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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71화 (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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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가문을 나가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

“저는…….”

카나린의 음성에 망설이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당장이라도 가문을 나가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이해해. 무섭겠지. 성을 버리는 것은 평민이 된다는 것이니까. 네가 이때까지 누려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평생을 백작가의 영애로 살아오던 카나린이 평민이 되는 것은 단순하게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것만이 아니었다. 권리를 포기하는 것.

‘나야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신분에 연연하지 않지만 신분제도 안에서만 살아온 카나에게는 엄청난 공포감으로 다가올 거야.’

솔직히 나도 지금은 공작가의 신분이니 더 불편함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평민이나 재정이 어려운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생각 없이 살고 있진 못하리라.

“나는 백작의 신분을 포기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단다. 이렇게 살 바에 차라리 평민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물기가 고인 카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으나 제이페인 백작이 손을 쓰기 전에 선수 치는 편이 수월하다는 것은 명심해.”

“네…….”

나는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작부인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예전부터 궁금했으나 물어보기 애매해서 참고 있었던 질문.

“그런데 숙모는 어떻게 삼촌과 결혼하게 된 거예요?”

아카데미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계기로 결혼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공작부인은 평민이었으니 가문끼리의 결합도 아닐 테고.

“원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는데…….”

공작부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신선했다. 과연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공작부인은 호기심 가득한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 당시 평민이 되어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르메스가 제안을 해왔어. 3년 동안 자신과 결혼 생활을 하면 생활비를 지원해주기로. 그는 결혼을 하기 싫어했거든. 주위에서 압박에서 벗어날 방패가 필요했던 거지. 내가 그 방패 역이었고.”

말로만 듣던 계약 결혼!

나는 흥미진진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돌연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때는 공작부인이 될 거라 생각도 못 해서 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

가볍게 돌리려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원래였다면 엄마가 공작부인이었을 테니. 공작도 원래는 기사직을 받아서 황실기사단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들었다.

“그런 재미없는 이야기란다.”

차마 결혼에 관한 것을 더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말을 끝으로 공작부인과 티타임이 끝났다.

공작부인은 카나린에게 동질감을 느꼈는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위로했다. 그리고 한동안 공작가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데인에겐 내가 말해 놓을 테니 편히 쉬렴.”

우리는 공작부인의 집무실에서 나와 내 방으로 이동했다.

카나린은 심란한 마음을 숨기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니아가 날 위해서 공작부인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

“아니에요. 카나의 미래가 달린 결정인걸요. 신중하게 선택해야죠. 카나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저는 카나의 결정을 존중해요.”

“고마워요.”

카나린은 공작가에 도착하고 지은 표정 중 가장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공작부인과 대화를 통해 불안이 조금은 가신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녀가 공작가에 머무는 동안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제이페인 백작의 존재가 걱정되긴 했다.

어린 코끼리에게 족쇄를 묶어 놓고 도망가지 못하게 해서 키우게 되면 성장한 코끼리는 학습된 무기력에 의해 도망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카나린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할까 봐.

‘말로는 어떤 결정이든 존중한다고 했는데.’

카나린이 결혼을 택한다면 말리고 싶다. 그녀의 불행이 선명하게 보였기에.

‘아니야. 카나는 이미 백작가에서 도망쳐 나왔는걸.’

나는 걱정을 털어내며 카나린의 고민을 덜어 줄 수 있는 질문을 했다. 진로 상담을 하는 선생님처럼 그녀가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카나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꿈이요?”

“네. 아카데미 선생님이라든가 외교대신이라든가 아니면 여기사라든가!”

분위기 전환 겸 가볍게 던진 내 의도와 다르게 카나린은 진지한 얼굴로 한참이나 고민했다. 이윽고 이어진 카나린의 대답은 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글쎄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정해주신 상대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어요.”

애초에 그녀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백작가에 카나린을 사람으로 봐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이페인 백작부인이 죽고 나서 그녀를 돌봐줬던 집사조차도 카나린은 언젠가 제이페인 백작이 정해준 정혼자와 결혼하리라 생각했겠지.

“그저 막연하게 언젠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으면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돌아가신 어머님과 못한 것들을 제 자식과 하고 싶었어요.”

그녀는 씁쓸하게 말했다.

카나린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뭐라고 하던 위선자같이 보일까 봐.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카나린은 우물쭈물하며 나를 불렀다.

“저기 니아…….”

“네?”

“만일 제가 평민이 된다 하더라도 저와 친구로 남아 있어 주실 건가요?”

카나린은 못내 불안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위로할 말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는데 카나린의 말을 듣자 김이 팍 샜다. 나는 꽉 막혔던 숨을 뱉으며 쌍둥이에게 하듯이 카나린의 양 볼을 쭈욱 당겼다.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이건 바보 같은 질문한 벌이에요.”

“하, 하지마은 사교계에서…….”

카나린은 새는 발음으로 열심히 변명했다.

자기가 평민이 되는 것보다 평민인 친구 때문에 떨어질 내 평판을 걱정한다니. 대체 얼마나 착한 거야. 나는 카나린의 볼을 놓고 믿음직스럽게 웃었다.

“뭐 어때요. 제가 예전에도 말했죠. 사교계의 평판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녀의 눈가가 빨개졌다.

카나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려고 했는데 밖에서 분위기를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언니 바쁘신가요?”

“누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쌍둥이였다.

그들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굉장히 초췌한 상태로.

숙취에 시달리다가 이제 막 일어난 행색이었다. 그들은 카나린이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는지 문을 열고 3초 동안 굳어있었다.

“어째서 카나린이?”

“아, 좋은 아침입니다.”

구름에 가려져 안 보였으나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을 것이다. 카나린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쌍둥이에게 예의상 아침 인사를 했다.

“…….”

“…….”

그들은 카나린을 보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갔다. 카나린이 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겠지. 무겁던 분위기가 쌍둥이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풀어졌다.

“풉.”

“푸훗!”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그녀에게 닥친 상황이 전혀 웃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을 잠시 덮어두고. 회색 구름이 잔뜩 낀 흐린 하늘과 달리 방안에 울려 퍼진 웃음소리는 청명했다.

***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가 나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다.

‘아, 또 꿈인가.’

이제는 익숙해져서 바로 데이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데이지의 꿈은 비정기적이었으나 규칙적이었다. 꿈을 꾸는 주기는 들쭉날쭉하면서 꿈의 내용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원작대로.

‘난생처음 보는 건물이지만 왠지 분위기상 이 건물이 마탑인가 보네.’

그도 그럴 게 저번에 꿨던 꿈이 졸업식이었으니.

그녀는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마탑으로 향한다. 마탑주의 마음에 든 데이지는 그의 애제자가 되어 열심히 마법을 배운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를 가지고 태어나다니. 안타깝군. 내가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그 녀석을 마탑으로 데려와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건데. 정령을 매개로 하는 저주는 굉장히 희귀한 편이니까.”

마탑주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 인재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지식 욕구를 채우지 못한 안타까움이었나. 원작에는 그저 마탑주가 시리우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는 서술만 나왔기에. 마음속으로 뭐 이런 할아버지가 다 있냐고 툴툴거렸으나 내 말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제 은인이고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흠,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좋다. 너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지.”

네? 그냥 눈빛만 보고 허락하는 건가요.

마탑의 문을 두드린 데이지는 선천적으로 정령에게 사랑받는 체질 덕분에 단숨에 마탑주를 만났고, 정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시리우스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당찬 행동이 마음에 든 마탑주는 제자로 받아들이고 장면이 전환된다.

‘소설에서 데이지가 마탑에 들어가는 부분이 이상하리만큼 생략됐었는데 그냥 내용이 없었던 거구나.’

유체이탈하는 것처럼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지루해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좀 적응했더니 이렇게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구경하는 것도 가능하게 됐다.

‘그런데 왜 데이지 얼굴은 안 보일까.’

나는 갈색 머리의 소녀 근처를 빙글빙글 돌며 고민했다.

데이지의 얼굴은 초상화에 검은색 물감으로 아무렇게 덧칠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 얼굴은 선명하게 보이는데.’

꿈이라서 얼굴이 뭉개졌다고 하기에는 데이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의 얼굴은 다 잘 보였다.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은 곧 잠에서 깨어날 거라는 신호였다.

***

“니아 좋은 아침이에요.”

“카나! 밖에 봤어요? 눈이 엄청 내렸던데요.”

카나가 공작가에 머무른 지 일주일이 지났다.

다행히도 그사이 제이페인 백작은 찾아오지 않았다. 일시적인 평화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백작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쌍둥이는 카나린이 공작가에 머무르게 된 경위는 자세히 모르지만 딱히 궁금해하지도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예전에는 탐탁지 않아 했는데 지금은 내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인 모양이다.

“좀 이따 쌍둥이랑 눈사람 만들러 갈까요?”

“눈사람이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사람이 뭔지 물었다.

눈사람을 모르다니! 나는 왠지 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카나린은 교복만 달랑 입고 왔었기에 공작가에 지낼 동안 입을 옷이 없었다. 공작부인은 이참에 옷을 새로 맞추라고 했으나 카나린이 극구 사양해서 타협점으로 내가 어린 시절 입던 옷을 입기로 했다.

‘안 버려서 다행이야.’

맥시멀리즘인 내 성향을 칭찬했다.

몇 번 안 입은 드레스를 버리기엔 아까워서 놔뒀는데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나는 두툼한 겉옷과 털모자와 목도리를 카나린에게 입혔다.

“처음 보는 장갑이네요.”

내가 손모아장갑을 건네자 카나린이 신기한 눈빛으로 받았다.

어린이들이 자주 끼는 장갑인데. 더군다나 북쪽 지역에 영지가 있는 카나린이라면.

‘백작이 장갑도 안 사준 건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켰다. 확실히 제이페인 백작은 언제나 치장에 도움 되는 것들만 그녀에게 사 준 듯했다. 그러니 파티에 갈 때 착용하는 실크 장갑이나 가죽장갑은 봤겠지만 보온을 위한 장갑은 처음 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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