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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면 힘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검성의 의견에 동의하자 원장님의 고민은 한층 깊어졌다.
반대로 검성은 잘했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딱히 검성의 편을 들려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심상치 않았다.
‘휩쓸리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건가.’
그것은 아르덴타인에도 통용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를 것이기에. 그러니 대비를 해야 했다.
“좋습니다. 일단은 내부의 결속부터 다지는 걸로 시작할까요?”
원장님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결정에 검성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도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었던 몸을 풀며 기지개를 켰다. 대충 해결된 건가. 찝찝하지만 지금 황실에 칼을 빼 들 수는 없었기에 테러 사건은 내부에서 적당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뒷정리를 하러 가볼까.”
검성이 호쾌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따라 일어섰다. 원장님은 우리에게 뒷정리를 맡겼다. 처리해야 할 일이 앞으로 더 많아질 거니 지금 남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럼 내일 봅시다.”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은 서류가 쌓인 책상에 앉아 푸근한 웃음으로 배웅했다.
우리는 원장실에서 빠져나와 드란과 복면인이 감금되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시리우스는 어디 있지?’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까 텔레포트를 하기 전에 뭐라고 말한 거였을까. 다른 일 때문에 애써 눌렀던 걱정들이 한 번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세르니아 안 들어가고 뭐해?”
“네? 네. 들어가야죠.”
시리우스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수감실에 도착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검성의 핀잔에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수감실이 아니라 그냥 방이네.’
아카데미 특정상 수감실이나 감옥이 없는 것은 이해하나 잠금장치도 안에서 할 수 있는 곳에 내통자를 잡아놓은 건 허술해 보였다.
“아직 자는 건가?”
“네! 계속 지켜봤으나 이상한 점도 없었습니다.”
드란을 감시하고 있던 사람은 검성에게 벌벌 떨던 키 작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그는 나를 힐끔 보더니 고개만 살짝 숙였다.
“알겠네. 자네는 잠시 나가 있어.”
“저만요?”
“그래.”
그는 내가 같이 남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상큼하게 웃어줬다. 약 오르라고. 문이 닫히자 검성은 남자 선생이 앉아 있던 곳에 털썩 앉았다.
‘의식이 없는 드란에게 뭘 하려는 거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검성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러나 그는 하품만 할 뿐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차라리 복면인 쪽을 심문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리우스가 금제도 풀었다고 했으니. 근데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해?’
시리우스가 금제를 풀었다고? 아니면 원래부터 금제가 걸려 있지 않았다고? 둘 다 안 되잖아!
낮에 검성이 근신 처분했으니 시리우스가 금제를 풀었다고 하면 나중에 엄청 혼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복면인에게 금제가 걸려 있지 않다고 말하면 황실과 관계가 옅어져서 나중에 수사의 혼란을 줄 수도 있었다.
‘나중에 수사를 안 할 거 같은데.’
내적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금제가 안 걸렸다고 말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려는 찰나, 검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시리우스는 언제 온대?”
아니 댁이 시리우스를 왜 찾는 거죠. 나는 방금까지 심각하게 했던 갈등이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정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저야 모르죠.”
나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시리우스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도 진짜였고. 검성은 내 반응에 피식 웃더니 내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잠, 꺄악! 뭐하는 짓이에요! 이거 놔요!”
어릴 적 아빠가 아기들 비행기 태워주는 것처럼 내 허리를 꽉 잡은 검성은 나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의문도 모른 채 비행기를 타던 내가 속이 매스꺼워 질 때쯤에야 검성은 멈춰 섰다. 우리 사이에 끼어든 존재에 의해서.
“뭐하는 짓입니까.”
시리우스였다.
그는 진한 살기를 뿜어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원장님 빼고는 다 무서워하던 검성에게 정면으로 맞붙다니. 하물며 헬리오스조차 검성에겐 덤비지 않았는데. 나는 울렁이는 시야를 진정시키고 시리우스를 말리려고 했다.
“윽!”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새카맣게 일렁이는 살기가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력이라는 것을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이게 마력일까. 마력이라면 마법 따위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따가웠다.
“어이, 세르니아가 힘들어하잖아. 그건 집어넣어.”
“세르니아 님!”
이 사람들 호들갑은.
마법에 정이 떨어질 만큼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은 내가 쓰러질 것처럼 오버했다. 어쨌든 말렸으니까 된 건가.
“나는 괜찮아. 자, 이제 설명해 볼까요? 루카리온 선생님이 왜 시리우스를 찾았는지. 랑 시리우스는 대체 어떻게 타이밍 좋게 나타난 건지.”
나는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아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하라고.
능청스럽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검성이었다.
“드란의 상태를 알려면 시리우스가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를 그, 어, 빙글빙글 돌리신 거죠?”
비행기를 대처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당황해서 말을 더듬다가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다행히도 둘 다 이해는 한 것 같으나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변했다. 뭔데 그 꺼림칙해 하는 표정.
“흠흠, 네가 비명 지르거나 싫어하면 이 녀석이 나타날 거라 생각해서 돌린 거야. 애기 때 이런 놀이 많이 하지 않나?”
“애기 때……. 기억 안 나서 모르겠는데요.”
무심코 아기 때 그런 놀이 한 적 없다고 할 뻔했다.
아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은 갔기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의 예상대로 시리우스가 나타났으니.
“그럼 시리우스는?”
내 시선은 하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있는 시리우스에게 향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렴풋이 내게 무슨 마법을 걸어 놨다는 것은 알겠으나 이 부분은 직접 들어야 했기에 나는 시리우스를 재촉했다.
“죄송합니다!”
시리우스는 대뜸 무릎을 꿇었다.
아니 설명하라고 했더니 왜 사과부터 하는 거야. 나는 시리우스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죄송할 행동을 했구나.”
그가 움찔거렸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볼을 감쌌다. 갑자기 내 손이 닿아 놀랐는지 또 움찔거렸다. 이러니까 왠지 내가 나쁜 놈인 것 같잖아. 볼을 감싼 손으로 그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가가 살짝 붉었다. 눈물이라도 참고 있었던 걸까.
‘무슨 여주인공도 아니고 이렇게 가련한 표정을 지으면 내가 봐줄 줄 아나!?’
하지만 대형견 마냥 순진한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마음이 약해졌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합의 봐.”
검성은 잘들 논다는 얼굴로 귀찮은 기색이 잔뜩 담아 말했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시리우스를 다그쳤다.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내 재촉에 입을 열었다.
“세르니아 님에게 도청 마법을 걸어놨습니다.”
“도청 마법? 내 몸에?”
“아니요. 몸은 아니고 늘 들고 다니는 물건에요.”
내가 늘 들고 다는 물건이 뭐지.
액세서리를 즐기는 편도 아니고 옷은 매일 갈아입고, 대체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손수건이라 대답했다.
“언제부터?”
이어진 질문에 시리우스의 고개가 서서히 내려가려 했다.
나는 그가 고개를 못 숙이도록 양손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시리우스의 흔들리는 동공이 내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부끄러운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이 상황 이상하잖아.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뽀뽀라도 하려는 줄.
“루카리온 선생님 눈빛이 많이 차가워졌거든. 빨리 대답해.”
약간 질색하는 표정이신데.
나는 검성의 눈치를 보며 시리우스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는 내 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작년 여름 방학 때부터요. 궁금했습니다. 제가 볼 수 없는 세르니아 님이. 걱정됐습니다. 자꾸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세르니아 님이.”
작년 여름 방학이라니.
나는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내 흑역사! 한동안 무사히 잘 잊고 지냈는데. 굳이 이렇게 상기시켜주는구나.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작년 여름. 오래도 됐네. 일단 드란의 상태를 보는 게 먼저니까 참는다.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네…….”
시리우스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시무룩한 얼굴로 드란에게 다가갔다.
풀 죽어도 자신의 일은 착실하게 하네. 시간 없다고 해서 넘어가긴 했으나 역시 화가 덜 풀렸다. 둘 다에게. 어쩐지 나만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루카리온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어요?”
시리우스가 드란의 상태를 보는 사이 검성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는 시선을 회피했다.
“뭐 또 숨겨요?”
“아니. 내가 숨기는 게 어디 있어. 내가 시리우스 담임만 2년째고, 시계탑 지하실에 가둔 것도 난데. 다 알지.”
“제게 마법 걸려 있는 거 왜 안 말 해주셨어요?”
“나중에 저 녀석에게 물어봐라.”
검성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궁금하긴 했으나 어차피 시리우스랑도 할 말이 남았기에 순순히 수긍했다.
“의식을 찾긴 틀렸네요.”
시리우스가 중간에 막았고, 사제의 치료가 있었으나 마력의 흐름을 봤을 때 이미 영혼은 떠나고 육체만 살아 있는 상태라고 했다. 시리우스는 마력의 흐름으로 식물인간 상태도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이 정도의 천재인데 원작 속에 테러 사건에는 아무것도 안 했을까.’
문득 원작의 시리우스는 왜 데이지를 위해 나서지 않았을까 하는 작은 의문이 생겼다. 수첩에 적혀 있으려나. 이 시기에 시리우스가 뭘 하고 있었는지. 내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검성과 시리우스는 토론이 한창이었다.
“복면인은 어떻게 됐지?”
“금제는 풀었습니다. 근데 의외로 아는 게 없더군요.”
검성과 시리우스의 대화는 물 흐르듯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특히 시리우스가 나를 제외하고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좀 신기했다.
“왜 그러십니까?”
“네가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신기해서.”
“질투하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