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60화 (60/123)

-60-

“갑자기 많은 일이 있었네요. 현재 아카데미 내부가 뒤숭숭하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 견고해져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아카데미의, 결계 관리자의 명예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잘 해주시리라는 것을요.”

검성의 명령에 정리는 빠르게 끝났다. 적당히 마무리가 되자 원장님이 남아있는 결계 관리자들을 다독였다. 드란도 그렇고 레베카도 그렇고, 어제까지만 해도 동료였던 사람의 배신이었으니 충격을 받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법사라 그런지 마법사를 잘 다루는 것 같아.’

그녀는 마법사들이 중시하는 명예를 자극했다.

그리고 믿음을 심어줬다.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명예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도록. 나는 일단락된 상황에 기지개를 켰다. 계속 긴장하고 있었더니 어깨가 뻐근했다.

우리는 왔던 것처럼 빛의 판을 타고 시계탑에서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점심도 못 먹었는데. 하루 만에 몰아치는 사건 때문에 시간 개념이 잠시 사라졌었다.

‘해가 지고 있다고?’

미쳤다! 아니 망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급히 종례에 가야 해서 끝나고 원장실로 찾아가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검성과 원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검성의 뭐라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뛴다고 정신없어서 제대로 못 들었다.

사실 엄습하는 공포감이 커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종례를 한 번 더 땡땡이치면 가만 안 둔다는 케인의 험악한 표정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오늘 아침!

‘시말서로 봐주려나?’

아니겠지? 아침에는 시말서만큼은 죽어도 쓰기 싫었는데, 오히려 시말서로 끝나면 약과 아닌가. 심지어 출근 이틀째인데 두 번이면……. 나 같아도 안 봐준다.

‘아니야. 아카데미의 존속이 걸린! 중요한 일을 하고 왔는데 봐주시지 않을까?’

나는 열심히 행복회로를 돌리며 달렸지만 저질 같은 체력이라 속도가 느렸다. 아직 반도 안 왔는데 턱 끝까지 숨차고, 땀이 뻘뻘 났다. 죽을 맛이다!

“선생님, 급해 보이시네요.”

“헉, 흐, 너 여기 왜, 하…… 왜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시리우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누구는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는데 그는 마법으로 여유롭게 날고 있었다. 뛰면서 대답하려다가 숨 막힐 것 같아 결국 멈춰 섰다.

‘아, 빈혈. 평소에 운동 좀 열심히 할걸.’

시야가 잠깐 하얗게 번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빈혈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시리우스를 보자 묻고 싶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웠다. ‘감시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는지’ 라든가 ‘약 올리려고 마법까지 써서 나타난 건지’ 라든가. 하지만 질문보다 폐에 산소를 공급하는 것이 더 급했기에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열심히 숨을 몰아쉬었다.

“하, 후, 그래서, 후, 감시는?”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했다.

복면인을 감시하고 있겠다던 시리우스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금제를 풀었습니다.”

“뭐?! 금제를 풀었다고? 어떻게?”

“어떻게 라니 당연히 제 마법으로 풀었죠.”

그래.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대답한 것처럼 당연한 질문을 했구나.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겨우 서 있었다. 지금 가도 늦었을 텐데. 하늘은 여전히 붉었으나 태양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있었다.

“세르니아 님이 곤란하신 것 같아 달려왔습니다.”

날아왔으면서. 나는 속으로 시답잖은 태클을 걸며 시리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도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어쨌든 제일 중요한 것은 복면인의 상태였고, 급한 불을 껐다고 하니 다음으로 중요한 종례를 가야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 것과 금제를 어떻게 풀었는가 에 대한 것은 나중에 물어도 됐기에.

“아쉽네요. 시간만 더 있었다면 천천히 갔을 텐데.”

시리우스가 손을 확 당겼다.

안 그래도 전력질주 해서 기운 다 빠졌는데 예고도 없이 가해진 힘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잠깐!”

“텔레포트를 하려면 꼭 붙어야 해서요.”

거짓말하고 있네. 손가락만 튕겨도 되는 주제에.

그는 왈츠를 추듯이 한 손을 잡고 나머지는 허리를 단단하게 지탱했다. 나는 허리에서 손 떼고 얼른 텔레포트나 하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얼굴을 마주 보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삼켰다.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이야.’

항상 하고 다니는 무표정도 아니었고 가식적으로 웃는 얼굴도 아니었다. 내게 집착하고 고백할 때 짓던 표정과도 달랐다. 하얀 얼굴과 대조적인 검은 눈동자에선 음울함이 느껴졌다. 태양이 사라진 하늘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는 것처럼 시리우스의 긴 속눈썹이 눈 아래로 드리웠다.

“……니다.”

“어?”

그는 숨을 내뱉듯이 작게 속삭였다. 공기와 섞인 소리는 내 귀에 닿지 못했다.

다시 물으려던 찰나 시야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시리우스는 사라져 있었다.

“!”

아니 대뜸 교실 문 앞이야.

교실 안이 아니라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배려 같지 않은 배려였으나 무사히 교실 앞에 당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묘한 표정을 하고 있던 시리우스가 신경 쓰이긴 했으나 우선은 종례가 먼저다.

종례 시간보다 조금 늦었지만 교실 안에선 아직 학생들의 목소리에 안심했다. 간간히 ‘우리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라던가 ‘선생님 오늘도 안 오시는 거야? 케인 선생님 부르러 갈까?’ 하는 뼈 때리는 잡담도 있었지만 어쨌든 안 늦었으니 해피엔딩!

나는 뻔뻔하게 철판 깔고 교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들어가자 소란스럽던 교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얘들아 미안해! 갑자기 원장님이 일 시켜서 처리하느라 늦었어. 하하.”

이번에도 원장님 핑계를 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능청스럽게 변명을 이어갔으나 학생들은 대부분 관심 없어 보였다. 빨리 끝냈으면 하는 얼굴이었다. 두 명 빼고.

“내일은 절대 안 늦을게!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내가 이 1분을 위해 죽을힘을 쥐어 짜내 달려왔다니. 허탈하고 회의감이 느껴졌지만 오늘 아침에 봤던 케인의 얼굴을 떠올리자 허무한 감정들이 상쇄됐다. 그 얼굴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이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썰물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두 명 빼고.

“선생님!”

“선생님!”

쌍둥이는 다짜고짜 내게 달려들었다.

마치 입국 심사라도 하는 것처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약간 풀린 얼굴이었다.

“선생님, 대체 뭐 하시고 오시느라고 늦은 거예요?”

“위험한 일이라던가 쓸데없는 일에 나선 건 아니죠?”

동시에 다른 질문을 하는 쌍둥이에게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변명을 만들어냈다.

“별일 없었어. 진짜 원장님이 시킨 일이 있었는데 그게 조금 복잡해서 말이야. 정신을 차리니까 해가 지고 있더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정말이에요?”

아리엘이 날카로운 눈으로 확인사살을 했다. 약간 뜨끔거렸으나 쌍둥이가 알면 당장 말릴 것이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테러 조사하느라 늦었다고 하면 바로 공작가로 돌려보내지 않을까.’

아직 돌아가선 안 된다. 원작과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하는 테러 사건을 마무리하고 황후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를 잡기 전엔.

‘심증은 쌓여만 가는데 이상할 정도로 물증이 없어.’

그나마 황실문양이 새겨진 단검만이 테러 사건과 황실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유일한 증거였다. 검성을 엮기 위해 무리한 것이겠지.

‘이마저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던진 미끼일 가능성이 있다.’

금제까지 걸어서 수족들을 통제할 정도니 철저하게 준비했으리라.

“언니?”

역시 무슨 일에 휘말린 거냐고 어깨를 흔드는 아리엘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니야! 진짜 별일 없었어.”

다르지만 크게 틀리지도 않았으니 정말이지. 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리, 진정해. 누님이 말린다고 안 할 성격도 아니잖아.”

“그래서 더 걱정인 거야!”

하지만 그들은 거듭 반복해서 괜찮다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내가 뭔가에 휘말렸다는 것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리오도 안 보이고.”

“깜, 짝이야.”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그렌드윈 때문에 심장 떨어질 뻔했다. 그는 내 반응이 재밌는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표정이 얄미워. 그렌드윈에게 인기척 좀 내고 다니라는 잔소리를 하려고 했는데 그의 덩치에 가려져 있던 벨라가 나를 끌어안았다.

“니아 언니!”

“벨!”

오랜만이었다.

올해 1학년이 된 벨라는 바빠서 여름방학 때도 못 만났었다. 그녀는 안 본 사이 훌쩍 자라있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도.”

얼싸안고 부둥부둥하며 안부를 나누고 있는데 아리엘이 헛기침하며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

“벨라와 감동적인 재회는 그만하고 처음 물었던 질문에 대답해 주세요.”

“어?”

나는 돌처럼 굳었다.

그녀는 간단하게 보내 줄 생각이 없는지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물었다. 벨라와 그렌드윈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도망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변명도 안 통하는 마당에 회피도 불가능. 사면초가에 빠졌다.

“언니는 언제나 저희에겐 솔직하게 말 안 해주시잖아요. 유모 사건 때도 그랬고. 혼자 해결하려고 해서 더 걱정되는 거예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저도 돕고 싶은걸요.”

쌍둥이의 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겠지. 그렇기에 나는 그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안. 끝나고 알려줄게. 진짜 위험한 건 아니고 곧 끝날 것 같아. 이번엔 진짜 솔직하게 말해줄게! 나 정말로 원장실에 가야 해서. 그럼 먼저 갈게! 내일 봐.”

나는 아리엘의 두 손을 꼭 잡고 약속했다.

사건이 끝나면 알려주기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더 있다가는 붙잡힐 것 같아서 아리엘과 에리얼의 대답도 듣지 않고 원장실을 향해 달렸다.

“도망가 버렸다.”

“도망갔네.”

전력 질주하는 와중에 카일렌 남매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모르는 척하고 열심히 달렸다.

종례가 전쟁 같았다. 나중에 쌍둥이에게 혼나겠지만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하자.

***

똑똑똑.

“들어오세요.”

종례 전쟁을 마치고 원장실에 도착하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평소보다 깜깜한 밤이었다.

원장실에 들어가자 검성과 원장님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창 밖에 하늘보다 어둡고 무거워서 괜히 왔나 후회가 살짝 들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종례를 하고 오는 잠깐 동안 뭔가 또 터졌나?

원장님의 얼굴이 한층 피곤에 절어있었다. 검성의 인상은 한층 구겨져 있었고. 나는 일단 소파에 앉았다.

“하.”

“후.”

둘 다 말은 안 하고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사람 불안할 정도로 무게 잡는 걸까. 나는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세르니아 양,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쪽 먼저 듣겠습니까?”

오, 이 상황에 좋은 소식도 있나? 하는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나야 처음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나는 고민하지 않고 좋은 소식을 선택했다.

“레빌이 깨어나서 레베카가 뭐라고 했는지 들었다. 배후도 누군지 대충 파악됐어.”

검성이 툭 뱉었다.

그게 좋은 소식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얼굴에 깔린 그늘은 짙어졌다.

“그리고 나쁜 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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