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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나는 단호하게 못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장님은 싱긋 웃으며 세르니아 양이라면 맡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대체 뭘 믿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학문 선생님들이 마나 심장을 걸고 맹세할 것도 아닌…… 잠깐, 맹세?’
만약 다른 선생님들도 드란처럼 금제가 걸려있다면?
황후나 단검 같은 키워드로 금제를 발동시키면 배신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커.’
드란의 경우 운 좋게 시리우스의 대처가 빨라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의식을 찾을 확률이 매우 희박하다고 하는데, 금제를 마구잡이로 난발하면 스파이들은 전부 피를 토하고 죽지 않을까.
“뭔가 방법이 떠올랐나요?”
“네?”
어느새 가까이 왔는지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원장님이 인자하게 웃으며 물었다. 독심술사인가.
“그게 좀 위험한 방법인데요……. 죽을 수도 있고…….”
“마나 심장에 맹세하는 것도 위험한 방법이랍니다. 뭐든 좋으니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시면 너무 무섭습니다.
불같이 화냈던 검성보다 빙하처럼 냉정해진 원장님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며 금제로 구분하는 방법을 말했다.
“오, 그것도 괜찮네요. 드란도 금제에 걸려 있었다고 했죠.”
“네. 다만 핵심인물에게만 걸려있는 건지, 이번 일에 연관된 사람 전부 걸려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원장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어차피 금제가 걸려 있다면 정보를 얻기도 힘들 거고 연관된 세력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나, 그녀의 입장에서는 아카데미에 위협이 되는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싶다고 했다.
“그럼 결계 관리자부터 만나러 갈까요?”
“네?”
“적어도 침입자들의 피를 등록 장치에 넣을 정도면 핵심인물일 테니.”
오, 날카로운 판단. 그녀의 말에 감탄하며 일어섰다.
원장님은 따라 나오던 검성에게 행정실로 가서 재학생 명단과 재직 중인 교직원 명단을 가져오라 했다.
“그걸 왜 내가 가야 합니까? 다른 사람 시켜요! 세르니아도 있고.”
“어머, 세르니아 양은 아직 위치를 못 외운걸요. 행정실 위치를 아는 사람이 가는 게 빠르다고 생각합니다.”
케인에게 행정실의 위치를 대강 들었으나 원장님의 말이 맞다는 얼굴로 얌전히 있었다. 검성은 귀찮은 건 꼭 자기 시킨다고 궁시렁거리며 사라졌다.
“자, 우리도 갈까요?”
“네.”
결계 관리 장치는 아카데미 중앙에 있었다. 바로 어제 갔던 시계탑 꼭대기였다.
‘시계탑이 장식이 아니었구나. 조경 건물로 세워 놓은 거라 생각했는데.’
결계 관리실이라면 중요한 건물일 텐데 그런 곳에 막 사람을 가두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라는 의문을 외면하며 시계탑에 도착했다.
“아카데미 설립 전에는 긴 기둥 모양의 탑이었다고 전해지는 장소죠.”
“계단을 다 올라가야 하나요?”
시계탑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주는 원장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턱이 빠질 정도로 많았던 계단이 기억나서.
“설마요. 요즘 관절이 안 좋아서 3층까지 오르는 것도 고역이랍니다.”
원장님은 상큼하게 웃으며 삭신이 쑤신다고 했다. 비오는 날은 더하다는 궁금하지 않은 잡담까지 들으며 시계탑 안으로 들어갔다.
“세르니아 양, 이쪽으로.”
원장님이 가리킨 곳은 시계탑 중앙바닥이었다. 기묘한 화살표가 겹쳐져 나침반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서자, 원 주위로 푸른빛이 감돌았다.
‘텔레포트 마법인가?’
시리우스가 자주 썼던 텔레포트가 생각났으나 예상은 틀렸다. 계단은 정사각형인 벽을 따라 뱅글뱅글 설치되어 있었고 중앙은 뻥 뚫렸는데, 그 사이로 빛의 판이 엘리베이터의 역할을 하며 우리를 위로 옮겨줬다.
“마력을 흘려야 움직이는 장치입니다. 결계 관리실까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계단은 안 올라가도 되죠.”
“그렇다면 학생들도 이용할 수 있는 건가요?”
학생들도 쉽게 들어갈 수 있다면 확인해야 할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고작 100명도 안 되는 교직원과 한 학년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숫자 차이는 컸기에. 내가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원장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학생들은 당연히 모르죠. 아카데미에 고대 결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도 드물걸요.”
“고대 결계는 유명하지 않나요?”
“뭐, 안전성을 말할 때 늘 결계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이들은 그런 따분한 주제에 대해 관심 없으니까요.”
맞는 말. 고대 유물에 대해 흥미를 가진 학생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 가지지 않을 주제긴 했다. 그들에겐 더 자극적인 일이 훨씬 많았기에. 엘리베이터 마냥 올라가던 빛의 판이 시계탑 꼭대기에 도착했다. 나는 꼭대기라기에 종이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시계탑 지붕 위였다.
‘마법은 만능이구나.’
판이 뾰족하게 솟은 지붕으로 멈추지 않고 올라가서 원장님의 소매를 꼭 잡으며 불안에 떨었는데 지붕은 환상 마법으로 결계 관리실을 숨겨뒀다고 한다. 지붕을 통과하자 풍경이 바뀌었다. 원래라면 시계탑 지붕 위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본 광경은 차원이 달랐다. 예전에 봤던 영화에 나온 장면 같았기에.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우주가 배경인 SF영화였는데.’
고대 유물이 아니라 미래 유물이 아닐까.
마치 SF영화에 나오는 우주선처럼 새카맣지만 공간에 푸른빛으로 이어진 마법 회로가 기하학적으로 얽혀있었다. 내가 넋을 놓고 결계 관리실을 감상하고 있는 사이 원장님은 관리자들에게 평화롭게 인사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달사항이 있으니 관리자분들 모두 모여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관리실 중앙에는 농구공만 한 크기의 동그란 마력석이 떠 있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뿜는 마력석은 우주에서 본 지구를 떠오르게 했다. 사진으로 봤었지만.
“저 마력석이 결계의 핵심입니다. 피를 넣는 곳이기도 하죠.”
내가 지구를 닮은 마력석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원장님이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손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할머니같이 내가 모르는 부분을 자세히 알려줬다.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자 검은 로브를 걸친 관리자가 다가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나머지 관리자들이 다 모인 곳으로.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은 들었나요?”
검은 로브를 착용하고 있는 관리자들이 원장님의 말에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무슨 일 있었는데?’, ‘너는 알고 있었어?’, ‘며칠 전에 폭발이 났다고.’ 이런 말들이었다. 개인주의가 심한 마법사답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 다수였다.
“흠흠, 제가 오늘 여기 온 것도 그 사건 때문입니다. 세르니아 양.”
“네.”
나는 10명 채 되지 않는 관리자들을 둘러봤다. 다들 검은 로브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관찰하기 힘들었으나 유독 한 사람 눈에 걸렸다. 불미스러운 사건이라는 말에 반응이 없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나는 단어를 골랐다.
금제 걸린 단어는 여러 개 있을 테지만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두 개밖에 안 됐다. 드란이 반응한 단검과 내가 추측하고 있는 황후라는 단어.
‘솔직히 황후에 반응하는지 알아보고 싶은데.’
하지만 옆에 원장님이 있어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에게도 드란의 금제에 설명할 때 단검이라고 말했다. 황후와 연관 있는 것 같다는 소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물론 원장님과 검성은 믿지만 이건 신뢰와 별개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주제였기에.
“현장에서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발견됐습니다.”
관리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으나 피를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 있던 원장님도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왜 반응이 없지? 금제에 걸리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다. 금제는 분명 걸려 있을 것이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개인마다 단어가 다른 건가? 드란은 단검으로 증거를 조작하는 역할이라서 키워드가 단검이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너무 섣부르게 판단했다. 금제 걸린 단어는 다 똑같을 거라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리고 오늘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검은 복면인들이 테러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누군가 침입자를 등록시켰다는 뜻이죠. 이렇게 결계 관리실에 방문한 것도 그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금제에 관련된 키워드를 찾기 위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부 했다. 단검에 반응을 하지 않았을 때는 잠시 멈칫했으나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아카데미 결계에 외부인을 등록했다는 사실에 관리자들은 경악했다. 그들에게 결계 관리 일은 신성한 일이었기에. 소란이 커졌지만 금제에 걸린 사람은 드러나지 않았다.
‘결계에 관련됐으면서도 말해선 안 되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침입자, 복면인, 몰래 등록시켰다는 단어에도 반응이 없자 초조해졌다.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고 스파이 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려줄 단어. 대체 뭐지?
“세르니아 양, 반응이 없다면 마나 심장을 걸고 맹세하면 되니 괜찮습니다.”
초조해하는 기색을 읽은 원장님이 귓속말을 했다. 고민은 짧았다. 원래 기습은 몰아쳐야 하는 법! 관리자들이 모두 마법사라 다행이었다.
마법사의 맹세는 저주와 비슷한 원리다.
마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맹세는 강력한 효력을 가지는데 맹세를 깰 경우 걸었던 대가만큼 데미지를 입는다. 마나 심장을 걸고 맹세를 한다는 것은 마법사이길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침입자를 등록시킨 관리자를 찾기 위해 마나의 심장을 걸고 맹세를 해주세요. 다들 결백하다면 아무 일도 없겠죠.”
원장님이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마나 심장을 건 맹세는 마법사들이 가장 꺼린다. 그렇기에 가장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다들 사건의 심각함을 아는지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 명씩 차례로 결백을 증명하는 맹세를 해주세요.”
로브를 벗고 한 명씩 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내가 의심했던 사람도 덤덤하게 맹세를 했다.
‘맹세를 했어? 아무 이상 없잖아. 그냥 내가 착각한 건가.’
차례로 맹세를 하던 중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남자가 있었다. 엄지손톱을 잘근 씹으며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곧 그의 차례가 돌아왔고 우물쭈물 망설이며 맹세를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