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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사촌으로 살아남기-73화 (7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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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감자 포타주를 싹 비우고, 준비된 점심까지 다 먹었다.

‘밖에서 열심히 뛰어놀았더니 식욕이 도네.’

배부르고 따뜻하니 저절로 눈이 감겼으나 지금 자면 밤에 못 잔다는 아리엘의 잔소리에 티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에리얼은 오후에 공작과 면담이 있어서 돌아가야 했고 나와 카나린과 아리엘은 내 방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홍차가 아니라 아리엘이 특별히 부탁한 꿀차를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타이밍을 재던 카나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리엘, 나 평민이 되기로 정했어.”

카나린과 아리엘은 미묘한 사이였다. 서로 친구는 아니지만 인맥의 교집합에 내가 있어서 어쩌다 보니 자주 만나는 사이랄까.

‘그냥 친구 하면 좋을 텐데.’

거기다 아카데미에서 같은 반이어서 반말까지 하는 사이면서 이상하게 거리감이 있었다. 어쩌면 카나린이 나를 밀었던 것을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둘의 사이를 고민하고 있는데 아리엘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게 끝?

아리엘은 묘하게 냉정했다. 에리얼에겐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으나 아리엘에게는 카나린의 사정을 제법 자세히 설명했었다.

그랬기에 카나린도 아리엘에게 자신의 결정을 말하는 것이었고. 나는 아리엘에게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카나린이 내 손을 잡아서 참았다.

‘아니 기본 예의가 있다면 위로의 말이라든가 축하의 말이라든가 한마디는 더 하지 않나?’

나는 나중에 아리엘과 따로 대화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카나린에게 말을 걸었다. 이미 들은 이야기였으나 카나린이 민망하지 않도록 내가 아리엘의 몫까지 맞장구를 쳤다.

“카나 잘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은 아버지 자격이 없어요! 아무리 피가 물보다 진하다지만 저는 얼마든지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가족을 구성하는데 피가 전부가 아니니까요.”

원래 남의 부모님 욕은 안 하는 편인데 제이페인만 생각하면 욕이 절로 나왔다.

마음속에서 제이페인 백작은 카나린의 아버지 자격 없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그 정도면 남이지. 나는 합리화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당분간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카나린의 대답을 끝으로 방은 고요해졌다.

실내 온도는 따뜻했으나 분위기는 겨울바람보다 찼다. 카나린과 아리엘은 말없이 차만 홀짝였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 했는데 안색이 안 좋은 아리엘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에 놀란 것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리 왜 그래?”

“아, 아까 점심을 잘못 먹었나 봐요.”

내 물음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더니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화가 안 된다고. 창백해진 낯빛이 걱정됐으나 약 먹으면 괜찮다고 말하며 방을 나갔다. 아까까지는 괜찮아 보였는데. 그녀의 몸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고 카나린에 관한 이야기도 할 겸 좀 있다가 그녀의 방으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리엘에게는 따로 말하지 말아요.”

“네?”

“자업자득인걸요. 아리엘이 저를 싫어하더라도 할 말 없어요.”

어떻게 알았지. 내 표정이 그렇게 잘 드러나나.

나는 카나린의 부탁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카나린이랑 한두 번 볼 사이도 아니고, 평생 볼 텐데 계속 저런 태도라면 서로 불편할 것이다. 어차피 한번 짚고 넘어가려고 했고.

‘아리엘이 거부하면 어쩔 수 없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풀어보려고 시도는 해봐야지.

적어도 카나린에게 냉대하는 이유 정도는 들어봐야 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문제가 있으면 고쳐서 관계를 개선하길 바랐기에.

“일단 숙모를 뵈러 갈까요?”

아리엘의 문제를 덮어두고 공작부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우선은 카나린이 제이페인 백작과 연을 끊는 것이 먼저였다. 노크를 하자 공작부인이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일주일 만이구나. 공작가에 머무는데도 바빠서 신경을 못 썼네.”

“아닙니다. 여기서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공작부인은 계속 바빠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취침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집무실에서만 지냈기 때문이다. 많이 바쁠 때는 식사도 여기서 한다고.

‘끝이 보이네.’

그녀의 책상을 뒤덮었던 서류의 산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공작부인의 눈 밑에 자리 잡은 짙은 다크서클이 그녀의 피곤함을 알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부인은 우리를 반겨줬다.

“결정을 내렸니?”

“네. 성을 버리기로 정했습니다.”

카나린은 망설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부인은 카나린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텐데. 옆에 친구가 있기 때문이겠지.”

“……네. 니아가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어요.”

카나린은 공작부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심경변화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공작부인이 신기한 것이겠지.

“나도 그랬단다.”

호박색 눈동자에 따뜻한 애정이 감돌았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카나린이 숙모와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시려나.’

잠시 추억에 젖어 있던 공작부인은 서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는 깃펜으로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깃펜이 마침표를 찍고 종이를 카나린에게 건넸다.

“신분 포기 청원서?”

나는 카나린의 손에 들린 종이를 힐끔 봤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아슬란데 제국법에는 신분을 포기할 수 있는 법이 있다.”

그녀가 성을 버릴 수 있었던 방법인가.

확실히 그런 제국법이 있다면 제이페인 백작도 반발하지 못할 것이다. 안전하고 완전하게 연을 끊을 수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이 법의 존재를 아는 귀족은 매우 드물지. 아마 계승권 다툼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어.”

권력보다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한 사람이 만든 법일까. 아니면 다른 계승자들의 계승권을 박탈시키기 위해 만든 법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한참이나 종이를 내려다보던 카나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신분을 포기하는 법에 아버님의 허락은 없어도 괜찮나요?”

“그래. 내 친구가 제국법을 다 뒤져서 확인한 거야. 나도 그렇게 성을 버렸고.”

엄마가 그 두꺼운 법전을 다 뒤졌다니. 너무 존경스러웠다.

제국법전의 두께는 상상을 초월한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법을 추가하거나 수정하다 보니 1000년이나 이어진 제국법전은 내 손목에서 팔꿈치 정도의 두께가 됐다. 심지어 종이에 적힌 글자는 깨알만 해서 눈이 빠지게 봐야 한다.

‘심심해서 읽어보려다가 포기했었는데.’

살다 보면 법의 힘이 필요할 때가 있을까 봐 여유로울 때 읽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책의 두께를 보는 순간 도저히 킬링타임용으로 읽을 책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엄마와 숙모는 참 우정이구나.’

친구를 위해 법전을 다 읽다니. 새삼 둘의 우정을 감탄하며 공작부인의 설명을 들었다.

“오직 당사자의 의지만 필요하단다. 가문에 자식이 너 하나라면 조금 까다롭겠지만, 너는 동생이 있다고 했으니 금방 끝날 거다.”

“다행이네요.”

카나린은 내게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처음이라며 작게 속삭였다.

“다만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보니 서류를 제출하러 가도 확인 절차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야.”

“제, 제가 법전을 뒤져야 하나요?”

카나린도 법전의 두께에 공포를 느꼈는지 말을 더듬으며 당황했다.

그녀의 모습에 옅은 웃음을 흘린 공작부인이 다른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걸 들고 가렴.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법전에서 옮겨 적은 내용이야. 몇 페이지에 있는지도 적어뒀으니 만약 행정관이 법전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하면 그 페이지를 보여주렴.”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상담한 날 미리 찾아뒀다니. 그날은 서류도 밀려있을 때였는데. 카나린은 법전을 뒤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활짝 웃으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왠지 내가 위로해줬을 때보다 더 기뻐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

아침 일찍 일어난 나와 카나린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어제 공작부인에게 청원서를 받은 카나린은 당장이라도 서류를 제출하러 가고 싶어 했으나 직원들이 이미 퇴근했을 시간이라 참아야 했다.

‘이렇게 의욕 넘치는 카나린은 처음이야.’

나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카나린이 혼자 황궁에 가는 것이 불안해서 따라오긴 했지만 혹시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볼까 봐 걱정됐다.

‘으음, 시리우스라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나타나려나?’

무의식중에 시리우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튀어나왔다.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마차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하지 마! 기대하지 말라고!’

아침잠이 덜 깨서 잠시 졸던 카나린이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서 깼으나 나는 아무 일도 없는척하며 창문을 보고 있었다. 카나린은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면서 왜!’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 한 번 안 한 시리우스가 너무 괘씸해서 한동안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황궁에 가게 되어서 시리우스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단순한 오지랖이다. 저주가 제대로 풀렸는지 소문이 아니라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신경 쓰는 거야.’

그의 눈부신 은발을 생각하면 저주가 확실히 풀렸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몸 상태라든가 다른 부작용은 없는가 걱정되는 거라고.

공작가와 황궁의 거리가 가까웠기에 잡생각이 넘쳐흐르기 전에 마차가 멈췄다. 생각이 더 깊어지기 전에 멈춰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잠들어있는 카나린을 깨웠다.

“카나 많이 졸려요? 황궁에 도착했어요.”

“아, 죄송해요. 어제 잠을 좀 설쳐서…….”

카나린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녀는 금방 깨어났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법무부 사무실로 이동했다. 황궁에는 파티가 있을 때와 시리우스의 궁에 갔을 때를 빼고는 처음이라 행정관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은 낯설었다.

“카나 같이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 걱정 마세요! 저 혼자 할 수 있는걸요. 빨리 끝내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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