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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몽롱한 의식 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데이지 꿈인가 하고 가만히 있었다. 최근 들어 꿈을 꾸는 횟수가 늘었다고 생각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세르니아 님을 책임지겠습니다.”
아, 꿈 아니구나.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는데 서늘한 손가락이 내 볼을 쓸었다.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그의 말은 너무 무거웠다. 책임이라니.
잠이 덜 깨서 제대로 된 생각이 불가능한 상태였음에도 말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임지려면…… 취업해야지.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결혼도 하고…….”
문제는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였다는 것이다.
맑은 웃음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직장이 있으면 저와 결혼해주시는 건가요?”
나는 뻑뻑하게 굳은 뇌를 깨우려고 노력했다. 내 바람과 다르게 뇌보다 감각이 먼저 깨어났다. 온몸이 무거웠다. 물먹은 솜보다 더 무거웠다.
‘중력이 이렇게나 무거운 거였나.’
그러다가 내 헛소리를 인식하자 느리게 돌아가던 머리에 정신이 확 돌아왔다. 제발 생각 좀 하고 말해라. 스스로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생각이 짧은 점을 반성하며 시리우스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시리우스. 네가 책임지지 않아도 괜찮아.”
어제 하도 소리를 질러서 목이 쉬어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볼을 쓰다듬던 손길이 내가 상체를 일으키기 쉽도록 받쳐줬다.
“저 때문에 일어나셨나요?”
그는 내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주제를 바꿨다.
나도 그 주제는 불편했기에 굳이 언급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는 눈을 감은 채 몸 상태를 점검했다.
‘생각보다 거기는 괜찮네.’
밤이 끝날 때까지 시달린 것에 비하면 의외로 멀쩡한 편이었다. 아랫배도 묵직하긴 했으나 큰 고통은 없었다. 내가 알기론 하체에 감각이 사라진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내 의문은 시리우스가 풀어줬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세르니아 님이 아파하셔서 몸에 마력으로 불어 넣었습니다. 신성력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은 무리지만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어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락 맡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아하. 어쩐지 간접경험에서는 막 다리 풀려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있던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죄송할 부분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자꾸 더 하자고 불쌍한 척한 부분이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끔거리는 목을 축이기 위해 겨우 눈을 뜨자 분홍색 눈동자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나는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맞추려고 몇 번이나 눈을 끔뻑여야 했다. 그는 내가 눈을 뜨자 해사하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솜사탕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어제는 좀 더 낮고 탁한 목소리였는데. 나는 지난밤을 떠올리며 그를 봤다.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리우스?”
백합같이 청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시리우스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머리가, 색이.”
나는 믿기지 않은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그는 내 볼에 입 맞추며 물을 가져다주겠다며 일어섰다. 나는 유리컵에 물을 담아오는 시리우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기 있습니다.”
“아, 고마워. 가 아니라 저주는 다 풀린 거야?”
“네.”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그의 머리칼이 본래의 색을 드러냈다. 검은색 눈동자가 분홍색으로 변했던 것처럼 칠흑 같던 검은 머리카락은 황실의 핏줄을 증명하는 은발이 되어있었다.
“예쁘다.”
무심코 속마음을 입으로 뱉어버렸다.
남자에게 예쁘다는 칭찬이 아니려나. 어쨌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은발을 넋 놓고 구경했다. 헬리오스와 비슷하지만 다른 색이었다.
‘오팔 같아.’
헬리오스의 은발이 화려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라면 시리우스의 은발은 빛을 머금을 때마다 숨겨진 색을 뽐내는 오팔 같았다. 빛이 그의 머리카락에 닿는 순간 무지개색으로 부서졌다.
“세르니아 님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요.”
나는 무거운 팔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결 좋은 은발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건넨 물을 마시는 것도 잊고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저번에 새끼 오리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백조였군.
“이제 안 죽는 거지?”
“네.”
시리우스의 하얀 웃음을 보자 비로소 안심이 됐다. 어제 한 고생은 헛수고가 아니었다. 저주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저주에 매개체가 됐던 정령은 어떻게 됐는지 라든가 이제는 완전하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라든가. 나는 시원한 냉수를 마시며 시리우스에게 저주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려다가 문득 잊고 있던 다른 사실을 떠올렸다.
“아!”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픈가요?”
뜬금없이 이불을 걷어내며 소리치자 시리우스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시리우스가 아니라 커다란 테라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야?”
날씨가 흐려서 태양이 보이지 않았다. 실내가 어두워서 아직 새벽이라고 생각했는데 창문 너머 하늘을 덮은 회색 구름을 보니 새벽은 아니었다.
‘설마 낮은 아니겠지?’
나는 불길한 마음에 시리우스를 재촉해서 정확히 몇 시냐고 물었다. 다행히도 아직 오전이었다. 평소에 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라 데이지가 내 방에 도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없다는 사실을 걸리면 끝장이야.’
아무리 시리우스가 마력으로 회복시켜줬다지만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서 시야가 핑 돌았다. 아이고, 삭신이야.
“괜찮으십니까?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살짝 휘청거리자 재빠르게 다가온 시리우스가 허리를 감싸며 잡아줘서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다급하게 부탁했다.
“아니 무리는 안 할 건데. 나 좀 빨리 공작가로 텔레포트 시켜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작가로 돌아가는 것이었기에.
공작가에 사람들이 알면 한바탕 뒤집어질 게 뻔했다. 뭔가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는 시리우스에게 내가 ‘빨리!’ 하고 재차 외쳤다. 그는 아쉬움이 잔뜩 묻은 얼굴로 나를 내려 보며 말했다.
“결혼했다면 세르니아 님을 돌려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마에 깃털처럼 가벼운 키스를 한 시리우스는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겼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대답을 듣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잠결에 뱉은 헛소리가 이상한 부분을 자극한 것 같은데.’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 자리에서 딱 잘라 말했어야 했는데.
후회했으나 이미 시야가 일렁거리고 풍경은 내 방으로 변해 있었다.
썰렁한 방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늦잠 잤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난리인지. 긴장이 풀리자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시리우스가 내 몸을 닦은 건가.’
어젯밤 정사 후에 기억이 흐릿했다. 다만 파열의 흔적과 정액이 뒤섞여서 허벅지에 흐르는 기이한 감각은 생생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아, 미쳤다.’
뒤처리까지 해준 시리우스에게 조금 감동하려는 찰나,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울긋불긋한 키스 마크가 몸 여기저기에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깨문 자국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자 목욕할 기분이 싹 사라졌다. 부서지려는 멘탈을 붙잡고 황급히 드레스 룸을 뒤졌다. 목 끝까지 올라오고 손목 끝까지 다 덮는 드레스로 갈아입기 위해.
‘아니 마력으로 회복시킬 거면 이런 것도 좀 지워주지.’
마법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시리우스라면 왠지 일부러 안 지웠을 것 같았다.
‘어젠 진짜…….’
둘 다 처음이었고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마치 새로운 학문을 탐구하듯 모든 것이 낯설었고, 서툴렀었다. 서로 배려하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미숙했다.
마지막에. 의식을 잃기 전 내 귀에 뭐라고 속삭였었다. 다음에는 뭐라고 했는데. 귓가에 맴도는 시리우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생각하지 말자. 이제 다시는 안 할 거니까.’
상념을 털어내며 드레스를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왔다. 피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소파에 무거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서 한숨 더 자고 싶었으나 그러면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난리 칠 쌍둥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포기했다.
‘사제나 의원을 불러서 몸 상태를 확인할 테니.’
한순간에 지옥도가 펼쳐지겠지.
끔찍한 가설을 밀어내고 있자 데이지가 노크를 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어제 늦게 잤더니 늦잠을 잤지 뭐예요. 늦어져 죄송합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파티는 잘 끝났어?”
“네. 다들 무척이나 즐겼는걸요. 저도 너무 즐거워서 새벽까지 남아있었어요.”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라니.
어쩐지 공작가가 전체적으로 조용하더라. 흐린 날씨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니라 다들 숙취에 허우적거리고 있나 보군.
“식사하시겠어요?”
“아니. 차 한 잔 준비해줘. 오늘은 입맛이 없네.”
“숙취 해소에는 덴더라이언 차가 좋데요! 금방 준비해올게요.”
숙취는 아닌데.
데이지는 내가 말리기도 전에 발랄하게 방에서 나갔다. 뭐 상관없나.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똑똑똑.
벌써 왔나? 나간 지 1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 잠깐 잠들었었나 고민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올 사람이 데이지밖에 없었기에 당연히 데이지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데인이 들어왔다. 그것도 매우 당황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