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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마음을 숨기며 카나린의 양손에 장갑을 끼워줬다.
“잘 어울려요!”
좀 과했는지 카나린은 솜이불을 두른 것처럼 동그래졌으나 감기를 조심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눈이 쌓인 후원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 하얀 입김이 절로 나왔다.
겉옷을 꽁꽁 껴입고 왔으나 차가운 겨울바람에 코끝이 빨개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직 후원에 나온 사람이 없는지 발자국 하나 없이 소복이 눈이 쌓여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뽀득뽀득거려요!”
카나린이 눈을 반짝이며 폴짝폴짝 뛰었다. 나도 그녀와 함께 후원을 거닐었다. 새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는 희열! 도화지처럼 하얀 눈밭을 달리며 발자국을 찍다가 지칠 때쯤 원래 목적을 상기시켰다.
“카나, 눈을 뭉쳐서 둥글게 만들어주세요.”
“이렇게요?”
내가 카나린에게 눈사람을 만드는 방법을 열심히 강연하고 있었는데 아침 훈련을 마치고 온 에리얼이 끼어들었다.
“저도 할래요!”
그는 연무장에서 바로 왔는지 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고 있었다.
“땀 흘리고 추운 데 있으면 감기 걸린다.”
“괜찮습니다. 저는 누님처럼 연약하지 않으니까요.”
얇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에리얼이 걱정되어서 말했더니 반대로 내가 공격당했다!
나는 억울했다. 남들보다 체력이 저질일 뿐 연약한 것은 아니었다. 에리얼은 그게 그거라고 했지만.
“그래.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고 하니. 괜한 걱정이었네.”
나는 부루퉁하게 대답하고 카나린에게 마저 설명했다.
그녀는 곧잘 따라 했다. 예리한 눈빛으로 주먹만 한 눈 뭉치를 장인의 정신을 불어넣으며 동그랗게 만들었다.
“자, 이제 어느 정도 크기가 커졌으면 조심해서 굴리면 됩니다.”
“굴려요?”
카나린은 기껏 보름달처럼 예쁘게 만들었는데 굴리라고 해서 아쉬워했다.
옆에 있던 에리얼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클수록 좋다는 사족을 덧붙였다. 그녀는 ‘모양보다는 크기인가’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눈사람이 아니라 예술품을 만들 기세인데.’
하지만 근심 없어 보이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말리지 않았다. 카나린이 좋으면 됐지.
신나게 눈을 굴리는 에리얼과 카나린을 보고 있다가 장갑을 벗고 하얗게 쌓인 눈을 만졌다.
‘차가워.’
하얗고 차가운 눈을 보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존재가 떠올랐다.
시리우스. 그는 그날 이후로 소식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전처럼 몸에 이상이 생겨서 또 혼자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으나 그의 소식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수도가 떠들썩할 정도라고.’
사교 모임에 따로 참석하지 않는 내가 들을 정도로 그는 유명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카나린 때문에 정신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으나 고작 며칠 만에 그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문이 수도를 휩쓸었다. 신문은 물론이고 거리만 나가도 다들 입을 모아 시리우스에 대해 떠들어대기 바빴다. 고위 귀족의 사교 모임까지 시리우스의 이야기로 점령될 지경!
‘정작 당사자에게서 소식이 없고.’
첼시가 알려준 소문을 들었을 때는 안심했었다.
시리우스가 더 이상 저주로 고통받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런데 그 후 나도 모르게 테라스에 시선을 주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중에서야 내가 은연중에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짜증 나.”
나는 손안에 잡힌 눈을 뭉개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마치 내가 기다리는 것 같잖아! 아니 기다리는 건 맞지만 적어도 내가 저주를 풀어줬으니 상황설명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날 아침에 뭐라 말하려고 하던 시리우스를 재촉해서 공작가로 도망치다시피 돌아간 것은 나였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공작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상한 오해하는 건 아니겠지.’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하얀 입김이 길게 이어졌다.
저주가 풀려서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걸까. 내가 시리우스에게 책임지라고 한 것도 아니니 마음이 바뀌더라도 할 말은 없지만.
‘그냥 얼굴 보고 이제 괜찮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신경 안 쓰일 텐데.’
그날 밤, 술에 취해있었으나 내 스스로 한 결정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다만, 다만…….
“니아. 저 결정했어요.”
“네?”
눈을 만지작거리며 시리우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카나린이 다가왔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털어내며 카나린이 한 말을 곱씹었다. 결정이라면.
“제이페인의 성을 버리고 평민이 되기로 결정했어요.”
“정말요?”
다행이었다.
큰 결심을 내린 카나린의 얼굴은 어딘가 개운해 보였다.
“네. 니아와 함께 일주일 동안 지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카나가 고민해서 결정한 거죠! 제가 한 건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는걸요.”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를 위해 해준 것이 없었기에.
내가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하자 카나린은 눈을 굴릴 때보다 더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백작가에서 도망쳐 나와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저를 진정시켜줬잖아요. 그리고 제게 새로운 길을 알려줬어요.”
“그건 숙모가…….”
카나린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예전의 카나린이 아니었다. 한 꺼풀 벗은 모습이었다.
“니아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방법을 알았더라도 선택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녀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가 없었더라면 다시 백작가로 돌아갔을 거라며.
“저는 아카데미 다닐 때도 당연히 귀부인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카데미에서도 대부분 귀부인의 소양을 쌓는 수업 위주로 들었어요. 그 선택에 제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저에게 주어진 의무만 있었죠.”
18년 동안이나 그렇게 살았다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공작가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저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제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지금도 제가 눈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전부 니아 덕분이에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카나를 보고 있으니 주책없이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녀의 성장이 대견해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 날갯짓 하는 모습이 눈부셔서.
“저는 이제 제이페인 영애가 아니라 카나린으로 살고 싶어요. 남은 인생은 제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며 저를 찾아가는 삶을 살기로 정했어요.”
“멋져요! 분명 새로운 광경이 펼쳐질 거예요. 비록 가끔은 힘들고 과거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날이 있더라도, 많은 것을 경험하며 이것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거라 믿어요.”
차오르는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힘을 주며 말했다. 카나린은 노란 유채꽃처럼 맑게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수줍게 물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니아에게 또 상담해도 되나요?”
“당연하죠. 힘들 때 의지하고 기쁜 일에 같이 축하해주는 게 진정한 친구 아니겠어요?”
“고마워요. 이런 친구가 제게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든든한지.”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과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나와 친구가 된 것으로 자신의 평생 운을 다 썼다는 농담까지 곁들여서. 나도 카나린과 친구가 되어서 평생 운 다 썼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제 붙일까요?”
우리가 농담을 하고 있는데 에리얼이 불쑥 나타났다. 커다란 눈덩이를 들고.
이제 봤더니 카나린의 옆에도 있었다. 커다란 눈덩이가.
에리얼은 카나린이 만든 눈덩이를 자신이 만든 눈덩이에 올리더니 어디에서 준비해온 돌멩이로 눈과 코를 만들고, 기다란 나뭇가지로 입을 만들었다. 눈사람이 방긋 웃고 있었다.
“완성!”
“엄청 크네요.”
“보통은 이거보다 작아요. 엘이 너무 크게 만든 거예요.”
완성된 눈사람은 에리얼보다 컸다.
카나린이 굴린 눈덩이는 대체 어떻게 굴렸는지 그녀의 키만큼이나 컸고, 에리얼도 만만치 않게 굴리더니 나만 한 눈덩이가 만들어졌다. 나와 카나린의 키를 합친 눈사람은 정말 내가 본 눈사람 중에서 역대급 크기였다.
“카나는 힘이 세군요.”
자기만 한 눈덩이를 굴린다는 것은 의외로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나는 내 무릎까지 오는 눈덩이도 겨우 굴리는데.
“그러게요. 오늘 또 이렇게 새로운 저를 발견했네요!”
기뻐 보이니까 됐나.
에리얼은 팔을 구해오겠다며 사라졌고, 카나린은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눈사람에게 감았다.
“예쁘다.”
눈사람이요?
나는 카나린의 미적 감각을 잠깐 의심했다. 그거겠지. 자기 자식이 남 눈에는 안 예뻐도 내 눈에 예뻐 보이는 거.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눈사람을 뿌듯하게 감상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식당에 오지 않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다들 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눈썹이 잔뜩 올라간 아리엘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우리 세 사람은 주춤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색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다 큰 성인이 밥 먹을 시간도 잊고 눈사람 만들고 있었어요?”
“…….”
아리엘은 우리가 대답하지 않아도 커다란 눈사람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나와 카나린은 눈치만 봤다. 그러나 에리얼은 화내는 아리엘을 향해 한마디 툭 뱉었다.
“아리, 너 빼고 놀아서 화난 거지?”
역시 맞을 짓을 하는군. 아니나 다를까 아슬아슬하게 참고 있던 아리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녀는 에리얼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그를 쏘아붙였다.
“죽을래? 네가 제일 잘못했어! 언니 감기 잘 걸리는 거 알면서 안 말리고 뭐 했어?”
“윽! 아니, 누님 요즘 괜찮은 거 같아서…….”
아리엘은 에리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혀를 차며 돌아섰다.
“일단 다들 들어와요. 데이지는 담요를, 마리는 주방장에게 따뜻한 감자 포타주를 만들라고 말해줘.”
“네.”
마리와 데이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방 온도를 높여놨는지 들어가자마자 따끈한 온기가 반겨줬다. 축축하게 젖은 겉옷을 벗고 데이지가 가져온 담요를 둘렀다.
“오늘은 따뜻한 물에 목욕하고 실내에서도 따뜻하게 입고 다녀요. 감기 기운 있으면 바로 말하고요.”
“응. 걱정 마.”
아리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내 대답이 신뢰가 가지 않는지 약도 먹고 자라는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