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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간섭하는 게 맞는 건가.’
처음 아카데미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그저 저주에 관한 자료조사 할 겸 쌍둥이도 볼 수 있어서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순한 이유에서다.
테러에 엮일 계획은 전혀 없었다.
아니 내가 가만히 있으면 엮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성과 공작의 관계를 듣고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지 고민됐다.
‘검성이 국외로 추방당하면 삼촌이 슬퍼하겠지.’
검성이 나와 아무 연관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사건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공작이 걱정됐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싫은 척하지만 공작과 검성 사이에 미묘한 사제의 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갈등한 것이었다. 검성의 죄를 몰래 덮어 줄까 하고.
원작에서는 검성과 공작의 관계가 나오지 않았었다.
그저 잠깐 등장한 아카데미 선생님이었을 뿐. 댓글에도 일회용 에피소드에 안 어울리는 엑스트라라는 말이 많았었다. 평민의 영웅이니 정의를 수호하는 검성이니 거창한 별명을 가진 주제에 테러라니.
‘나는 로맨스 소설이라서 그냥 넘겼지만.’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엮이기엔 필연적으로 사건이 필요한 법!
이라고 생각해서 개연성에 연연하지 않고 넘어갔으나 지금은 의문이 남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검성은 테러를 일으킬 사람이 아니었다.
‘여동생을 위한 복수라.’
귀족에게 죽은 여동생을 위한 복수가 이번 테러를 일으킨 이유라고 했었다. 데이지가. 그런데 그 이유도 좀 애잔했다. 평민 출신인 루카리온은 황실기사단장이 되어서도 고위 귀족들에게 종종 무시를 받았었다. 소드마스터인데도! 귀족은 신분이 최고라고 생각했기에.
불행은 그가 아니라 그의 여동생에게 닥쳤다.
평소 그를 아니꼽게 보던 귀족들이 그의 여동생을 겁탈하려고 한 것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이 검성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수첩에는 적혀 있지 않았으나 오늘 검성 얼굴을 보자 떠오른 내용이었다. 읽을 당시에도 기분 나빴어서 금방 기억났다. 여동생을 별장으로 납치해 겁탈하려고 했으나 별장으로 이동하는 도중 그녀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문제는 경사가 가파른 산이었다는 것. 마차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경사 아래로 구르다가 돌에 부딪혀 죽고 만다.
‘그 사건의 주동자는 트룩 후작가의 차남.’
검성은 여동생의 죽음에 분노했고, 황제에게 사건 진상규명과 그에 적합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작가의 차남이라는 이유로 많은 귀족들은 그를 옹호했고, 사건은 결국 사고처리가 된다.
‘전 황제는 사건을 덮는 대신 검성에게 귀족작위와 영지를 준다고 회유했었지. 근데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는데 누가 좋다고 넙죽 받겠어.’
검성은 그 일 이후 귀족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기사단장을 그만두고 황궁을 나온다. 있을 때는 무시하더니 막상 황궁을 나가니 황제는 소드마스터인 그가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우려해서 국외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붙이는 치졸함까지 보여준다!
은퇴한 검성은 황제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카데미 교직원으로 들어간다. 제국에 있지만 황제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 아카데미이기 때문이다. 베리언 아카데미는 초대 황제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제국에 보호를 받지만 독립적인 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세월이 흘러서 초대황제의 뜻이 퇴색되긴 했으나 표면적으로 유일하게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한 공간이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선 신분에 따라 편 가르거나 인맥을 쌓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평등을 가장하고 있었다. 이번 테러 사건은 아카데미 설립 이후 최초의 공격이었기에 문제가 컸다. 최대한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막았으나 부상자를 숨길 수는 없었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근데 복수를 위한 테러였는데 복수 대상자는 죽지 않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으나 트룩 후작가의 차남은 이번에 황실에서 아카데미 연구 기관으로 발령받았다고 했었다. 그 사건에 동참하거나 그를 옹호했던 몇몇 귀족들과 함께.
테러가 난 곳은 후작가의 차남이 있었던 연구 기관 쪽이었다. 문제는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연구원들이 대부분 신분이 낮은 귀족이거나 후견인이 없는 평민이었다. 황궁으로 취직하려면 신분과 연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고위 귀족 밑에서 일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
‘검성이라면 굳이 테러가 아니라 그들만 소리소문없이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텅 빈 연구실에서 테러에 대해 차분히 정리했더니 찝찝한 점이 몇 가지 나왔다.
평민으로서의 설움을 아는 검성이 평민을 휘말리게 할 리 없다는 것과 복수 대상자가 죽지 않은 점. 심지어 그들은 가벼운 경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전 황제가 있을 때는 검성이 국외로 넘어갈까 봐 전전긍긍하며 감시까지 붙였는데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검성은 원작에서 국외로 추방됐다. 테러를 일으켜서? 그렇다면 감옥에 수감하면 됐을 텐데, 탈주할까 봐?
‘이상한 점 투성이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여러 가지 의문점이 뒤섞였으나 수첩에는 검성이 범인일 수밖에 없는 증거가 적혀 있었다. 나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노을빛을 손으로 가렸다. 붉은빛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복잡해졌기에.
‘근데 어째서 이 부분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거지?’
환생하고 거의 잊고 있던 장면인데, 소름 돋을 정도로 자세히 기억났다. 검성과 같이 환멸을 느끼긴 했었으나 이 에피소드를 인상 깊게 읽은 것 같진 않은데. 나는 내 기억력을 의심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수첩에 쓰인 문장밖에 생각나지 않았는데. 그의 얼굴을 보고, 아카데미에 도착해서 테러 사건을 생각했더니 연쇄반응처럼 다양한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대조적으로 마음은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증거를 숨기자.’
테러는 잘못된 행동이 맞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죄를 저지른 검성은 죗값을 치러야 했다. 원작에서처럼 국외로 추방되거나 감옥에 가야 했다.
‘하지만 나 같아도 복수하고 싶을 테니까.’
만약 누군가 쌍둥이를 죽이고 뻔뻔하게 살아간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죽이리라. 그의 마음이 너무나 공감이 됐기에 나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을 선택했다.
더군다나 목표였던 후작가 차남도 안 죽었고, 사상자도 없었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슬쩍 묻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커졌기에.
으음, 증거를 숨기려면 독단적으로 테러를 조사하고 있는 헬리오스보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내가 팔짱을 끼고 언제 움직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덜컹 열렸다.
“언니!”
“누님!”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어쩐지 화나 보였다. 나 뭔가 잘못했나? 나는 테러 사건에 관한 생각들을 잠시 밀어두고 쌍둥이의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미리 언질 하나 없을 수 있어요!”
“도착했으면 저희부터 보러 오셨어야죠!”
다른 이유로 화가 난 쌍둥이를 달래기 위해 나는 양팔을 벌려 다가오는 그들을 끌어안았다. 쌍둥이는 화내려다가도 한숨을 포옥 쉬더니 내 품으로 들어왔다.
“미안.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네.”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여름방학 때 봤으면서 어리광은 여전했다.
검성 수업을 듣던 에리얼이 내 소식을 듣고 아리엘과 함께 달려왔다고 한다. 어디 있는지 몰라 한참이나 찾아다녔다는 사족도 덧붙여서.
나는 급작스레 아카데미 선생님으로 취직하게 된 계기를 쌍둥이에게 설명했다. 이틀 만에 벌어진 일이라 연락할 틈이 없었다고.
“언니가 담임이라니! 이제 아카데미에서도 매일 볼 수 있네요.”
쌍둥이와 담소를 나누며 연구실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니 어느새 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공작가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3개월간 지내야 하는 방은 낯설었다.
‘금방 적응하겠지.’
이 방도, 아카데미 생활도.
쌍둥이 입학식과 졸업식을 제외하고는 절대 올 일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역시 인생이란 마음대로 되는 게 없구나. 교훈을 하나 배우며, 나는 낯선 천장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
“주목! 오늘부터 3개월간 임시 담임을 맡을 선생님을 소개한다!”
나는 교실 밖에서 전학생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전생에는 개근상을 받았는데 환생해서 전학생 기분이라니. 오랜만에 학생들 앞에 서려니까 조금 긴장되긴 했다. 이 녀석들은 다 유치원생이다. 나는 자기 최면을 걸며 교실로 들어갔다.
“룬반 임시 담임선생님을 맡은 세르니아라고 해. 잘 부탁해.”
침묵.
격한 호응을 받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그래도 무반응일 줄이야. 믿었던 쌍둥이마저 눈빛을 반짝이며 쳐다만 볼 뿐, 어색한 상황을 무마시켜주진 않았다.
짝짝짝.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카나린이었다! 감동이야. 나중에 꼭 보답해야겠다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어 쌍둥이와 그렌드윈도 박수를 쳤다.
“이야, 젊은 선생님은 처음 봐서 당황했네요. 선생님.”
유독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사람은 안 봐도 누군지 뻔했다. 이젠 익숙한 빈정거림이었다. 이어 몇몇 다른 반 아이들도 박수를 쳤다. 이제 보니 그들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눈치 게임이었군.’
확실히 황태자에 하나뿐인 공작가까지 있으니 몸 사릴 만했다. 그들의 반응에 따라 나머지 아이들이 따라갔다. 그들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무서운 약육강식의 세계.
“헬리오스. 아무리 젊어도 선생님은 선생님이다. 예의를 지키도록.”
“네.”
와. 역시 검성. 카리스마 폭발.
황태자에게도 얄짤없구나. 헬리오스가 순순히 물러서는 모습이라 처음이라 통쾌하게 웃었다. 물론 속으로.
“나는 한동안 바쁘니까 찾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세르니아 선생님께 말해라.”
“네!”
아이들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호랑이 선생님이라 다들 말 잘 듣나 보다. 나는 반 아이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정말 다 모여 있네. 쌍둥이와 헬리오스, 그렌드윈, 카나린까지. 그리고.
“빈자리…….”
무심코 속으로 했던 생각을 입 밖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있던 검성은 내 말을 들었는지 빈자리의 주인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