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69화 (69/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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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카나린 영애가 방문하셨습니다.”

“카나가?”

연락도 없이 올 애가 아닌데.

데인의 당황한 표정과 급작스럽게 찾아온 카나린의 조합이 심상치 않았기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응접실로 향했다.

“카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응접실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는 카나린이 보였다.

카나린은 예의상이라도 괜찮다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째서인지 아직 교복 차림이었고, 비라도 맞았는지 진흙과 물기가 묻어있었다.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고. 나는 너무 놀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니아…….”

맞잡은 손은 차가웠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카나린은 내 이름을 애처롭게 부르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울음이 그치길 기다렸다.

‘졸업식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어제 졸업식 하고 바로 돌아온 쌍둥이를 기준으로 시간을 계산했을 때 카나린도 분명 제이페인 백작가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왜? 머릿속은 복잡했으나 그녀를 진정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카나 우선 씻을래요? 몸이 아주 차가워요.”

“아……. 하지만…….”

나는 망설이는 카나린을 데리고 욕실로 이동했다.

그녀의 행색을 보아하니 험난한 여정을 거쳐서 도착했으리라. 거기다 피곤하고 지칠 땐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가야지!

“저는 방에 있을게요.”

“네. 고마워요.”

한바탕 울고 난 카나린은 진정됐는지 눈물을 닦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데이지에게 새로운 허브차를 부탁하고 카나린을 기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안 됐다.

‘적어도 내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겠지.’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잔뜩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하얗게 떨어지는 눈을 보고 있자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이렇게 추운데 교복만 입고…….

심지어 마차도 안 타고 왔다는 것을 데인이 알려줬었다.

“니아, 연락도 없이 급작스럽게 방문해서 죄송해요.”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 차릴 필요 없어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카나린이 들어왔다.

교복을 세탁할 동안 잠시 내 드레스를 빌려줬는데 체구가 작은 카나린에겐 컸다. 그 모습이 엄마 드레스를 몰래 입은 아이처럼 귀여워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작은 웃음을 흘려버렸다.

“많이 이상한가요?”

“아니요. 귀여워서 무심코 미소가 새어 나왔네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카나린을 테이블 앞에 앉혔다.

향긋한 라벤더 향이 감도는 방은 평온했다. 눈 오는 풍경마저도 고요해서 우리는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겨있었다.

“니아…….”

생각의 정리가 끝났는지 카나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차분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루 만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나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끊지 않고 참았다.

“그렇게 돼서 가출했어요.”

“…….”

나는 정말 깊은 분노를 느꼈다.

‘첫인상부터 구렸는데 이 정도일 줄은.’

졸업식을 마친 카나린은 곧장 제인페인 백작가로 돌아갔다고 한다.

여기까진 아주 정상적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오랜만에 돌아갔더니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교체돼 있었다고. 집사까지 포함해서.

백작의 냉대 속에서 카나린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녀를 보살펴준 집사 덕분이었다. 내 기억에도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내게 무안을 주는 백작을 말려줬었는데.’

카나린은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위해 직접 백작을 찾아가서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결혼이라니. 어이가 없네요.”

그것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뻘과 재혼을 하라니.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트룩 후작. 아카데미 테러 사건에 이어 카나린의 인생에도 등장할 줄이야.

‘트룩 후작가의 차남이 루카리온 선생님이랑 비슷한 연배던데 그의 아버지랑 결혼이라니 머리가 완전히 돌았네.’

제이페인 백작가의 뇌는 사실 밀가루 덩어리가 아닐까.

아무리 가문의 이득을 위해 더 높은 신분의 귀족과 카나린을 결혼시키려고 한다지만. 생명이 내일 다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할아버지는 심했잖아.

“아니 그냥 나왔어요? 뭐 좀 부수고 엎고 던지고 나오지.”

이가 빠득 갈렸다. 나는 애써 끓어오르는 분노를 진정시켰다.

그래서 카나린은 원래 일하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이유도 못 듣고 제이페인 백작가를 도망 나왔다고 한다.

“그때는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휴, 아니에요. 그래도 안 잡히고 무사히 나와서 다행이에요.”

만일 백작이 알았다면 절대 곱게 안 보내줬으리라. 어딘가에 감금할지도 몰랐다.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 나는 무거운 숨을 뱉으며 카나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엔 희미한 불안이 남아있었다.

“막상 나왔는데 갈 곳이 없어서 무작정 아르덴타인으로 와버렸어요.”

“잘했어요!”

예전에 카나린은 백작이 무서워 방안에서 꼼짝도 안 했었다. 그에 비해 백작을 직접 찾아가서 대화를 하거나 그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도망친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무서워요. 아버지가 찾아오면 어떻게 하죠? 저는 얌전히 돌아가야 할까요? 그런 결혼생활은 하고 싶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하던 카나린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확실히 제이페인 백작의 성격상 도망친 카나린을 가만히 놔둘 것 같진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얍삽한 백작이라면 내가 카나를 보호하고 있는 걸로 트집 잡을 수 있어.’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에리얼과 약혼시키려고 한다든가 아니면 결혼을 방해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었다.

‘삼촌에게 부탁해야 하나.’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제이페인 백작을 신분으로 찍어 누르는 것. 속으로 불만을 품을지언정 앞에서 내색하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최후의 보루로 놔두고 싶었다. 물론 카나린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무조건 도울 것이다. 다만 단순히 신분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결정하고 가문을 끊어내길 바랐다.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카나린에게 도움 되는 사람은 나나 공작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사람은 따로 있었다.

“카나는 어떻게 하고 싶어요?”

“모르겠어요. 제가 뭘 해야 할까요.”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겠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체온을 전달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 눈빛을 담아 말했다.

“카나, 다른 사람에게 상담해보는 건 어때요?”

“다른 사람에게 상담이요?”

카나린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딘가 단념한 얼굴이었다.

백작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생각지도 못했던 길을 찾을지도 몰라요.”

“정말…… 새로운 길이 있을까요?”

불안감에 흔들리는 눈동자에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일으켰다.

“그러니 물어보러 가요.”

“네? 지금요?”

원래 결정을 내렸으면 빨리 행동해야 한다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누구를 만나러 가는 건지 물었으나 나는 금방 알게 될 거라며 어물쩍 넘어갔다. 사실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그녀에게 가장 도움 되는 사람은 공작가 안에 있었으니.

똑똑똑.

“세르니아입니다.”

“들어오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늘도 종이의 산에 둘러싸인 공작부인이 있었다.

그랬다. 카나린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 내가 생각했을 때 카나린을 가장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였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쉬려고 하던 참이었으니. 그런데 같이 온 영애는 누구지?”

공작부인의 호박색 눈동자가 카나린을 향했다. 그저 순수한 궁금함이었으나 카나린은 그녀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 친구예요. 숙모에게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음.”

생각해보니 카나린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공작부인에게 말도 안 하고 데려와 버렸다!

카나린에게 공작부인의 이야기를 안 하긴 했으나 여기서 카나린의 상담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게 된다. 그랬기에 공작부인에게 미리 허락을 구했어야 하는데.

‘아, 오늘 진짜 생각 짧은 거 반성해라.’

나는 생각이 짧은 내 머리를 탓하며 머뭇거렸다. 다짜고짜 쳐들어온 다음에 허락을 구하는 것도 이상했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자 공작부인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첼시에게 홍차를 부탁했다.

“그래.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되니?”

“카나린 제이페인이라고 합니다.”

공작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겁먹은 카나린의 긴장을 풀어줬다. 다행히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역시 지금이라도 먼저 어떤 이유로 찾아왔는지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으나 그녀가 빨랐다.

“제이페인이라. 어떤 일로 상담하고 싶은지 알겠구나.”

네?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로 유명한 건가요.

서늘한 호박색 눈동자로 나와 카나린을 번갈아 보던 공작부인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입 닫으렴.”

“네.”

어딘가에서 들은 적 있는 말이라 생각하며 입을 닫았다.

“천천히 말해주겠니? 오늘 일은 거의 다 끝냈거든.”

공작부인은 우물쭈물하는 카나린을 다독였다.

연륜의 차이라 해야 할지 그녀의 능력이라 해야 할지 그녀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망설이는 카나린이 말하기 쉽도록 배려해주는 것마저 완벽했다.

카나린은 내게 했던 이야기를 공작부인에게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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