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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57화 (5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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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의 눈썹이 11시 11분을 가리키는 시계 침처럼 삐죽 솟아올랐다. 그는 머리를 짚으며 분노를 억눌렀다.

“내가 지금 화내는 건 단순히 테러 현장에 몰래 들어와서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빛의 화살과 사라진 침입자들의 기척. 다른 선생들은 정확하게 무슨 일인지 눈치 못 챘다만 나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다 알고 있었나.

검성을 속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는 복면인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도 루카리온 선생님의 대답을 듣기 전엔 먼저 말할 수 없습니다.”

“너!”

내가 고집을 부리자 검성은 화가 끝까지 난 얼굴이었으나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분노를 삭이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내가 넬의 얼굴을 생각해서 한 번 참는다. 질문은 뭐지?”

내심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검성이 참아줬다.

그가 화낼 만한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 질문은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해야 했기에.

“루카리온 선생님,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들고 계신가요?”

“……사건과 관련 있는 건가?”

활화산처럼 분노로 타오르던 검성의 얼굴이 삽시간에 냉정해졌다.

‘예리해. 아니면 이미 예상하고 있었나?’

사실 검성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나 확신이 없었다. 원작에서 검성이 했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에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지. 내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하사받은 단검은 황궁에서 나올 때 반납했다.”

검성의 대답에 내 귀를 의심했다. 하사품인데 그게 반납이 되는 건가?

나는 지금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도둑맞았다는 말이 나올 거라 예상했었다. 상상 이상이군. 반납이라는 단어에 의아하게 쳐다보자 검성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라면서 긴 이야기를 꺼냈다.

“그땐 황권이 약했거든. 전 황제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기 바빴어. 귀족들은 다들 나를 싫어했고 내가 나가겠다고 하자 입을 모아 하사품을 내놓으라더군. 더러워서 던지고 나왔지.”

아무리 둘밖에 없다지만 그는 전 황제에 대한 증오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어쨌든 이로써 검성은 확실하게 범인이 아니었다. 드란이 나타나 원작과 전혀 다른 전개가 되어 버려서 불안했었다. 왠지 사방이 적인 것 같고, 헬리오스도 의심되었기에. 드디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나는 안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테러 현장에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있었습니다. 헬리오스가 들고 있는데…….”

“그래서 ‘그건 말하지 마세요.’ 라고 한 거군.”

드란에 관한 설명을 하려는데 헬리오스의 이름이 나오자 검성이 콧방귀를 뀌며 내 말을 잘랐다. 아까 입 모양으로 뭐라고 하더니. 들키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들켰네. 조금 떨어져서 초조하게 우리를 지켜보는 헬리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차라리 자리를 이동하는 게 낫겠다.’

작게 말하면 충분히 들리지 않을 거리였으나 이왕이면 안전한 장소에서 말하고 싶었다. 검성이 있는 이상 누가 다가오면 바로 기척을 느끼겠지만 드란이 쓰고 있었던 은신 망토 같은 아티팩트를 사용할 수도 있으니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나는 이야기 흐름이 끊어진 김에 자리 이동을 권했다.

“그랬나요? 저는 못 알아들었는데. 그보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나머지는 원장실에서 해도 되나요?”

“흠. 좋아. 나도 원장님에게 보고드릴 게 있으니 같이 가지.”

검성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더니 수긍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원장실이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한 것처럼 그도 원장님을 가장 신뢰하는 것이겠지.

우리는 다시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아갔다. 헬리오스와 시리우스는 그대로였으나 검성과 함께 왔던 선생님과 드란, 복면인은 없었다.

“어디 갔지?”

“부상이 심각해서 부상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뭐? 딱 봐도 이상한 놈들 같아 보이던데 거기 같이 뒀다고?”

“그, 그렇지만 드란 선생님도 같이 있는데…….”

사제를 부르러 갔던 키 작은 남자는 검성이 화내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검성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봤다. 내가 입 모양은 못 읽어도 눈빛은 잘 읽지! 대충 감으로 찍어 맞추는 거지만.

“드란 선생님과 수상한 남자를 격리해서 수감해 주세요. 아, 그리고 자결하지 못하도록 조치 부탁드립니다.”

“드란 선생님도요?”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되물었다. 며칠 전만 해도 같이 조사하던 동료였으니 더 놀랐겠지. 검성은 철저히 하라며 몇 번 강조하고 얼른 가보라며 남자를 보냈다.

“너희는 나중에 보자. 그냥 안 넘어갈 거니까 둘 다 방에서 근신하고 있어라.”

“벌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방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검성의 처분에 헬리오스가 발끈하며 외쳤다. 그는 헬리오스의 어깨를 꾹 누르며 여기는 아카데미고 이건 선생님이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아무리 황태자 신분이라지만 명목상으로 학생은 보호받아야 하며 신분에 상관없이 선생님의 말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헬리오스는 입을 다물고 돌아가야 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말 루카리온 선생님 아니었으면 다루기 힘들겠네.’

만약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검성처럼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 검성의 단호함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시리우스가 속삭였다. 머릿속에서 직접.

[저는 복면인을 감시하고 있겠습니다. 금제를 푸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텔레파시 같은 마법으로 당당하게 검성의 말을 안 듣고 탈출하겠다는 시리우스를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그를 제외하곤 아카데미에서 금제를 해제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거기다 아카데미 내에 드란의 조력자가 더 있을 테니 시리우스가 감시하고 있는 편이 안전했다.

“시간 없으니 얼른 가자.”

빨리 가자고 재촉하던 검성은 처음 만난 날 마차에 태웠던 것처럼 나를 달랑 들어 올렸다. 갑자기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고 시리우스에게 대답도 못했다.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짐짝처럼 어깨에 메여서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똑똑!

빠르게 바뀌는 풍경에 멀미를 할 때쯤 발이 바닥에 닿았다. 울렁이는 시야를 가다듬고 있는 사이 검성은 노크를 하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었다.

“때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거대한 마력의 파동을 느끼고 나가보려고 했거든요.”

원장님은 우리를 기다렸던 것처럼 반겨줬다. 검성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더니 피곤한 숨을 뱉으며 말했다.

“역시 머리 쓰는 건 저랑 안 맞아요. 이제라도 적임자를 새로 뽑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루카리온 님에게 머리를 바란 것은 아니랍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 맡긴 거죠.”

오, 웃으면서 뼈 때리는 게 수준급이네요.

검성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빠득 갈았다. 원장님은 그런 검성을 무시하고 내 존재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테러 사건과 전혀 연관 없는 내가 검성과 함께 있었으니.

“세르니아 양은 어쩐 일로?”

“이 녀석이 뭔가를 발견해서 데려왔습니다. 꽤나 중요한 사안처럼 보였고.”

내게 머무르는 고동색 눈동자엔 옅은 신뢰가 담겨있었다.

‘내가 삼촌의 조카라서?’

겨우 만난 지 3일밖에 되지 않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검성과 대면한 시간은 더더욱 적었다. 그런데도 눈빛에서 느끼지는 묘한 신뢰감은 그만큼 공작을 믿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군요. 세르니아 양, 어떤 걸 발견했나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자 원장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일깨웠다. 그제야 정신 차린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늘어놓았다.

“드란 녀석이 혼자 건물 경비를 선다고 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야기를 끝내자 검성은 드란에게 분개하며 테이블을 내리쳤고, 원장님은 침중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다.

“드란 선생님 혼자 경비 서는 게 이상한 건가요?”

“그 녀석 마법사인데 방구석 폐인 기질이 있어서 원래는 이런 사건에 참여도 안 하거든.”

나는 드란이 마법사라는 점이 신경 쓰였다.

과연 그는 모르고 금제를 받은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금제를 받은 건지. 전자의 경우는 드란이 매우 멍청하거나 금제를 건 마법사의 실력이 월등히 높거나. 후자의 경우는 영혼에 금제를 새길 만큼 충성도가 높다는 뜻인데.

‘딱 이거다 하는 느낌이 없네.’

언뜻 보면 후자의 경우가 타당성 있어 보이나,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짙은 마법사들이 영혼의 금제를 새길 정도로 누군가에게 충성하는 일은 드물었다. 드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이 어두운 얼굴을 한 원장님이 입을 열었다.

“심각하네요. 내부가 이렇게도 부패했을 줄이야. 제 잘못이에요.”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죠. 이건 원장님 탓이 아니라 언제가 터졌을 일입니다. 아카데미는 너무 고여 있었어요.”

검성의 위로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띠웠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뒷짐을 진 채 창가로 걸어갔다. 먼 풍경을 바라보던 원장님은 감정을 추스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색출해야겠네요.”

따뜻한 자비를 품고 있던 눈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인상이 180도 변했다. 처음 원장님을 봤을 때 마법사 특유의 분위기가 안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냉정한 얼굴은 그림책에 나오는 마법사 그 자체였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나는 그녀가 마냥 인자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법사들이야 마나 심장을 걸고 맹세를 시키면 되지만 검술이나 학문 쪽 선생님들이 문제네요.”

“검술 쪽은 내가 맡지.”

그리고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왜, 뭐.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에게 무슨 기대를 하는 걸까. 시선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럼 학문 쪽은 세르니아 양이 맡아주시겠어요?”

“아니요. 저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아카데미에 온 지 3일밖에 안 됐고, 다른 선생님들이 어떤 성격인지도 모르는데 내통자를 어떻게 추려내겠어요?”

지극히 당연한 의견이었다.

원장님은 마법사이고 검성은 소드마스터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일개 선생님. 심지어 임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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