은 내가 잘 알고 있는 노래였다. 생일 축하 노래.
그리고 홀 케이크를 든 에리얼과 아리엘이 나타났다.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 위엔 촛불이 꽂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상황인지 고민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벨라가 발랄하게 말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벨라와 대화를 나누던 카나린이 내게 다가와서 고깔모자를 씌웠다. 이게 대체 뭐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렌드윈이 내 어깨를 살짝 밀며 말했다.
“세르니아 누님, 촛불 부셔야죠.”
“맞아. 촛농 떨어지면 케이크 못 먹게 되잖아.”
헬리오스가 옆에서 맞장구쳤다. 에리얼과 아리엘도 얼른 불라고 재촉했다. 나는 얼떨떨한 와중에 시키는 대로 힘껏 초를 불었다. 촛불이 꺼지자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합니다.’ 하고 다 같이 외쳤다.
“언제 준비했어? 와, 진짜 놀랐다.”
진짜 생각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저번 주에 공작가 사람들과 소소한 생일 파티를 했었기 때문이다.
“제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니아 언니 생일 파티!”
“저도 올해는 직접 선물을 주고 싶었어요.”
카나린과 벨라가 선물 상자를 내게 건네며 한 번 더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고. 그렌드윈도 시선을 회피하며 선물 상자를 불쑥 내밀었다.
“세르니아 누님, 축하드립니다.”
“와, 고마워.”
그렌드윈이 선물이라니. 우리 생각보다 많이 친했구나? 그의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는 나는 내년 선물은 무조건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자를 받아들자 그렌드윈은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참석했으니 선물을 준비했지.”
“감사합니다.”
“너무 영혼 없는 거 아니야?”
헬리오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내가 그러면 귀여워할 줄 아나.
“기분 탓이에요.”
“아니야. 명백히 벨이나 카나린 영애에 비해 약한 반응이잖아.”
지금 벨라나 카나린과 같은 반응을 원한 건가? 꿈이 큰데.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애써 피며 예의상 웃었더니 선물을 건넨 헬리오스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게 웃긴 얼굴이었니.
“흠, 적당히 하죠.”
“헬리오스 님 언니 그만 놀려요.”
쌍둥이가 내 앞을 막아서며 헬리오스에게 핀잔줬다. 역시 쌍둥이뿐이야.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놔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온실에 설치됐던 조명도 켜졌다.
어느새 선물 상자로 양손이 가득 찼다. 선물을 보고 있으니 따뜻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행복했다. 태어나서 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지낸 세월도, 쌍둥이와 함께 자라며 쌓아온 추억도, 원작을 비틀기 위해 바꿔버린 인연도 모두 이어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나는 행복했다.
“정말 고마워.”
솔직한 감정이었다. 너무 감동 받아서 눈에선 눈물이 차올랐으나 입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행복해서 눈물을 흘린다는 건 이런 거구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티파티에 모인 이들이 전부 웃고 있었다. 그게 너무 좋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지면 끝날, 아주 짧은 한때였으나 나는 이 순간을 마음 깊숙이 새겨 넣었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 또 하나 늘었다.
***
4. 교육은 체계적으로
무난하고 무탈한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 지나갔다. 지루하다고 생각할 만큼 평범한 일상이었다.
“아카데미에 가라.”
“네?”
그리고 평화로운 일상은 끝이 났다. 갑작스러운 통보로 인해.
“최근 아카데미의 인력 부족으로 임시 선생님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공작의 옆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데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데인의 추가 설명에도 상황을 이해하기엔 부족했다. 좀 더 육하원칙에 따라 장황하게 풀어 줬으면 하는데. 과한 바람일까. 나는 데인에게 전제 성립되기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을 지적했다.
“저는 아카데미도 졸업 안 했는걸요. 임시 선생님이라니……. 자격 미달이지 않을까요?”
“누가 너에게 자격 미달이라고 한 건가?”
“아니요!”
서늘한 안광에 겁먹은 나는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누가 했다고 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아카데미 입학도 안 했는데 선생님이라니, 아무리 임시라지만 그건 일반 상식으로도 아니지 않나? 아, 낙하산인가? 확실히 신분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지만.
‘굳이?’
머릿속에서 ‘왜 꼭 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인력이 부족하면 외부에서 인원을 충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째서 나여야 하는가. 공작가에서 빈둥빈둥 뒹굴고 있는 아무 재능 없는 나를 부를 정도로 제국의 인재가 없진 않을 텐데?
“현재 아카데미에 재직 중인 공작님의 스승님이 지명하셨습니다.”
“삼촌의 스승님이요?”
“네. 검성이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검성이요?”
검성은 나도 안다.
소설에도 등장했으나, 그의 명성은 소설보다 더 굉장했다. 평민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는 홀로 소드마스터가 된 위인이다. 본래 마력이 존재하는 세계다 보니 혈통에 의해 체질이 대물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