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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49화 (4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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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잃은 시리우스를 방치하는 것은 걱정됐으나 사슬을 푸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방을 나가려고 했다.

쾅!

아무도 손대지 않았는데 갑자기 문이 닫혔다. 방이 어둠에 잠겼다. 나는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이지? 밖에 누가 있었나?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으…….”

의식을 잃었을 시리우스의 신음이었다. 그의 몸을 묶고 있던 사슬이 벽에 격하게 부딪혔다. 나는 무서운 마음을 누르고 어둠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흐릿하긴 해도 어둠에 익숙해지자 사물이 구별되었다.

‘사슬이, 풀렸다?’

방금 분명히 들렸다. 강하게 힘주어서 사슬을 당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이 부서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에 고정되어 있던 사슬이 떨어지는 소리가.

“시리우스?”

“…….”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나무문을 열려고 했으나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문을 열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파…….”

나는 우악스럽게 잡힌 어깨를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풀어주지 않았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평소의 시리우스가 아니었다. 마치 처음 본 그날처럼.

‘눈동자가 검은색으로 변했어.’

그에게 색은 중요했다. 저주를 나타내는 증거.

시리우스의 저주는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인데,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저주가 원래 있어야 할 감정을 봉인한 것이다. 그러니 해주가 되면 감정도 나타나고, 색도 돌아온다. 분홍색 눈동자는 그가 가지고 있던 본래의 색이었다.

시리우스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단순한 호감 이상이라는 것도.

‘그랬을 텐데 어째서?’

어둠은 나를 옭아매고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시리우스가 내 입술을 덮쳤다. 달큰하고 몽롱한 첫 키스와는 전혀 달랐다.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는 그의 혀는 입안을 휘젓고 도망가는 내 혀를 강렬하게 빨아 당겼다.

키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팔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단단한 그의 가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반항이 시리우스를 자극했는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셔츠를 움켜쥐더니 세게 잡아당겼다. 셔츠에 달린 단추는 힘없이 뜯겼다.

셔츠는 제구실을 더 이상 하지 못했다. 속옷까지 드러났기에 가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그럴수록 그의 손은 깊숙이 들어왔다. 시리우스는 속옷과 함께 드러난 가슴을 움켜쥐었다.

목에서 깜짝 놀란 신음이 올라왔으나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그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서늘한 손가락은 날개 뼈를 훑더니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지분거리는 손은 점점 은밀한 곳으로 들어왔다. 누구의 침입도 허락한 적 없는 그곳으로.

그의 강인한 힘 앞에서 무력했으나 벗어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 아니었다. 하얘졌던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혀를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꽤나 세게 물었는지 얽혀들던 혀가 멈췄다. 그의 행동도.

‘진정됐나?’

시리우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느른하게 더운 숨을 내쉬던 시리우스는 입에 가득 찬 피를 뱉었다.

“……해.”

어둠에 물든 시리우스는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혀에 깨물린 고통으로 그의 정신도 돌아오길 바란 것은 너무 큰 기대였을까.

“전부를 원해. 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검은 눈동자가 욕망에 번들거렸다. 도망가라는 건 이 뜻이었나?

이곳에서 시리우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아까 말했던 말은 이해했다. 내가 도망쳐야 했을 사람은 누구도 아닌 시리우스였다.

“잠깐, 읏!”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혀를 깨문 것에 복수하듯이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성난 맹수처럼 목덜미를 잘근거리더니 이내 달콤한 꿀을 먹는 벌처럼 움푹 들어간 쇄골 사이를 빨았다. 그의 입술과 쇄골이 맞닿는 부분에서 듣기 민망한 소리가 퍼졌다.

열기가 올라왔다. 와인에 취한 그날보다 더.

“시리우스…….”

그는 내가 거부할수록 맹렬히 덮쳐왔다.

나는 몸에 힘을 빼고 밀어내던 두 팔을 벌렸다. 쇄골에서 점점 아래로 내려오던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다른 손으론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괜찮아.”

거부해서 안 된다면 받아들이자.

자포자기와는 다른,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였다. 사실 예전에 시리우스에게 쿠키를 건네던 날 이 떠올랐다. 내가 물러선 만큼 쫓아오던 그의 모습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나를 탐하던 손이 느려졌다. 나는 그의 귓가에 몇 번이고 괜찮다고 속삭였다. 아기를 달래는 것처럼. 서서히 그의 동작이 멈췄다.

“아…… 세르, 니아 님?”

마주 본 눈은 여전히 검은색이었으나 욕망에 뒤덮인 광기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시리우스를 보자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괜, 괜찮으십니까.”

나를 일으키려던 시리우스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나는 쿵쾅대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이 어두워서 그의 표정이 잘 안 보였다. 일단 일어서기 위해 벽을 짚으려 했으나 하필 바로 뒤가 문이었다. 아까는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들어올 때처럼 힘없이 ‘끼익’ 하고 열렸다.

“제가…….”

문틈으로 들어온 푸른빛 때문에 시리우스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은 허공에서 멈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약속을 어겨서 죄송합니다.”

왼쪽 뺨에 미지근한 액체가 떨어졌다.

‘약속?’

그제야 잊고 있던 시리우스와 약속이 생각났다. 얘는 이 와중에 그런 걸 신경 쓰는 건가. 나는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망설이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시리우스는 내 한숨 소리에 움찔거리더니 입을 꾹 다물고 눈물만 흘렸다.

“울지 말고 진정해.”

잠깐, 눈물을 흘린다는 건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는 거잖아. 그렇다면 왜 눈 색이 다시 검은색으로 된 거지? 나는 복잡한 얼굴로 시리우스를 바라봤다.

“죄송, 합니다.”

울음을 참고 있던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렸다. 나는 시리우스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관뒀다. 그를 달래기엔 내가 너무 지쳤기에 그저 손을 내밀었다. 시리우스는 내 손을 머뭇거리면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지금 일어서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리라.

“나가서 이야기하자. 묻고 싶은 게 많아.”

“네.”

시리우스는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 들었다. 그냥 부축해달라고 뻗은 거였는데. 에라, 모르겠다. 진이 다 빠져서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리우스에게 안겨 시계탑을 나왔더니 하늘이 어두웠다. 생각보다 긴 시간이 지나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간 느낌이었다.

“이거라도 걸치겠습니까?”

“응.”

감금되어 있었던 시리우스도 셔츠뿐이었으나 자신이 벗는 게 낫다고 판단했는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서 건넸다.

‘그래. 둘 중 한 명이 벗어야 한다면 네가 벗어야지!’

너덜거리는 셔츠 위에 시리우스의 셔츠를 껴입었다. 이건 단추가 멀쩡했기에 첫 번째 단추부터 꼼꼼히 채웠다. 말라보였으나 뼈대가 넓어서 그런지 시리우스의 셔츠는 헐렁했다.

“자, 이제 설명할 시간을 줄게.”

주위가 어두웠으나 지하실에 감돌던 질척한 어둠과는 달랐다. 총총 박힌 별과 은은한 빛을 내는 달이 어둠 속에서 떠 있는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우리는 시계탑 근처 벤치에 앉았다. 다행히도 밤에 시계탑을 지나가는 학생이 없어서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처음부터.”

시선을 회피하는 시리우스에게 단호히 말했다. 눈물 자국이 남은 그의 눈가는 붉었으나 마주한 눈동자는 칠흑보다 새카맸다. 시리우스는 한참이나 나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방학 이후 있었던 일들을.

“저의 저주는 감정을 느끼면 풀립니다. 한동안 제 눈동자가 분홍색이었던 것도 저주가 약해졌기 때문이었죠.”

그는 자신의 저주에 모든 것을 말했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저주라는 것, 정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 그리고 감정을 느끼면 저주가 풀리는 것까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그러지긴 했으나 시리우스가 받은 저주 자체는 소설과 똑같았기에.

나는 시리우스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다. 시리우스는 기도하듯이 양손을 모아 쥐고 설명을 이어갔다.

“세르니아 님을 만나고 제 저주는 조금씩 풀렸습니다.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으니까요.”

시리우스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과 대조적으로 모은 두 손엔 힘이 들어갔다. 하얀 손등에 푸르스름한 실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저주가 풀릴수록 저는 강하게 세르니아 님을 원했습니다. 작년 여름, 세르니아 님과 입을 맞추고 난 뒤 감정이 더욱 격해졌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소설에서도 데이지와 키스하고 저주가 약해져서 눈동자 색이 돌아왔었으니. 그런데 나랑 키스 전에 이미 눈동자 색은 돌아왔었다. 그렇다면 키스 후에는 저주가 완전히 풀려야 하는 거 아닌가?

키스로 저주를 푸는 고전 동화처럼, 그의 저주가 완전히 풀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리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을 온전히 가지고 싶다는 본능과 참아야 한다는 이성이 내면에서 충돌했습니다.”

상반된 마음. 이성과 본능의 충돌이 저주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내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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