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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가 이런 판국인 마당에 뜬금없이 나타난 내가 의심스럽긴 하겠지만 범인일 가능성이 낮은 건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헬리오스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내가 범인은 아니라는 걸 수긍한 눈치였다.
“알겠습니다.”
“자, 내가 이렇게 열심히 너를 납득시켰으니 이제 네가 나를 납득시킬 차례네.”
“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나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며 그를 추궁했다.
“나를 의심한 건 이해해. 타이밍도 절묘했고, 현장에서 뭘 뒤지고 있는 모습까지 목격했으니. 그런데 지금은 분명 수업 시간일 텐데?”
역전된 상황 속에서 나는 상큼하게 웃었다.
헬리오스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태연함을 가장했으나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그에게서 당황이 느껴졌다.
“하하. 오늘 선생님이 안 계셔서 휴강이에요.”
“무슨 수업이었는데?”
“왜, 왜요?”
“확인해보려고. 휴강했는지 아닌지. 당당하면 무슨 수업이었는지 말해.”
헬리오스는 땀을 삐질 흘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곤란해하는 얼굴을 보자 즐거워졌다.
“그게…….”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그래서 뭐 좀 찾았니?”
좀 더 골려주고 싶지만 중요한 건 헬리오스와 장난치는 게 아니라 증거를 숨기는 것이었다. 내가 갑자기 주제를 돌리자 헬리오스는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혼내지 않으시나요?”
“왜 수업 빠졌냐고? 너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 단순하게 수업 듣기 싫다고 빠질 성격은 아니잖아?”
거참, 사람 살다 보면 자체 휴강 할 수도 있지. 나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헬리오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선생님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뭐 했다고?
관용을 베풀어 수업 빠진 것에 대해 추궁하지 않는데 도리어 이상한 취급 받았다! 헬리오스에게 들으니 더욱 기분 나빴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칭찬 고맙다. 그래서 너는 어디까지 조사했어?”
나는 헬리오스를 슬쩍 떠봤다.
내가 원장님의 명을 받고 테러 조사를 하러 나왔다고 거짓말한 이유도 그에게 협조를 받기 위해서였다.
‘헬리오스가 나를 얼마나 믿을진 모르겠지만.’
신뢰감이 높을수록 그에게서 단검을 숨기기 쉬워지니. 어느 정도 의심을 지운 헬리오스는 순순히 자신이 가진 정보를 알려줬다.
“선생님이랑 비슷해요.”
“뭐 눈에 띄는 건 없었고?”
“음.”
헬리오스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머뭇거렸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얼굴인데?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없다고 대답했다.
“방금 고민했잖아.”
“별거 아닙니다.”
“별거인지 아닌지는 듣고 판단할게.”
혹시라도 그가 검성에 관한 것을 발견한 걸까. 아주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달라고 계속 말했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건물에 들어왔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거 나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선생님이 말하라고 했으면서.”
헬리오스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자기가 궁금하게 했으면서. 나는 정말 별거 아닌 사실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의 몸을 스캔했다. 단검을 그가 먼저 발견한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발견했다면 나를 의심 안 했겠지.’
근데 지금은 만약 현장에서 단검이 발견되더라도 검성이 조사하다가 떨어트린 거라도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러면 숨길 필요가 없어지나.
“선생님,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뭐라고 했어?”
잠깐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헬리오스의 부름에 정신 차렸다.
내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깊은숨을 뱉었다. 아니 왜 그런 표정인데. ‘이 선생님 조사라니 정말 괜찮은 건가’라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조사하고 있는 거…….”
“여기 계셨군요.”
누군가 헬리오스의 말을 가볍게 끊어버렸다. 연구실로 들어온 사람은 시리우스였다. 단정한 얼굴을 한 시리우스에게 어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찾아다녔습니다.”
시리우스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헬리오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헬리오스와 시리우스를 같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따지자면 쌍둥이를 제외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는 시리우스를 본 적 없는 거지만.
“무슨 일 있어?”
시리우스는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헬리오스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어디까지 올 작정인 거지? 나는 시리우스가 너무 가까이 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다가 멈췄다. 그에게 물러섰다가 좋게 끝난 날이 한 번도 없었기에.
“녹색 스카프가 잘 어울리네요.”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리본이 살짝 틀어진 스카프를 정리했다. 오늘 내가 어떤 용도로 스카프를 착용했는지 알고 있으면서 짓궂게 내 귀에 속삭였다.
나는 시리우스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전에 헛기침을 했다. 애써 침착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시리우스 학생. 지금 수업 중일 텐데 나를 왜 찾았지?”
일부러 딱딱하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는 나와 헬리오스를 번갈아 보곤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에게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상담?”
아니 왜 귀까지 빨갛게 물들이며 말하는 건데.
과연 저것도 연기인 걸까 고민하며 대답했다. 임시지만 담임선생님이었으니 학생들 케어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네. 그런데 형님도 같이 계실 줄은 몰랐네요.”
“오랜만이군.”
지금까지 무시하다가 이제 인사한다고? 속으로 태클을 걸었지만 끼어들진 않았다. 형제끼리 나누는 안부 인사치고 너무 어색했다. 원작에서는 좀 더 친했는데?
‘헬리오스는 저주받은 시리우스를 동정해서 챙겨줬고, 시리우스도 그나마 자신을 사람 취급해주는 헬리오스를 형이라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건 뭐.’
남보다 못한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형제 사이에서 가만히 있었다. 이럴 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고지. 쌍둥이도 나보고 오지랖 넓다 했으니 좀 자제해야겠어.
“둘이서 뭐하고 계셨어요? 이렇게 인적이 없는 곳에서.”
“…….”
시리우스의 질문에 헬리오스는 뜬금없이 나를 쳐다봤다. 어쩌라고 네가 알아서 변명해야지. 그러나 그는 그저 나만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헬리오스를 보고 있던 시리우스도 그를 따라 내게 시선을 옮겼다.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한 가운데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지 3초도 안 지났는데 내가 나서야 했다.
‘형제 사이에 나를 끼워서 고통 주는 거냐고.’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헬리오스의 시선은 무시할 수 있는데 시리우스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입은 웃고 있으나 눈에선 희미한 광기가 묻어나왔다. 왠지 조금만 삐끗하면 바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기분!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어쭙잖은 거짓말을 하다가 들켰을 경우와 솔직하게 말할 경우 어느 쪽이 더 귀찮을지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가 훨씬 귀찮을 것 같았다.
“테러 조사하고 있었어.”
“테러 조사요?”
“선생님!”
헬리오스가 내 소매를 붙잡으며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하냐고 다그쳤다. 아니 그럼 네가 변명하지 그랬어. 시리우스는 테러 조사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위험한 일 아니에요?”
“음, 괜찮을걸.”
“…….”
시리우스는 위험한 일일까 봐 걱정된다며 자기도 돕겠다고 했다. 헬리오스는 뭐가 불만인지 구겨진 표정을 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가 시리우스에게 솔직하게 말한 건 믿을만해서 그런 거니까.”
헬리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니 자기 동생도 의심하는 건가. 시리우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또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는 건가 싶어서 기운 빠졌는데 헬리오스가 삐뚜름하게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둘이 많이 친한가 봐요.”
“네. 많이 친해요.”
거기다 대답은 시리우스가 했다.
‘그렇죠’라고 하며 내게 되묻는 시리우스의 얼굴을 보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 얼굴에 너무 약했다. 그럴수록 헬리오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래! 우리 조사해야지. 뭉쳐 다니면 시간 낭비니까 각각 떨어져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보고 1시간 후에 여기서 다시 모이자. 그럼 나는 2층 맡을게! 좀 이따가 봐.”
셋이서 함께 움직이면 고통 받을 내 모습이 눈에 선했기에.
나는 혹여 헬리오스나 시리우스가 붙잡을까 봐 허겁지겁 연구실에서 나왔다. 마음속으로 아디오스를 외치며.
‘결국 단검은 없었네.’
원작에 있었던 장소에도 내가 찾은 2층에도 없었다.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4일째. 검성은 내가 아카데미에 도착하고부터 수사에 나섰으니 어제나 그저께 현장에서 단검을 발견했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신경 안 써도 괜찮겠다.
‘헬리오스가 조사하는 것만 적당히 방해하면 되겠지.’
2층에 있는 방들을 꼼꼼하게 뒤졌으나 테러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폭발한 아티팩트 파편조차도.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의 폭발이라면 건물이 멀쩡할 리는 없는데.’
마법은 과학과 다르니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폭발의 세기를 조절한 거겠지?
의심을 합리화하며 1층으로 내려가자 헬리오스와 시리우스가 먼저 와있었다. 얘네 조사는 한 걸까. 나만 찾아다니고 계속 여기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는데 헬리오스가 들고 있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거 어디서 찾았어?”
다짜고짜 헬리오스의 손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물건을 낚아챘다.
내가 열심히 찾고 있던 단검이었다. 검집에 새겨져 있는 황실 문양은 틀림없었다.
“3층에 있었습니다.”
“3층?”
말도 안 돼. 3층이라니.
어째서 그곳에 있었던 거지? 원작과 달라졌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성이었다. 단검이 떨어진 장소 같은 고유한 사건은 바뀌지 않았어야 했다. 데이지가 없어도 일어난 테러 사건처럼.
놓친 부분이 있다. 단검이 떨어진 장소가 바뀌었다는 것은 테러의 어떤 부분도 바뀌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