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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당장 떠오르는 나쁜 소식을 헤아렸다.
‘금제 풀린 복면인이 자결했다? 결계에 등록된 외부인이 너무 많다?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잃어버렸다? 음, 또 뭐가 있을까.’
아주 잠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나쁜 사건을 생각했으나 그녀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예상에 없던 것이었다.
“배후가 황실인 것 같습니다.”
이미 잘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앗, 이런 너무 당연한 소리를 들어서 반응이 늦어버렸다! 나는 어색하지 않도록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들었을 때는 말문이 막혔거든요.”
확실히 그들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른 왕국도 아니고 황실이었으니. 내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섣불리 말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원작과 대조해서 얻은 결론이었고, 그들을 납득시킬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레빌의 말을 듣고 원장님과 검성은 황실이 배후라는 결론을 도출한 것이겠지.
“어째서 황실이라고 결론이 났나요?”
“네가 가져온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은 복제가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그게 나왔다는 것부터가 문제야. 황실의 물건을 훔쳐 오는 것도 불가능. 그렇다는 건 어떤 형태로든 황실과 닿아있다는 뜻이지.”
공식 석상에서 쓰는 문양은 원래의 문양을 단순화시켜서 쓰는 것이고 본래의 황실 문양은 황제 직인뿐이다.
황제의 직인은 태양의 신이 내려줬다고 전해지는 성물이다. 오직 황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인데, 신의 힘이 담겨 있어서 태양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난다.
그리고 일반적인 직인과 달리 어떤 것에도 찍을 수 있다. 단단한 쇠로 만든 검에도, 부드러운 실크로 만든 드레스에도. 소문이지만 고여 있는 물에도 찍을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발견된 단검에 새겨진 문양도 태양 아래서 은빛으로 빛났기에 확실히 진품이었다.
‘황제의 직인은 황족의 피로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거기다 황제의 직인은 마력이나 정력의 힘이 아니라 태양신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피로 다루는 것이다. 황제의 직인으로 만드는 것들은 대게 황제가 하사품으로 내리는데 이 단검은 검성이 황궁을 나올 때 반납하고 왔다고 했다.
‘황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보물 창고에 들어가 있었겠지.’
그 보물 창고는 황후도 들어갈 수 있다. 그녀가 직인을 사용해 하사품을 만드는 것은 못하더라도 이미 찍혀진 하사품을 빼돌리는 것은 충분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레빌의 증언.”
내가 궁금해했던 것.
원작에는 나오지 않았던 숨겨진 진실로 가는 또 하나의 증거가 레빌이었다. 내가 종례를 갔다 오는 사이 정신을 차린 레빌은 레베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검성에게 알려줬었다.
“뭐라고 했나요?”
“황궁에서 사람이 오니까 등록해 놓으라고 했다더군.”
물론 제3의 세력이 레베카에게 황실이라 속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단검을 더해서 추론했을 때 배후세력으로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황실이었다. 다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실망했다. 아쉽게도 내가 궁금해하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실 전체가 적인지 아니면 황후의 단독행동인지는 아직 모르는 건가.’
심증으로는 황후가 흑막 같았으나 뚜렷한 근거 없이 멋대로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그는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리고 이건 침입자 명단이다.”
검성도 피곤한지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그때 시리우스가 상대하던 숫자와 얼추 비슷했다. 명단에 적혀 있는 이름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아카데미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기에 성을 쓰지 않아도 되는 법을 악용했다. 원장님은 현재 데이터를 전부 삭제해서 외부 침입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남은 내통자가 문제라며 머리를 짚었다.
“루카리온 선생님, 테러 조사는 이틀 전부터 시작하셨죠? 어째서 현장에는 드란 선생님만 남겨둔 건가요?”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몰라서 처음부터 다시 되짚어 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있던 검성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5일 전, 연구 기관에 폭발 테러가 일어났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어. 그때는 부상자가 우선이라 병동을 마련하고 사제나 의원을 불러오는 데 시간을 다 썼지.”
“외부에서요? 아카데미 내에 대기하는 분들 있잖아요.”
“건국제 준비 때문에 일주일 전에 교직원을 제외하고 3분의 2나 되는 인력이 황궁으로 차출됐다.”
“3분의 2나요?”
“그래.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건국제 때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귀족들에서부터 먼 타국에서 오는 사신들까지 황실의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몰려온다. 거기다 파티장에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서 매년 아카데미에서 차출해서 지원 갔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는 황실에서 따로 준비하는 것이 있다고 2배가 되는 인원을 요청했다.
‘원장님은 다른 의심 없이 아카데미가 돌아갈 수 있는 최소의 인원만 남기고 황실로 사람들을 보낸 것이고.’
연구자나 경비병이 왜 이렇게 적은지 이해가 됐다. 특히 행정이나 의료인원은 거의 한두 명 정도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부상자가 적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사람이 없었던 건가.’
3분의 1의 인원이 남은 상황에서 부상자까지 발생했으니 인력이 부족할 만했다.
“그래서 조사단을 교직원들로 꾸려야 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시에는 결계를 통해 침입자가 들어올 리 없다고 판단해서 아카데미 내부에 범인이 있을 거라 추측했죠. 누가 테러를 일으켰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루카리온 선생님이 조사단을 이끌어 줬으면 했습니다. 문제는 루카리온 선생님을 대신해서 룬반을 맡을 선생님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저를 부르셨군요.”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한시가 급했기에 특급우편으로 편지를 보낸 후 다음날 바로 검성이 데리러 간 것이었다고. 내가 무사히 도착해서 조사를 시작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외부에서 아카데미에 침입하려는 흔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테러를 일으킨 세력과 연관 있다 생각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현장에는 드란만 남겨두고서.”
그들의 입장에선 외부의 침입자를 잡으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해서 현장 관리를 소홀이 한 것이었다.
‘계획에 방해되는 검성을 밖으로 유도하기 위한 건가.’
마치 인식도 못 하는 사이 식충식물에 잡아먹히는 벌레처럼 철저하게 삼켜질 뻔했다. 계획적으로 차근차근 숨통을 조여온 것이다.
“과한 인력 차출, 황실 문양이 새겨진 단검과 레빌의 증언까지. 황실은 대체 뭘 노리는 거지?”
“루카리온 님의 국외 추방.”
“뭐?”
내 대답에 검성은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그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감시까지 하며 국외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던 황실이 어째서 자신을 추방하겠는가.
“평소보다 많은 인원을 차출해 가면서 이상한 시기에 황궁에 있던 트룩 후작가의 차남이 아카데미로 내려왔죠. 황실 문양 단검을 테러 현장에 놔두려고 한 것도 루카리온 님을 테러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한 계획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까 단검의 행방을 물은 거냐?”
“네.”
그는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트룩 후작가의 차남이라. 그 사건까지 알고 있던 건가.”
아, 실수했다.
검성의 여동생 이야기는 일기장에서 밝혀지는 사실이다. 내가 알기엔 너무나도 과거의 일이었기에.
“예전에 유모가 지나가는 어투로 말한 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제자 지간이라지만 공작에게 들었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검성이 아카데미 오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니 족히 20년은 더 된 과거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이가 있는 유모에게 들었다고 무마했다.
“쯧, 유명하긴 했지. 특히나 귀족들 사이에선 시끄러웠으니.”
잠시 입을 달싹이던 검성이 그리움에 잠긴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여동생의 이야기를.
“그렇게 황궁을 나와서 아카데미로 왔다. 여동생 꿈이 선생님이었거든.”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그저 한 사람의 일생. 그리고 죽은 이의 마음을 이어가는 이야기였다.
“복수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갔다.
다행히 검성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대답했다.
“하하하. 안 했을 리가 있겠냐? 당연히 했지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직 억울하고 증오하지만 동생은 내가 복수에 미쳐 날뛰길 바라지 않을 것을 아니까 참는 거지. 내가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그 녀석 몫까지 행복하게 사는 것밖에 없잖아.”
그는 정말 강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과거에 연연하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끌어안고 묵묵히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황실이 노린 게 나였나.”
순식간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서늘한 눈빛이 날카롭게 종이를 바라봤다. 그는 종이를 팔랑팡랑거리며 가볍게 말했다.
“누가 반역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네?”
나는 원작의 에리얼이 떠올라서 뜨끔해서 큰 목소리로 반응해버렸다. 이제는 그럴 리 없겠지만.
“나를 쫓아내는 이유가 그거 말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황실인데 반역을 일으킬 리는 없고.”
반역이 목적이었다고?
그제야 이해가 됐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추어졌다.
황궁에서 나가는 검성이 국외로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한 전 황제와 다르게 현 황제는 검성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황후는?
‘애당초 브릴리언 왕국이 제국을 삼키기 위해 그녀를 황후로 만든 것일 수도.’
제국과 브릴리언 왕국은 오랜 기간 동안 사이가 좋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나라 사이 국혼도 종종 있었다.
‘브릴리언 왕녀가 황후가 된 경우도 자주 있었고.’
그런데 이번에는 평화 유지가 아니라 전쟁이 목적이었다면? 브릴리언 왕녀를 황후로 만들어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전쟁을 일으켜 제국을 정복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원작에 일어났던 몇몇 사건들도 그녀가 제국을 삼키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 한 것일 수도 있었다.
‘국외로 추방당한 검성. 반역을 일으키는 유일한 공작가. 반역을 막기 위해서 희생된 황실기사단까지. 소설에서 일어났던 사건 모두 제국을 약하게 만들었어.’
소름 돋았다.
전부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원장님이 침통하게 말했다.
나도 이유를 알았기에 반박하진 않았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는 황실에 이의를 제기하기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니 이런 걸로는 어림없어! 절대 못 빠져나갈 물증이 필요해.”
“물증이 있더라도 섣불리 나설 수 없습니다. 땅부터 시작해서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녀는 역시 아카데미의 안전을 제일 중요시 했다.
진심으로 아카데미를 사랑하기에 지키고 싶은 것이다. 검성은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에 툴툴거렸으나 반대하진 않았다.
“원장님이 아카데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압니다. 만약 제가 나가서 아카데미에 평화가 온다면 기꺼이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심상치 않은 흐름을 보니 곱게 지나갈 태풍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비해야죠.”
“…….”
“제국에 어떠한 일이 터져도 흔들리지 않을 만한 힘이 필요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키워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덤덤한 목소리로 검성이 원장님을 설득했다.
어쩌면 원작에서 어떠한 변명 없이 떠난 것도 이런 생각이 바탕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누명을 씌운 세력이 황실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기에. 순순히 국외로 나가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어두운 원장님의 얼굴에 갈등이 서렸다.
그녀도 고민될 것이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웅크리고만 있을 건지, 위험에 맞서기 위해 잠시 숨죽인 채 힘을 모을 건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럽시다. 급하게 해서 좋을 거 없으니.”
그가 말해서 왠지 신뢰가 떨어졌지만. 아카데미 전체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것은 맞았기에.
“세르니아 양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요?”
제 의견이 필요한가요? 저는 일개 계약직인걸요.
차마 뒷말은 뱉지 못했다. 슬프지만 나는 3개월 뒤 아카데미를 떠날 사람이었다. 굳이 내 의견이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원장님도 그저 답답한 마음에 다른 방법들도 참고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