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레빌, 어서 하세요. 거부한다면 침입자를 등록시킨 배신자라 간주하고 엄벌을 내리겠습니다.”
원장님이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그러나 레빌이라 불린 남자는 맹세 대신 내가 처음 의심했던 사람의 멱살을 잡았다. 근처에 있던 관리자들은 그와 거리를 벌리며 경멸하는 눈으로 봤다. 맹세를 못 하는 시점에서 이미 범인이라는 낙인이 찍혔기에.
“레베카! 네 짓이잖아!”
하얗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여자를 몰아붙였다. 정작 여자는 멱살이 잡혔음에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데 멱살을 잡힌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괜한 누명을 씌우는 거면 맹세부터 하는 게 어때.”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여자를 내팽개쳤다. 씩씩거리며 화내던 그는 갑자기 원장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억울한 얼굴을 했다.
“원장님 아닙니다. 저는 속았어요! 함정에 빠졌다고요!”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던 여자는 부딪힌 곳을 털며 일어났다.
“네가 정말로 내게 속은 거라면 이렇게 맹세를 하면 되잖아. ‘나는 레베카의 거짓말에 속아서 침입자를 등록시켰습니다.’ 라고.”
남자는 진심으로 억울한지 ‘내가 못 할 줄 알아?’하고 큰소리를 치며 그 자리에서 바로 맹세를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마력이 일렁였다. 여기까지는 다른 마법사들의 맹세와 똑같았다.
“컥!”
그러나 그는 심장을 부여잡고 피를 흘렸다. 마치 금제에 걸렸던 드란처럼.
“멍청한 레빌.”
여자는 일그러진 웃음을 띠었다. 혐오와 경멸을 담은 눈동자와 반대로 올라간 입꼬리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있다는 듯이 비틀렸다.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 누나…… 대체 무슨, 짓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레베카를 쳐다봤다. 이름도 비슷하더니 친남매인가? 레빌은 쿨럭 거리며 피를 뱉더니 초점이 흐려지는 눈으로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안 돼……. 마…… 마력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레빌은 스파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맹세 때문에 쓰러진 거지 금제와는 상관없기에.
‘레빌은 레베카의 말을 듣고 침입자를 등록시켰어.’
이건 진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짓말에 속았다는 부분이 틀린 건가? 레베카는 진실에 근접하면서 레빌이 납득할 만한 말로 속였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원장님에게 물었다.
“원장님 맹세를 할 때 일부분만 틀려도 맹세의 대가를 받나요?”
“네. 한 치의 거짓말조차 피해갈 수 없기에 마법사들은 맹세를 하는 걸 꺼려하죠.”
확신했다. 레베카는 교묘하게 맹세의 틈을 파고들었다. 진실을 바탕으로 했으나 두루뭉술한 문장으로 상대방을 착각시킨 것이다.
‘나는 침입자를 등록시키지 않았다.’ 라고 말한 것은 진실. 왜냐하면 그녀가 레빌을 시켰으니까. 레빌에게 어떤 말로 침입자를 등록시키라고 했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그때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빌이 ‘거짓말에 속아’라는 맹세에 반응해서 마나의 심장이 파괴됐다. 레베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니.
“원장님은 레빌이 내통자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쓰러진 레빌을 보며 우왕좌왕하는 마법사들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장님도 이 상황이 썩 이해 가지 않는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내 물음에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찝찝한 부분이 있지만 맹세가 잘못될 리는 없죠.”
“레베카가 맹세의 빈틈을 이용해서 레빌을 속였을 수도 있습니다.”
“맹세에 빈틈이라니…….”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추측을 조심스럽게 원장님에게 설명했다.
“원장님, 레빌을 어떻게 할까요?”
내 설명을 듣고 침음을 삼킨 원장님에게 관리자가 물었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고민하던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
“우선 레빌을 방으로 옮기고 한 명이 감시해주세요. 처벌은 이후에 정신을 차리면 하겠습니다.”
“아카데미 명성에 금이 가는 짓을 한 녀석입니다! 당장 추방해야 합니다.”
“맞아요. 평소에도 사고나 치고 다니더니. 쯧쯧.”
원래도 그의 평판은 바닥이었는지 가만히 둬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다. 원장님은 한숨을 쉬고 나를 힐끔 봤다.
“세르니아 양의 말이 제 편협한 사고를 일깨워줬습니다. 너무 맹목적으로 맹세를 믿고 있었다는 것을요. 한평생을 마법사로 살아왔기에 맹세가 잘못될 리 없다는 고정관념에 잡혀있었습니다.”
깊게 생각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다만 원장님은 마법사라서 마력의 맹세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기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보내주는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쥐어짰다. 방금 같은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금제를 안다면 좋을 텐데, 그녀가 어떤 말로 레빌을 속였는지 확실하지 않은 이상 맹세를 시키더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어.’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민했다. 그녀를 못 빠져나가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서 호흡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해주세요.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흥분한 마법사들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했다.
사건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레베카 님 한 번 더 맹세해주시겠어요?”
“내가 왜? 너는 레빌의 말을 믿는 거야? 이미 저 녀석 스스로 자백했잖아. 맹세가 그 증거고.”
그녀는 험악한 얼굴로 거부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레빌이 맹세로 마나 심장이 파괴됐으니 그녀는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당신이 내통자가 아니라는 것을 마나 심장을 걸고 맹세해주세요. 결백하다면 할 수 있겠죠.”
그녀는 태연한 척 했으나 불안하게 일렁이는 눈동자는 숨길 수 없었다.
“배후가 없다면 당당하게…….”
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서 레베카가 피를 흘렸기에. 드란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중간에 시리우스가 막아서 살았으나 레베카는 마나 심장이 파괴된 레빌보다 심각했다. 입에서는 피거품을 뿜었고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눈과 코, 귀에서 하염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금제!’
레베카의 몸이 허물어졌다. 바닥에는 그녀의 피로 흥건했다.
“꺄아아아악!”
비명이 관리실에 퍼졌다.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관리자들은 패닉 상태였다. 원장님도 당황해서 굳어 있었다.
“뭐야?”
관리자들을 진정시킨 사람은 타이밍 좋게 등장한 검성이었다.
그는 처참하게 죽은 레베카를 보며 혀를 찼다. 쉬운 일이 하나 없다며 뒷머리를 벅벅 헤집더니 관리자들을 통제했다.
“어이, 멍청하게 있지 말고 너랑 너는 시체를 감쌀 천을 들고 와. 나머지는 바닥 닦고, 저건 또 왜 쓰러져있어. 쟨 살아 있냐?”
“네. 저 사람은 살아있어요.”
검성은 한구석에 쓰러져있는 레빌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관리자들은 그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굳어 있던 원장님은 검성을 보고 정신을 차렸는지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쯧, 그래서 여기는 정리 끝난 건가?”
아마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정리는 대충 끝났으나 뒤죽박죽인 머리는 아직 정리가 덜 됐다.
‘드란은 단검을 걸리는 시점에서 아웃이기 때문에 단검이 키워드였고, 아카데미에 침입자가 발생하면 관리자를 추궁할 것이라 예상하고 배후를 키워드로 한 건가?’
‘결계’나 ‘침입자를 등록’ 같은 단어는 추궁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배후는 완전히 내통자라고 판명 났을 때 묻는 말이니까.
“드란은 시리우스 학생 덕분에 살았다고 했나요?”
“네? 네.”
금제에 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원장님이 침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 예상을 뛰어넘었군요.”
같은 상황이었다.
드란과 레베카. 느닷없이 금제가 발동해서 피를 토하는 똑같은 상황에서 시리우스는 막았고, 원장님은 막지 못했다. 마법사로서 자신보다 어린아이에게 졌다고 느낀 걸까.
‘하지만 시리우스는 저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마력을 느낄 수 있었고, 거기다 원작에서는 마탑주가 그의 죽음에 통탄할 정도였으니 비교해 봤자…… 아, 원장님은 모르니까. 마법사들은 이런 부분에서 예민하다던데. 음, 난감하네.’
나야 시리우스가 누구보다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시리우스의 강함에 이상한 열등감이나 질투를 느끼진 않을지 눈치가 보였다.
“이런 인재를 이제야 발견하다니 아쉽네요.”
다행히도 괜한 기우였다.
그녀는 진정한 교육자였다. 제자의 재능을 미리 발견해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시리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다가온 검성은 눈썹을 찌푸렸다.
“원장님 멍하니 뭐 하는 겁니까. 저만 일하고 있잖아요!”
“루카리온 님은 뒤늦게 도착해선 말이 많으시네요.”
오, 역시 웃으면서 칼같이 말하는 원장님은 무섭다.
검성은 아이처럼 입술을 비죽이며 툴툴거렸으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거북한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일부러 던진 것이겠지. 무겁던 공기가 조금 사라지자 구석에 쓰러져 있던 레빌이 시야에 들어왔다.
“근데 저 사람은 치료 안 해도 되나요?”
그들이 어떤 원한 관계로 얽힌 것은 모르겠으나 그는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레베카가 속인 말이 진짜였다면 들을 가치는 있어.’
죽으면 곤란했다.
내 질문에 원장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마나 심장이 부서져서 다신 마법을 못 쓰지만 생명엔 지장 없습니다. 그저 기절한 것뿐이에요.”
마법사 인생은 끝났다는 거군.
레빌은 깨어날 때까지 감시를 붙이고, 그가 행정실에서 받아온 명단과 결계에 등록된 이름을 대조하는 일만 남았다. 왜 명단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침입자를 걸러내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