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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타인 공작가도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검술과 마력을 잘 흡수하는 체질이 피를 타고 이어졌기에 대대로 소드마스터를 배출시키는 것이다.
소드마스터는 제국에선 오직 공작가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는데 그것을 평민이 이루어 냈으니 떠들썩할 만했다.
‘소설에선 안 좋게 끝났지만.’
검성을 떠올리자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자연스럽게 아카데미의 인력 부족도 납득이 됐다.
“근데 그런 분이 어째서 저를 지명한 거죠?”
“그게…….”
데인이 말끝을 흐리며 공작의 눈치를 봤다.
공작의 스승이라고 했으니 그와 관련된 건가? 나도 데인을 따라 공작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힘만 좋은 노인네.”
와, 공작이 저렇게 싫은 내색을 하는 건 처음 봤다!
이를 악물고 뱉은 말도 충격적이었다. 스승님을 지칭할 단어는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데인에게 시선을 돌리자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마저 읽었다.
“흠흠, 아카데미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서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그들을 대처할 인력은 많으나 루카리온 님께서 꼭 아가씨를 봐야겠다며, 추천장과 아카데미 원장님에게 허락을 받은 임시 교사증을 같이 동봉해서 보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게 건넸다.
임시 교사증과 추천장, 호쾌하게 날아간 글씨체로 쓰인 짧은 편지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나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이 많으니 직접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자기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거잖아.
‘편지 양식은 잘 지키셨네.’
누군가와 비교해가면서 읽다가 기분이 팍 상했다. 거기 가면 있을 텐데,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술에 취해 첫 키스를 하고 한 번도 못 만났다. 언제나 바람처럼 왔다 바람처럼 사라졌으나 편지도 뚝 끊기고 감감무소식이었다. 내심 생일 때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다.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공작님, 루카리온 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고 하셨습니다.”
“…….”
공작의 말문을 막다니!
나는 시리우스에 대한 생각을 털어내며 추천장을 내려다봤다. 사실 시리우스나 임시 선생님보다 중요한 것은 데인이 언급한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여주인공이 없어도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건가.’
나는 생일 파티 이후 등장인물이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그들을 받아드렸다. 데이지도 없는 마당에 소설이 뭐가 중요하냐 싶었고 이젠 내가 읽었던 소설과 너무 많은 것이 달라졌기에.
문제는 소설에 나왔던 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체 소설과 현실의 관계가 뭘까. 여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으나 사건은 그대로 진행됐다.
‘아카데미 테러 사건.’
데인은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으나 이번 일은 아카데미 최초의 테러 사건이었다. 소설에서는 데이지와 헬리오스가 친해지는 장치로 등장한 에피소드였다. 테러 장소에 있었던 데이지와 테러에 대한 미심쩍은 부분을 조사하던 헬리오스가 엮이는 내용.
‘역시 신유신은 추리 소설이었나.’
소설의 장르 정체성에 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거기다 나는 범인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찝찝했다.
“네가 싫다면…… 최선을 다해 스승님을 막겠다.”
손 떨리고 있는데요.
공작이 무서워하다니 신선했다. 강해 보이는 공작이 최선을 다해 막겠다니. 언제나 확신을 담아 말했었는데.
“아니요. 삼촌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카데미에 가겠습니다.”
그가 곤란해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지만.
‘어차피 잉여인력이니까.’
이제 슬슬 공작가 서재에 있는 책도 다 읽어 갔다. 특히 아카데미로 가면 마법과 관련된 책이 많으니 자료조사를 하기엔 딱이었다.
“아가씨, 루카리온 님께서 내일 방문하신다고 하니 바로 짐을 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일이라니.”
“성격 급한 건 여전한 늙은이.”
방금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는데요. 공작이 처리하고 있던 서류가 그의 얼굴처럼 구겨졌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짐을 준비하겠다는 핑계로 집무실에서 나왔다. 불똥 튀기 전에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삼촌과 검성의 관계는 의외였지만 이대로 괜찮은 건가.’
짐이라고 해봤자 옷 몇 벌과 책상 위에 놓인 수첩뿐. 방으로 돌아와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더 이상 이 수첩을 펼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복잡한 상념을 밀어내며 침대에 누웠다. 폭신한 이불이 마음을 안정시켜줬다.
솔직히 읽을 때는 재밌게 읽었으나 정리 노트를 쓸 땐 너무 개연성 없는 사건이라고 생각했었다. 아카데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긴 하다만 테러라니 너무 뜬금없잖아.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호감도를 쌓기 위한 억지 전개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나는 사건 내용을 곰곰이 되짚었으나 결정적인 단서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신경 쓰기 시작하는 사건이며 아리엘이 질투하는 계기를 만드는 사건이라고 넘겼기에 따로 정리를 하지 않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관계성이 아니라 사건 위주로 정리해놓을걸.’
로맨스 소설이라 당연히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바뀌는 부분에 초점을 뒀었다. 인생에 필요한 건 로맨스가 아니었어.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테러 사건에 대한 것은 수첩에 적힌 한 줄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
“아가씨, 조심히 다녀오세요!”
어제 내가 아카데미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데이지는 따라가고 싶다고 했으나 시녀 동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공작가에 남기로 했다. 그녀는 혼자 떨어지는 게 불안하다고 했었다. 내가 볼 땐 이미 공작가에 적응 다 한 것 같지만.
“응. 금방 갔다 올게.”
3개월짜리 임시니까. 나는 데지에게 가벼운 포옹을 마치고 옆에 있는 공작부인에게도 인사했다. 그녀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조심히 갔다 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초조해 보이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루카리온 님이 오신다고 했죠?”
“…….”
공작부인은 그와 검성의 관계를 잘 아는지 꽤나 즐거운 얼굴로 부채를 팔랑거리며 물었다. 공작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물린 입은 불만 가득해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작게 키득거리고 있었는데 타이밍 좋게 공작가로 마차 한 대가 들어왔다.
“허여멀건 한 얼굴은 여전하구나. 넬.”
마차 문이 열리기 무섭게 내려온 남자는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다. 나는 신종 테러는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으나 공작부인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공작은 재빠르게 검으로 막았으나 가해지는 힘이 큰지 부들거리고 있었다.
“윽, 스승님이야말로 검부터 나가는 건 안 변하셨네요.”
“하하하. 안 본 사이 더 건방져졌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공작과 다르게 검성은 웃으면서 상대하고 있었다. 공작의 스승이라기에 더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외모는 4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는 정말 나이를 예상할 수 없구나.’
그의 스승이라면 적어도 아카데미에서 교육자로 20년 이상 있었을 것이다. 노인네라고 부르기에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라고 상상했었는데, 눈앞에 검을 휘두르는 고동색 머리칼의 검성은 매우 정정해 보였다. 검성은 공작이 들고 있던 검을 멀리 날리며 신경전을 끝냈다.
“매일 책상에 앉아서 종이 쪼가리만 보고 있으니 비리비리하지.”
검성은 쯧쯧. 하고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공작부인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고, 공작은 억울한 표정을 지우며 평소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스승님처럼 근육에 지배되지 않으려면 적당히 머리를 돌려줘야죠.”
“쯧, 입만 살았어.”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그의 관심사는 이내 공작에서 내게로 옮겨졌다. 검성과 눈이 마주친 나는 기세에 압도당한다는 감각을 느꼈다. 공작과 같은 소드마스터였으나 전혀 달랐다.
“네가 세르니아냐?”
“네. 처음 뵙겠습니다. 세르니아 아르덴타인입니다.”
나는 검성의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고 자기소개를 했다.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탐색했다. 그런 시선은 부담스러운데요. 뭔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얼굴이었다.
“소문은 많이 들었다. 우리 반 녀석들이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거든.”
“반 아이들이요?”
아, 왜 이렇게 불안하지.
검성이 말하는 아이들이 선명하게 떠올라서 너무 불안했다. 그것도 여러 명.
‘2학년 때 벨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같은 반이었는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검성이 맡은 아이들은 내 머리에 떠오른 아이들이 맞았다.
“그래. 주로 아르덴타인 쌍둥이가. 자, 시간 없으니 어서 올라타라.”
검성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리를 잡고 나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대롱대롱 들린 채로 마차까지 운반됐다. 뒤에서 공작이 뭐라 외쳤으나 검성의 웃음소리에 묻혀 들리진 않았다.
“아직 삼촌에게 인사를 못 했는데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인사는 안 해도 괜찮아.”
나는 검성의 말에 수긍했다.
그의 행동력은 섬광보다 빨라서 이미 문이 닫히고 마차가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사 못 했다고 마차를 세우는 것도 유난이고.
‘편지로 안부 전하면 되겠지.’
검성이 타고 온 마차는 공작가 마차보다 거칠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말 많아 보이던 검성은 창문을 보고 있었다. 침묵이 불편했으나 그렇다고 먼저 말을 하려니 마땅히 꺼낼 주제가 없었다.
‘조금만 덜 흔들렸어도 눈 감고 잤을 텐데.’
나는 덜컹거리는 마차에 몸을 기대며 검성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기사보단 용병에 가까워 보였다.
‘전 황실기사단 단장이었지.’
심지어 현 황제 즉위 전에 황실기사단 단장이었다. 나이를 계산해보면 확실히 공작이 노인네라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내 얼굴이 그렇게 잘생겼나?”
풍경을 바라보던 검성이 나를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옆에도 눈이 달린 걸까. 몰래 보고 있다가 들킨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뒤늦게 후회했으나 너무 놀라서 본심이 나버렸다.
‘능청스럽게 그렇다고 했어야 했는데.’
검성은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생기긴 했으나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다 연상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라.
“아니, 그, 저 엄청 젊어 보여서요!”
“내가 또 엄청난 동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