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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말할 때보다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한 카나린이 말을 마치자 집무실에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공작부인은 이야기를 묵묵히 끝까지 듣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제이페인은 여전하구나.”
그녀의 한마디에 카나린은 흠칫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공작부인이 평소에도 제이페인가를 안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잘 느껴졌기에. 제이페인가의 장녀인 자신도 안 좋게 생각하고 있을까 봐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말 없이 카나린의 손을 잡아줬다.
“카나린을 탓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젊었을 적 제이페인과 혼담이 오갔었거든. 그때가 떠올랐을 뿐.”
제이페인 백작과 혼담이라니. 이미지가 너무 안 어울려서 나도 모르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버렸다. 내가 그녀에게 들은 과거는 아주 일부였고 공작과 공작부인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숙모가 백작가에서 나왔기 때문에 혼담이 깨진 건가?’
그녀가 만약 가문과 연을 끊지 않았더라면 제이페인 백작부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과거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하고 있었는데 공작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다는 얼굴로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란다. 그래도 들어주겠니?”
“네.”
카나린도 공작부인이 제이페인 백작과 결혼할 뻔했다는 과거가 많이 궁금한지 방금까지의 움츠러든 기색은 사라지고 궁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블렌져스 백작가의 외동딸이었단다.”
“블렌져스요?”
“블렌져스라면…….”
생소한 가문이었다. 원작과 관계없이 백작 가문 정도면 지나가면서라도 들어본 적 있을 텐데. 나와 달리 카나린은 잘 아는 가문인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래. 너는 알고 있나 보구나. 하긴 사교계에서 오래도록 떠들어댔으니.”
공작부인은 사교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그녀에 대한 소문도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다’ 정도였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원작에 언급된 소문이었다.
‘수도에 올라와서도 한 번도 사교 파티에 안 나가셨고.’
막연히 사람만은 곳을 꺼리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가 사교계를 나가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었나 보다. 나와 카나린은 공작부인의 오래된 이야기를 경청했다.
“블렌져스 백작가는 대대로 자식이 귀했다.”
한 세대에 둘 이상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래서 백작가는 딸이 작위를 이어받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녀도 당연히 자신이 백작이 될 거라 믿고 있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학대가 이어진 것은 아니었구나.’
가문에 관한 배경 설명이 끝나자 본격적인 과거사가 전개되었다.
“하지만 내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애인을 데려왔거든. 그때부터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폭력을 휘둘렀어. 고작 7살 때의 일이야.”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7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나 때문이라 생각했단다.”
아무리 귀족 사이에서 가문의 이득을 위해 사랑 없이 결혼하는 것이 흔하고, 암암리에 따로 애인을 둔다고 하나 어떻게 생각해도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심했다.
‘아카데미 입학하기 전까지 계속 폭력에 시달린 건가.’
분노를 달래기 위해 마신 홍차가 유독 쓰게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맞지 않기 위해 언제나 그늘에 숨어다녔고, 나를 제외한 백작가는 행복해 보였지. 사교계에서도 몰락한 자작 영애를 진심으로 사랑한 블렌져스 백작은 유명했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교계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만 찬양했다. 아이가 시달리는 폭력은 외면하고.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공작부인이 블렌져스 백작에게 미움을 받는 것조차 새 부인을 향한 사랑이라고 떠들어댔다고 한다.
“말도 안 돼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사랑의 표현이 폭력이 될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한,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포장하는 귀족들에게 혐오감이 일어났다.
‘어쩌면 숙모도 사교계를 혐오하는 걸까.’
나 같아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을 테니. 경악에 찬 내 목소리와 달리 공작부인은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정말 지극정성이셨다. 사치품을 좋아하는 새어머니의 취향에 맞는 것들을 구입하다 보니 백작가의 재정이 휘청이기 시작했단다. 아버지는 새로운 보석을 사주기 위해 세금을 높였고, 블렌져스 영지는 생기를 잃어갔지.”
공작부인이 아카데미에 가 있는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곡창지대로 유명한 영지에 든 가뭄과 새어머니의 임신. 그녀는 영지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새어머니의 임신 소식에 기쁨을 먼저 느꼈다고 했다.
“이제 지긋지긋한 폭력이 끝날 거라 생각했으니까.”
끝났다면 공작부인은 블렌져스의 성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블렌져스 백작은 임신한 부인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빼줄 것처럼 굴었고, 부인은 돈을 물 쓰듯이 써댔다. 문제는 백작가에 돈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아버지는 눈엣가시인 나를 제이페인가에 팔아넘기려고 했어.”
그리고 그때쯤 공작부인은 백작가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도움으로 인해. 거기다 곧 동생도 태어나니 백작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사라졌다고.
“혼담이 오가던 시기에는 아카데미에서 몬셸드를 만나야 했단다. 그는 나보다 한 살 많았는데 조금만 대화해도 그의 가치관을 금방 알겠더군.”
몬셸드 제이페인. 카나린의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이 겨우 백작위에 머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랬기에 언제나 자신을 더 위로 올려줄 인맥을 맺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당시에는 다른 후작가와 공작가의 자식들이 전부 남자였기 때문에 여자가 있는 백작가를 선택한 거라고 했다.
“그 녀석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 자신이 돈으로 산 수집품쯤으로 생각했겠지. 나는 어차피 블렌져스 백작가를 나갈 거고 그 녀석과 혼담은 깨질 거라 믿었기에 별로 신경 쓰진 않았지만.”
제이페인 백작의 태도가 눈에 선했다.
어쩜 사람이 한결같은지. 카나린에게 했던 짓과 똑같았을 것이다. 나는 당연히 그 후 그녀가 백작가에서 나와 자유를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18살 때 성인이 되자마자 곧장 황실의 정식 승인을 받고 블렌져스의 성을 버렸단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문제요?”
지금까지 계속 문제였던 것 같은데 또 생기나요.
나는 아침드라마보다 파란만장한 공작부인의 인생에 놀랐으나 카나린은 공작부인이 성을 버렸다는 것을 처음 알았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성을 버릴 수도 있는 건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새어머니가 시종과 눈 맞아 사랑의 도피를 했다. 알고 보니 그녀가 임신했던 아이도 시종의 아이였고. 새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들키면 죽을 거라 생각해서 여태껏 모은 귀중품을 들고 도망갔단다.”
순식간에 아침드라마보다 더 막장이 되었다!
너무 충격적이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미 백작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으나 아버지는 자신을 배신한 새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어 빚까지 내서 청부업자에게 살인을 부탁해. 그렇지만 새어머니는 대부분의 보석을 팔아치우고 제국을 떠났기 때문에 살인은 실패로 돌아갔단다. 배를 타고 서대륙으로 갔거든.”
남은 것은 블렌져스 백작가의 몰락.
가뭄과 높은 세율로 인해 영지민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산적이 되는 자들도 있었다. 치안이 극악으로 나빠지자 자연스럽게 상권도 침체한다. 결국 빚을 갚기 위해 블렌져스 백작은 영지를 황실에 반납하고 돈을 받는다. 그의 로맨스를 찬양하던 귀족들은 단번에 돌변해서 그를 비웃었다.
그들에겐 버려진 휴짓조각보다 가벼운 가십거리였을 뿐이기에.
“블렌져스 백작가에 다스릴 영지도 관리할 영지민도 남아있지 않았으나 가문의 이름은 남아 있었어. 귀족의 의무. 가문을 이어가는 것이겠지. 아버지는 내게 블렌져스 백작이 되라고 강요하기 시작했고 나는 거부했다. 더 이상 나는 블렌져스가 아니었으니.”
블렌져스 백작은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그는 여태껏 공작부인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놓고 백작가를 이으라니.
“어릴 때는 아버지의 폭력을 피하려고 필사적이었거든. 시키는 건 뭐든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고, 아버지는 자기가 명령하면 내가 당연히 들을 거라 생각했나 봐.”
멍청하게도. 공작부인은 한숨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의 나였다면 얌전히 아버지의 말을 따랐겠지만 로엔을 만나고 나는 변했어. 아버지는 내 변화를 전혀 몰랐지. 아니 관심 없었단다.”
호박색 눈동자는 하얗게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을 덮는 눈처럼 그녀의 상처도 세월에 덮인 걸까. 공작부인의 인생은 내가 감히 상상도 못 할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학대받고 자란 유년 시절, 그녀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친구의 죽음.
“웃기게도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자 그토록 원하는 게 들어오더군. 솔직히 조금 통쾌했단다. 내가 원망하던 아버지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맑은 홍차에 비친 공작부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치 오래된 신물을 꺼내 기사를 읽는 사람처럼.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덤덤했다.
“뭐, 그래서 결국은 제이페인 백작과 혼담은 깨지고 블렌져스는 이름마저 황실에 반납하게 됐지. 이을 사람이 없었으니.”
그녀가 할 수 있었던 복수.
블렌져스 백작의 자업자득이기도 했으나 마지막은 공작부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복수였다. 블렌져스라는 이름을 역사에서 지우는 것.
나는 문득 공작부인의 여생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고 평안하길 바랐다.
“카나린은 어떻게 하고 싶니?”
“네?”
공작부인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가 끝나자 찻잔만 물끄러미 보는 카나린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냐고. 카나린은 복잡한 표정으로 공작부인의 얼굴을 마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