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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지가 없어서?’
1층에 있어야 할 단검이 3층에 있었던 이유가 뭘까. 단검을 물끄러미 보며 상념에 빠졌다. 1층에 없기에 당연히 검성이 챙긴 줄 알았더니, 시리우스도 아니고 하필이면 헬리오스가 발견할 게 뭐람.
어이가 없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단검이 검성을 범인으로 모는 정확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조사하다가 떨어트렸다고 하면 되니까.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
“루카리온 선생님 건가? 조사하다가 떨어뜨렸나 보다.”
나는 뻔뻔하게 먼저 선수를 치며 헬리오스의 표정을 살폈다. 시리우스는 관심 없어 보였고.
그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헬리오스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단순하게 테러 현장에 단검이 떨어져 있었으니 검성이 범인! 이라고 단정 짓지 않고, 머릿속에서 내가 말한 가설까지 포함해 다양한 추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일기장이 없는 이상 테러 동기도 모를 테니 여기선 무조건 우기자.’
소설에서는 검성이 한 번도 온 적 없는 테러 현장에 단검이 놓여 있어서 변명의 여지가 없었고, 그래서 데이지와 헬리오스가 검성의 방에 몰래 침입한 것이었다.
“내가 루카리온 선생님에게 전해 줄게.”
“만약 루카리온 선생님이 범인이라면요?”
“루카리온 선생님이? 에이 설마. 그분이 범인이었다면 원장님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 선에서 끊었겠지. 굳이 나를 아카데미까지 불러왔을까?”
“…….”
내는 최대한 능청스럽게 말했다. 헬리오스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약간 수긍한 얼굴이었다. 오, 효과 있네. 나는 헬리오스를 설득하기 위해 가까이 가려 했으나 제지당했다. 내 손목을 잡은 시리우스 때문에.
“선생님, 저는 쥐새끼를 발견했어요.”
쥐새끼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리우스가 발견했다는 쥐새끼를 내려다봤다. 뒤구르기 하면서 봐도 사람인데요.
“드란 선생님?”
헬리오스가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살피더니 당황하며 말했다.
선생님이라는데 시리우스가 사고 친 건 아닐까. 나는 기절해 있는 선생님이 일어나면 무릎 꿇고 사죄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살금살금 세르니아 선생님을 뒤쫓기에 뭐 하나 보고 있었는데 품에서 검을 꺼내더군요.”
챙그랑 하는 금속 소리를 내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 사람은 갑자기 왜 나를 노리는 거지. 어디 가서 죽임당할 짓은 안 하고 다녔는데.
“건물에 우리 말고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헬리오스가 드란이라는 기절한 선생님의 품을 뒤지며 시리우스를 향해 물었다.
이야, 둘 다 아카데미 선생님에게 너무 막 대하는데. 아니면 범인일지도 모르기 때문인가?
‘처음 보는 선생님이다. 소설에 이름도 등장한 적 없는데.’
정말 딱 한 줄 나오는 엑스트라였다면 기억 못 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조연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이걸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건 아티팩트인가?”
시리우스가 꺼낸 건 남색 망토였다.
“네. 은신 마법에 소리 감소마법 등 자잘한 마법이 섞여 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알아차렸지.”
“마법 아티팩트니까 당연히 마력이 흐르겠죠. 은신 마법이라 해도 미세한 마력의 파동을 숨길 수 없거든요.”
마법 천재의 발언 잘 들었습니다.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어쨌든 이 사람이 망토를 덮어쓰고 우리를 미행했고, 시리우스가 잡았다는 뜻이었다.
“잠깐만 그럼 너는 처음부터 이 사람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네.”
“어째서 말 안 했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어느 부분이 필요 없는지 말해줄 사람? 나는 뒤집어지려는 속을 다스리며 한숨 쉬었다. 그래. 시리우스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다음부턴 네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나에게 다 말해줄래?”
“알겠습니다.”
말은 또 잘 들어요.
절대 시리우스의 말간 웃음을 보고 화가 가라앉아서가 아니었다.
“특별한 건 없네요.”
“이미 망토부터 특별한데.”
“들고 있는 것 중에서요.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다면 좋을 텐데.”
헬리오스의 의심이 검성에서 이 사람으로 이동했다.
쓰러진 남자는 외모도 평범했다. 수수해 보이는 인상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찬찬히 얼굴을 살펴봤으나 역시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었다.
“선생님의 말대로 망토가 제일 이상하네요.”
시리우스가 내 편을 들며 이야기했다. 복합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는 아카데미 선생님 월급으로 절대 살 수 없다며. 굳이 절대라고 붙이지 않아도 선생님 월급 박봉인거 안다고. 나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르니아 선생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글쎄요. 처음에는 1층에서 저희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데 흩어지자 형님을 따라서 3층으로 갔습니다.”
바로 나를 죽이러 온 게 아니라 3층에 갔다고?
냄새가 난다. 구린 냄새가! 단검을 떨어트린 사람이 검성이 아니라 이 사람이라면? 그것도 일부러 헬리오스의 손에 들어가도록.
‘증거 조작을 한 건가?’
제일 먼저 생각 난 것은 서술 트릭이었다.
1인칭 소설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상황이 아니라 오직 데이지의 시점에서만 보여줬기에. 만약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은 저 남자가 의도적으로 데이지 앞에 단검을 놔둔 거라면?
‘지금은 데이지 대신 헬리오스에게 전한 거고.’
왜 내가 아니라 헬리오스에게 간 거지? 데이지가 없었으면 나에게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나를 죽이려 했다.
“일단 묶자.”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헬리오스는 어디서 줄을 준비했는지 기절한 사람을 포박했다. 능숙한 솜씨에 감탄하다가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소설 속에서 누군가의 음모에 빠진 검성이 누명을 쓰고 국외로 추방당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보통 결백을 주장하지 않나? 어째서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을까.’
그는 원작에서 테러 범인임을 추궁하는 데이지와 헬리오스에게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억울함을 토로할 터인데 그는 묵묵히 짐을 싸서 아카데미를 나갔다.
데이지는 영웅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범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국외로 나갔다고 믿었었다.
‘이젠 검성이 범인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리네.’
나는 머리를 짚으며 고뇌에 빠졌다.
임시 선생님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검성이 범인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었다. 그저 공작이랑 인연도 있고, 여동생의 복수는 정당방위라고 생각해서 사건을 덮으려고 한 것이었다.
사상자도 없었고 아카데미 내부에 큰 혼란을 준 사건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피해 본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헬리오스가 기절한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도 머릿속이 복잡한지 뒷머리를 헤집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처음에는 단검을 보고 루카리온 선생님을 범인으로 의심했어요. 아카데미에서 황실에서 하사 받은 단검을 가지고 있을 사람은 루카리온 선생님뿐이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 말을 들고 보니 조사하다가 떨어트렸을 가능성도 있더군요.”
원래라면 헬리오스가 고민할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검성이 범인 이고, 테러사건을 일으키는 중 단검을 떨어트렸다’거나 ‘테러사건을 조사 중인 검이 조사 도 중에 단검을 떨어트렸다’로. 내가 유도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시리우스가 발견한 남자 때문에 모든 전제가 엎어졌다.
‘반대로 시리우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랑 헬리오스는 저 남자의 존재를 절대 눈치채지 못했겠지.’
완전히 농락당했을 것이다.
와서 다행이라 해야겠지. 내가 새로운 상황을 만든 시리우스를 힐끔 보자 그도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음, 역시 무슨 생각하는지 도통 모르겠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는 헬리오스와 달리 정말 짐작이 안 가는 녀석이었다.
“문제는 드란 선생님이죠. 제가 알기론 루카리온 선생님이 꾸린 조사팀에 드란 선생님도 포함됐어요.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하진 않은데 어째서 조사팀의 다른 선생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드란 선생님만 있는 걸까라는 새로운 의문이 더해져서 머리가 너무 복잡합니다.”
응. 나도 그래.
헬리오스의 말에 공감을 하며 새로운 사실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드란이 조사팀의 일원이라는 것을.
“나는 이 선생님을 보고 한 가지 가설을 떠올랐어.”
“뭔가요?”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니까 끝까지 듣고 판단해.”
헬리오스에게 방금 생각한 가설을 설명했다.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듣던 헬리오스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드란 선생님이 루카리온 선생님을 범인으로 몰기 위해 일부러 단검을 저에게 떨어트렸다니. 단순히 현장 감시를 맡아서 저희를 미행한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드란 선생님이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시리우스가 착각한 거라면?”
시리우스는 고개를 저으며 검이 내 목을 향하는 것을 보고 기절시켰다고 했다. 와우, 나도 모르는 사이 죽을 뻔했구나. 벌써 몇 번째인지. 새삼 시리우스가 있어서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드란 선생님이 너와 내가 하던 대화를 듣고 자신의 계획에 내가 방해 된다고 생각했다면?”
“세르니아 선생님은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으, 응.”
팩트 폭력을 멈춰주세요.
너무 맞는 말이라 무심코 수긍해버렸다. 헬리오스의 말에 민망했으나 헛기침을 하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흠, 아직은 아무것도 안 했지만 아까 대화할 때 내가 삼촌의 추천을 받고 테러를 조사하러 나왔다고 했잖아. 혹시라도 루카리온 선생님에게 누명 씌우려는 계획이 틀어질까 봐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지.”
시리우스가 자신이 올 때부터 드란은 망토를 쓰고 숨어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소설 내용 그대로 1층 마력석 연구실에 단검을 놔두려고 했었는데 내가 와서 몸을 숨긴 게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네요.”
헬리오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현장에 도착해서 생겼던 의문들 몇 개가 해소된다. 애초에 검성이 범인이 아니라면 후작가 차남이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검성에게 누명을 씌어서 얻을 게 뭐지?’
“루카리온 선생님에게 누명을 씌워서 드란 선생님이 얻는 게 뭘까요?”
시리우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독심술 한 줄.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해서 놀라서 멍하니 있었고 헬리오스는 머뭇거릴 뿐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